어둠이 짙게 깔린 그레이시어 성벽 모퉁이, 만년설 서리가 맺힌 은밀한 골목 끝자락에 비열한 숨소리들이 얽혀들었다.
"클로이 영애님, 그렇게 보기 좋게 패배하고 도망치시는 길입니까?"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가 밧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밤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뱀 문양은 벨몬트 자작가의 최후 비밀 암살 병단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벨하르트 대공가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지하 사역장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클로이는, 찢겨 나간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자작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녀의 눈동자에 기괴한 희망과 공포가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대장을 맡은 사내는 음산하게 속삭이며 붉은 안개 속에서 이빨을 드러냈다.
"대공가는 지금 축제 분위기겠지요. 하지만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 가냘픈 입양아 년을 우리 손으로 직접 찢어발겨 주지."
그들의 타깃은 여전히, 벨하르트의 유일한 약점이자 보배가 된 나, 레오니였다.
하지만 그 비장한 선언이 무색하게도, 그들이 노리는 '가냘픈 입양아'는 머나먼 침실 안에서 아주 편안하게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 눈앞에는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반투명한 파스텔 핑크빛 창이 둥실 떠 있었다.
[괴수 교감 장부 — 근방 적대 세력 감지 시스템: 100%] [경보: 그레이시어 성 서쪽 성문 외곽 제3골목에 적대적 생명체 12명 매복 중. 주 타깃: 레오니 벨하르트.]
"어쩜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을까."
나는 딸기 우유색 솜사탕 같은 양털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장부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적들의 실시간 위치가 마치 지도 위의 붉은 점처럼 깜빡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GPS가 따로 필요 없는 완벽한 실시간 중계 화면이었다.
"르네, 에르하르트 오빠. 여기 화면에 반짝이는 빨간 점들 보여요? 아, 두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 참. 그러니까 제가 짚어주는 곳을 똑똑히 기억해야 해요."
내 침대 옆에 서 있던 수석 보좌관 르네가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푸르스름한 눈동자에는 이제 나에 대한 의심 따위는 단 1%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경외심과 절대적인 신뢰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께서 지목하신 곳이라면 바람 한 점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물망을 쳐 두었습니다. 서쪽 골목의 퇴로는 이미 정예 기사단이 차단한 상태입니다."
"쳇, 꼬맹이 주제에 귀신같이 알아채기는. 진짜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거야?"
내 침대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에르하르트가 붉은 꼬리를 팽팽하게 세우며 투덜거렸다. 츤데레 오빠의 귀 끝이 붉게 물든 것을 보니, 동생의 영특함에 또 한 번 내심 감탄한 모양이었다.
"마법이 아니라 철저한 경영학적 분석이랍니다, 오빠. 적들의 행동 패턴과 도주 경로를 데이터화하면 다음 움직임은 뻔하니까요."
나는 에르하르트의 뜨끈뜨끈한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장부를 조작하느라 손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지독한 얼음장 같은 한기가, 오빠의 뜨거운 체온을 나누어 받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온몸을 따스하게 채우는 온기에 나도 모르게 뺨을 오빠의 소매에 부볐다.
"흥, 추우면 추우며 말을 하지. 꼬맹이가 왜 이렇게 몸이 찬 거야."
에르하르트는 귀찮다는 듯 틱틱대면서도, 내 손을 더 꽉 움켜쥐며 자신의 체열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귀여운 오빠 같으니라고.
"자, 그럼 뱀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나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잠시 후, 스산한 밤바람이 몰아치는 서쪽 성문 밖 골목길.
"움직이지 마라."
클로이와 벨몬트 자작의 암살 병단이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강철 방패들이 사방을 가로막았다. 칠흑 같은 갑옷을 입은 벨하르트의 기사들이 골목 입구와 출구를 완벽하게 둥글게 에워싼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알고 벌써 기사들이 여기 있는 거지?!"
암살 병단의 대장이 경악하며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칼자루에 손을 대기도 전에, 에르하르트가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도약해 그의 손목을 짓밟았다.
"콰직!"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에르하르트는 살기등등한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어디서 쥐새끼들이 감히 우리 집 앞마당에서 얼쩡거려? 우리 꼬맹이가 너희 동선까지 친절하게 다 알려 주더군."
"말도 안 돼……! 그 애송이 년이 어떻게 우리의 기습 경로를……!"
뒤이어 나타난 벨몬트 자작이 쇠사슬에 묶인 채 기사들에게 끌려 나왔다. 그는 이미 성 내부에서 반란을 모의하다 체포되었으나, 마지막 발악으로 암살 병단에게 무전 연락을 취해 탈출을 감행하려던 중이었다.
자작은 사태가 완전히 틀어졌음을 직감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레오니! 네까짓 천한 고아 년이 감히 나를 함정에 빠뜨려?! 네가 벨하르트 가문에 붙어먹어 봤자 결국 버려질 소모품일 뿐이다! 이 괴물 놈들이 언제까지 네년의 알량한 재롱을 봐줄 것 같으냐!"
피를 토하듯 악을 쓰는 자작의 가스라이팅 섞인 비명 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솜사탕처럼 하얗고 몽실몽실한 털 후드를 뒤집어쓴 채,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작님,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보네요."
나는 품속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와 함께, 자작이 법정에 제출했던 가짜 합의서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기억하시죠? 제가 벨몬트 자작가에 귀속되어 있다는 5년 전 원본 양육 합의서요. 하지만 이 문서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요."
