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랑―!”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단단한 유리창이 기어이 박살 났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달빛을 받아 은반지처럼 반짝이며 바닥으로 우수수 흘러내렸다.
동시에 검은 망토를 두른 밀사가 사나운 칼바람을 일으키며 레오니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가문의 공식적인 후계 연회가 준비되려는 영지에, 음흉한 클로이 영애가 대공가 지하 지열 마수 사역장에 가하는 사악한 이간 공작 음모의 독수리가 밤하늘을 조용히 가로질러 하강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딜 감히!”
카엘렌 대공의 낮고 묵직한 호통이 복도 전체를 찌렁찌렁 울렸다.
그는 레오니를 품에 안은 채, 빈 왼손을 가볍게 내뻗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던 은빛 단검의 끝날이 카엘렌의 단단한 손아귀에 그대로 붙잡혔다.
콰득!
무시무시한 악력에 쇠붙이가 힘없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단검을 잃은 밀사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뜨기도 전에, 카엘렌의 거대한 전투화가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커헉……!”
밀사는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에르하르트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더니, 쓰러진 괴한의 목덜미를 사납게 짓눌렀다.
“이 더러운 쥐새끼가 누구 앞이라고 이빨을 드러내?”
에르하르트의 빳빳하게 선 꼬리가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레오니는 카엘렌의 단단한 품속에서 쏙 고개를 내밀었다. 괴한이 바닥에 쓰러지며 품 안에서 떨어뜨린 가죽 두루마리가 보였다. 그 가죽 끈 끝에는 아주 익숙하면서도 기괴한 문양이 찍힌 밀랍 인장이 매달려 있었다.
“어……? 저거, 흑장미 인장이잖아?”
레오니의 동그란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이미 지하 감옥에 수감된 벨몬트 자작이 늘 제 사기 서류에 찍어 누르던 특유의 흑장미 인장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붉은 밀랍 위로 찍힌 검은 인장 테두리가, 달빛 아래에서 기묘하게 푸르스름한 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만. 내 머릿속 가계부 데이터에 적힌 기록이 맞다면……!’
레오니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벨몬트 자작이 소유한 특유의 흑장미 인장 잉크 속에는 납 성분이 아주 미량 함유되어 있었다. 이 납 성분은 시간이 흐르고 공기 중에 노출될수록 서서히 산화되어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적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수년 전에 작성된 진짜 계약서라면 완벽하게 푸른빛으로 바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떨어진 밀랍 위의 인장은 가장자리만 겨우 푸스스하게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는 상태였다.
“아빠! 저 서류 좀 봐요! 인장 테두리가 이제 막 푸른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레오니가 조그만 손가락으로 가죽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앙칼지게 외쳤다.
“자작이 쓰던 특수 납 잉크는 공기 중에 노출된 지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만 저런 파스텔 연청색 빛을 내뿜어요! 저건 자작이 감옥에 가기 직전, 클로이 영애와 손을 잡고 급하게 날조한 가짜 밀약서예요!”
카엘렌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발밑에 짓눌린 밀사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과연…… 자작이 갇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뱉어낸 독침이었군.”
카엘렌은 가차 없이 밀사의 가슴을 짓밟아 기절시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발밑에서 시작된 쿠구구구궁― 하는 거대한 진동이 그레이시어 성의 뼈대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경고! 고대 마수 ‘켈베로스’의 폭주가 임박했습니다!]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일시적 압력 수치 상승률: 150% 돌파!] [현재 지하 냉각실의 취약한 열순환 구조로 인해 냉각석 표면에 미세한 크랙 발생!]
레오니의 시야에 붉은색 시스템 경고창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벨하르트 대공성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일시적 압력 수치 상승과 지열 냉각석 표면의 미세한 크랙 발생 정보.
예전에 장부를 읽으며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던 성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지금 터진 것이었다. 클로이 영애가 지하 영공에 주입한 비정상적인 전도성 지열이, 하필이면 이 미세한 크랙들을 자극해 열순환계를 완전히 먹통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빠, 에르 오빠! 빨리 지하로 가야 해요! 지하 난방 기구의 냉각석들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깨지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두면 성 전체가 뜨거운 증기 속으로 가라앉을 거예요!”
레오니의 다급한 외침에 카엘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양딸을 품에 꼭 안고 지하로 달리기 시작했다. 에르하르트 역시 가볍게 도약하며 그들의 뒤를 바짝 따랐다.
* * *
지하 사역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이미 지옥과도 같았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콧등을 턱턱 막히게 했고, 핑크빛으로 달아오른 뜨거운 수증기가 사방에 가득해 시야를 흐렸다.
“크어어어엉―!” “끼이이이익―!”
사방에서 쇠창살을 들이받는 거친 마수들의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그레이시어 성의 지하를 지키던 대공가의 정예 기사단이 커다란 철제 방패들을 겹쳐 들고 긴급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주하는 마수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공 전하! 접근하시면 위험합니다! 마수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며 우리를 부수고 탈출하려 합니다!”
방어선의 선두에 서 있던 기사대장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소리쳤다.
레오니는 카엘렌의 어깨 너머로 마수들의 상태를 살폈다.
맹렬하게 쇠창살을 들이받고 있는 아기 마수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하얀 털을 가진 서리 늑대새끼들과 둥글둥글한 아기 곰 마수들이 연신 제 입가를 앞발로 비벼대며 앙앙 울부짖고 있었다.
‘저건…… 화가 난 게 아니야!’
레오니는 재빨리 괴수 교감 장부를 가동했다.
파스텔 핑크빛의 홀로그램 장부가 눈앞에 떠오르며 마수들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냈다.
[마수명: 북부 서리 아기 늑대] [상태: 극심한 이앓이 (통증 지수: 95%)] [원인: 클로이 영애가 지하 영공에 주입한 전도성 지열로 인해 잇몸의 신경이 비정상적으로 자극받아 급격한 이빨 발육 성장 통증 발생.]
“아! 이빨이 아픈 거였어!”
레오니가 주먹을 꼬옥 쥐었다.
클로이가 가한 사악한 이간 공작은 마수들을 직접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열을 폭등시켜, 턱뼈와 이빨이 약한 아기 마수들에게 지독한 이앓이 통증을 유발해 강제로 폭주하게 만든 비열한 수법이었다.
아픔에 겨워 벽을 들이받고 있는 아기 마수들의 입가에선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마수들은 고통 때문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자멸할 터였다.
“토벌해야 합니다! 더 이상 방패가 버티지 못합니다!” 기사의 절박한 외침에 카엘렌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공가의 소중한 전력이자 가족이나 다름없는 마수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비극이 코앞이었다.
“안 돼요! 죽이면 안 돼요! 아파서 그러는 거란 말이에요!”
레오니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장부의 화면을 마구 넘겼다.
[보유 포인트: 4,500P] [상점 내 검색: 마수용 이앓이 완화 도구] [추천 아이템: 빙결 가시를 품은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
‘이거야!’
레오니는 지체 없이 시스템을 조율했다.
빙결 가시를 품은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의 수냉 냉각 변환 특이성 기믹의 작동 매뉴얼 정보가 머릿속에 쏙쏙 박혔다. 이 빗은 단순한 정돈 도구가 아니었다. 수냉식 냉각 마법이 깃들어 있어, 마수의 잇몸에 닿는 순간 시원한 얼음 가시가 잇몸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통증을 즉각적으로 마취하고 정화해 주는 기적의 힐링 도구였다.
[아이템 소환을 위해 3,000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경고: 대량 소환에 따른 등가교환 법칙으로 인해 일시적인 저체온증이 발생합니다!]
“으윽……!”
순식간에 레오니의 뺨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손끝부터 시작된 지독한 한기가 심장을 향해 맹렬하게 기어올랐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온몸의 뼈마디가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에 레오니의 작은 몸이 눈송이처럼 흔들렸다.
“레오니!”
옆에 서 있던 에르하르트가 깜짝 놀라며 레오니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녀석의 뜨거운 체열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오자, 심장을 옥죄던 얼음 사슬이 파스스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바, 바보 꼬맹이 너! 또 몸을 내던진 거야? 이리 와!”
에르하르트가 제 풍성하고 따뜻한 꼬리로 레오니의 허리를 꽁꽁 감싸 안으며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카엘렌 역시 커다란 손으로 레오니의 등을 감싸 안으며 제 흉부의 뜨거운 기운을 전해주었다.
두 맹수의 강력한 인간 보일러 덕분에 레오니의 체온이 36.5도로 핑그르르 돌아왔다.
“고, 고마워 오빠, 아빠……! 이제 괜찮아!”