나는 합의서 하단에 찍힌 검붉은 빛의 흑장미 인장을 자작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자작님이 사용하시는 특유의 흑장미 인장 잉크에는 납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죠. 벨몬트 가문의 전통이라며 자랑하시던 바로 그 수제 잉크 말이에요. 하지만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진짜 5년 전에 작성된 문서라면, 인장 속의 납 성분이 공기 중의 황과 반응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 방지적 특성을 보여야 해요."
나는 등불을 비추어 인장 표면을 자세히 보여 주었다.
"보이시나요? 이 인장은 푸른 은광은커녕, 아직 마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네요. 최근 사흘 이내에 급조해 날조한 문서라는 명백한 증거죠."
"아, 아냐……! 그럴 리가 없다! 그건……!"
자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비열한 꼼수가 완전히 발가벗겨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클로이 영애님."
나는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대공성 지열 시스템을 고의로 과부하시켜 성 전체를 폭발시키려 했다는 사실도 전부 알고 있어요. 지열 냉각석 표면에 미세한 크랙이 발생하도록 압력 밸브를 강제로 폐쇄하셨죠? 5분만 늦었어도 성 전체가 폭발했을 거라며 좋아하셨을 텐데, 안타깝게도 실패하셨네요."
"어, 어떻게 네가 그걸 알아?! 지열 제어 장치는 고대 마력으로 봉인되어 있어서 대공가 사람들도 쉽게 손대지 못할 텐데!"
클로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르네가 내게 보냈던 낡은 비상 열쇠와 비밀 도면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르네가 예전에 제게 선물로 주었거든요. 대공성 지하의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 도면과 보조 비상 키예요. 당신이 메인 밸브를 막았을 때, 저는 이미 이 우회 관로를 열어 압력을 완전히 분산시켰답니다. 크랙이 갔던 냉각석 조각들은 이미 마력으로 완벽히 보수했고요."
"그, 그렇다면 지하 심층에서 깨어난 이앓이 마수들은 어쩌고?! 그 사나운 고대 마수들이 지열 폭등에 자극받아 당장이라도 이 성을 짓밟을 텐데!"
자작이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소리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부에서 꺼냈던 푸른색 빗을 꺼내 보였다. 영롱한 민트빛 서리가 피어오르는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이었다.
"아, 그 귀여운 아이들이요? 이 빗에 숨겨진 수냉 냉각 변환 특이성 기믹을 작동시켜서 잇몸을 시원하게 마사지해 주었더니, 다들 아기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며 잠들었어요. 지금쯤 지하에서 아주 단잠을 자고 있을 걸요?"
"괴, 괴물 같은 년……! 네가 어떻게 그런 전설적인 도구들을……!"
자작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자작의 발치에 두꺼운 가계 장부 사본과 세금 고지서를 툭 던졌다.
"마지막 선물이에요. 장부를 대조해 보니 자작님께서 지난 10년간 국가 세금을 고의로 부도내고 체납한 금액이 무려 수만 골드에 달하더군요. 영지 가계부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마침 대공가에 들르신 국왕 직속 사법 관리관님께 정식으로 넘겨 드렸답니다."
"무, 뭐라고?!"
골목 끝의 어둠 속에서, 황실 문양이 새겨진 푸른 제복을 입은 사법 관리관들이 엄숙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자작가의 영구 압류 및 반역죄 기소장이 들려 있었다.
"벨몬트 자작, 그리고 클로이 영애. 문서 위조, 살인 미수, 영지 사보타주 및 대규모 국세 체납 혐의로 두 사람을 체포합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나는 벨몬트 자작이다! 저 빌어먹을 고아 년의 말도 안 되는 증거 따위는 무효다!"
자작과 클로이는 차가운 철창 마차에 강제로 처넣어지면서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기사들의 단단한 방패막과 사법 기소망 앞에 그들의 더러운 발악은 눈 녹듯 무참히 짓밟혔다.
골목을 가득 채웠던 음산한 불온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차가운 북부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푸른 별빛만이 골목길을 파스텔톤의 은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였다.
완벽한 사이다, 그리고 완벽한 가문의 승리였다.
"후우……."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장부 사용의 무서운 대가가 다시 한번 나를 덮쳐왔다.
"앗……."
이앓이 빗의 수냉 기믹을 유지하고 적대 세력 감지 시스템까지 동시에 가동한 탓에, 체온이 영하 이하로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하얀 입김이 서리처럼 뿜어져 나왔다. 손가락 끝이 감각을 잃고 굳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동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오는 찰나였다.
"레오니."
머리 위에서 대지를 울리는 듯한 깊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전장에서 갓 돌아온 듯한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카엘렌 대공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공기를 아지랑이처럼 달구고 있었다.
그는 어린 딸 앞이라 어쩔 줄 몰라 하며 비정상적으로 굳어 버린 '감정 표현 고장 수인'답게,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어색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오직 나를 향한 지극한 걱정과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대공은 조용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 가죽이 덧대어진 두꺼운 대공비 가죽 코트를 활짝 열어 보였다.
"……춥다. 이리 와서 얼굴을 묻거라."
지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가냘프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오직 나만을 위한 따뜻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괴수 아빠를 온전히 길들이기 위해, 그의 품속을 향해 힘차게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