레오니가 베시시 웃으며 품 안에서 반짝이는 민트색 빗 수십 개를 와르르 쏟아내었다. 차가운 얼음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빗들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기사님들! 에르 오빠! 이 빗들을 마수들한테 던지거나 머리랑 입가를 빗겨 줘요! 닿기만 해도 이빨 아픈 게 싹 사라질 거예요!”
기사들은 바닥에 떨어진 장난감 같은 민트색 빗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장난감 같은 것으로 폭주하는 마수를 막는단 말입니까?” “말대꾸하지 말고 당장 시키는 대로 해!”
에르하르트가 바닥에서 빗을 낚아채며 사납게 짖어댔다.
녀석은 가장 먼저 쇠창살을 부수고 튀어나오려던 거대한 서리 늑대 우두머리를 향해 날렵하게 도약했다.
“어이, 멍청이! 이거 먹고 입이나 다물어!”
에르하르트가 서리 늑대의 입가에 민트색 빗을 콱 들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빗날에 깃든 수냉 냉각 변환 특이성 기믹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빗에서 뿜어져 나온 연푸른빛의 시원한 냉기 안개가 서리 늑대의 붉게 부어오른 잇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하응?”
방금 전까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으르렁거리던 거대한 서리 늑대의 눈동자가 순간 단추구멍처럼 동그래졌다.
스르륵.
서리 늑대의 빳빳하게 서 있던 귀가 힘없이 옆으로 툭 처졌다. 녀석은 빗이 제 볼떼기에 닿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스르륵 누워 버렸다.
“끼이이이잉― (완전 시원해―)”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기사들도 침을 꿀꺽 삼키며 빗을 집어 들었다. 그들은 방패 뒤로 손을 뻗어, 쇠창살 사이로 울부짖는 아기 마수들의 턱밑과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스르릉, 스르릉.
민트색 빗이 마수들의 털을 스칠 때마다 시원한 은빛 눈가루가 파스스 날렸다.
그리고 기적 같은 풍경이 사역장 전체에 펼쳐졌다.
“갸우울……?” “꾸우우우우―!”
방금 전까지 성을 부수고 영지로 튀어나가 사람들을 물어뜯을 것 같던 무시무시한 괴수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단체로 배를 하얗게 까뒤집은 채, 바닥에 누워 발가락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빗을 입에 꼭 물고 쪽쪽이처럼 빨며 가릉가릉 콧노래를 불렀고, 어떤 아기 곰 마수는 기사의 발목에 머리를 비벼대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기사대장의 손에서 방패가 툭 떨어졌다.
토벌해야만 하는 줄 알았던 무시무시한 고대 수인 영지 마수들이, 꼬마 레오니가 보급한 장난감 빗 하나에 사로잡혀 애완 고양이처럼 가르릉대며 애교를 펼치고 있는 기이하고도 기막힌 쾌거였다.
“하하! 거 봐, 내가 뭐랬어! 우리 레오니가 최고라니까!”
에르하르트가 꼬리를 헬리콥터처럼 세차게 흔들며 으스댔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엘렌의 품에 안긴 작은 꼬마 영애에게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깊은 경외와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레오니 영애 만세……!” “영애께서 가문을 구하셨다!”
우렁찬 환호성이 지하 사역장을 가득 메웠다. 레오니는 부끄러운 듯 카엘렌의 목덜미에 얼굴을 폭 묻으며 싱긋 웃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쿠우우우웅―!
마수들의 폭주가 가라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성 지하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불길한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더 규칙적이고 위협적인 펄스음이 발밑을 타고 올라왔다.
쉬이이이이익―!
사역장 안쪽, 굳게 닫힌 철문 틈새로 핏빛처럼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기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가르며 피어오르는 싯붉은 열기는, 조금 전의 열기와는 차원이 다른 마력의 폭주를 예고하고 있었다.
[경고! 지하 보조 제어 장치실의 압축 밸브가 완벽하게 폐쇄되었습니다!] [지열 핵의 폭발까지 남은 시간: 02분 10초!]
레오니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 품 안쪽 주머니를 꼭 쥐었다. 그곳에는 얼마 전 수석 보좌관 르네가 아무도 모르게 쥐여주었던 차갑고 단단한 열쇠가 들어 있었다.
‘르네가 준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 도면과 보조 비상 키……!’
붉은 증기가 성벽의 틈새를 타고 뱀처럼 기어오르며, 마침내 보조 제어 장치실의 거대 문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