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몸이 왜 이 모양이지?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버린 카엘렌의 붉은 안광이 무섭게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적들의 목을 벨 것처럼 서슬 퍼렇던 전쟁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거대한 손끝이 부서지기 쉬운 유리 인형을 다루듯 안절부절못하며 바르르 떨렸다.

품에 안긴 작은 아이의 몸은 그저 차가운 수준이 아니었다. 살얼음이 낀 겨울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처럼, 지독한 빙결의 한기가 레오니의 얇은 셔츠를 뚫고 대공의 가슴팍으로 사정없이 스며들었다.

‘으으, 추워 죽을 것 같아……!’

레오니는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카엘렌의 단단한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알림! 플레이어의 체온이 위험 수준(영하 2도)까지 급하강합니다!] [경고! 지속적인 온기 충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영구적인 빙결 상태에 빠집니다!]

눈앞에 번쩍이는 붉은 장부의 경고창이 시야를 가렸다. 머릿속에 경보음이 삐뽀삐뽀 요란하게 울려 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계산이고 뭐고 일단 이 거대한 인간 온풍기에게 밀착해야만 했다.

레오니는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카엘렌의 목덜미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 그리고 연한 살구빛을 띤 보드라운 뺨을 그의 거칠고 단단한 턱뼈에 부비부비 문질렀다.

“아빠아…… 빠알리, 안아 주세여…… 따뜻하게 해 줘어……”

애원하는 듯한 아기 양의 울음소리가 레오니의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카엘렌의 등 뒤에서 사납게 출렁이던 흑적색 마력이 단숨에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파스텔 핑크빛으로 변해 흩날렸다. 맹수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하고 폭주하려던 마력을 억누른 것이다. 대공은 흠칫 놀라며 레오니를 제 가슴팍 깊숙이 쓸어안았다.

쿵쾅, 쿵쾅!

카엘렌의 넓은 가슴속에서 우렁찬 심장 소리가 대포처럼 울렸다. 수인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고열의 체온이 그의 가죽 갑옷 너머로 뿜어져 나와 레오니의 얼어붙은 솜털을 따스하게 녹이기 시작했다.

[알림! 특수 개체 ‘카엘렌 벨하르트’의 열에너지가 급속 유입됩니다!] [온기 충전율: 15%…… 32%…… 50% 폭증 중!]

‘하아, 살 것 같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 잠겨 있다가 펄펄 끓는 온천수에 풍덩 빠진 기분이었다. 레오니는 노곤노곤해지는 몸을 카엘렌의 넓은 어깨에 완전히 맡겼다. 대공의 몸에서 풍기는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과 옅은 피비린내가 묘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카엘렌은 여전히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그는 제 품속의 아이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온몸의 마력을 순수한 열기로 치환해 뿜어내고 있었다.

“르네! 당장 성에서 가장 두꺼운 모피 담요를 가져와라! 뜨겁게 데운 양유와 화로도 전부 이리로 옮겨!”

“예, 예! 대공 전하!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수석 보좌관 르네마저 구두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허둥지둥 복도를 달려갔다.

카엘렌은 그것도 모자라 제 가죽 망토를 풀어 레오니의 몸을 꽁꽁 싸맸다. 번데기처럼 모피 망토에 둘러싸인 레오니의 얼굴만 쏙 빠져나왔다. 대공은 제 커다란 손바닥으로 레오니의 작은 정수리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끊임없이 열기를 불어넣었다.

“약해빠진 인간 꼬맹이가 왜 또 이 난리야!”

그때, 문가에서 씩씩대며 달려온 에르하르트가 레오니의 발치를 붙잡았다. 평소라면 새침하게 꼬리를 세우고 틱틱댔을 녀석이, 지금은 귀를 뒤로 바짝 눕힌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야! 너 죽으면 안 돼! 내, 내가 오빠니까…… 나도 안아줄 수 있단 말이야!”

에르하르트는 질투와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카엘렌의 허벅지를 밀치며 레오니의 작은 발을 제 따뜻한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었다. 소년 수인의 체온 역시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용광로 같았다.

[알림! 추가 개체 ‘에르하르트 벨하르트’의 온기가 감지되었습니다!] [온기 충전 속도가 2배로 증가합니다!] [온기 충전율: 85%…… 99%…… 100% 완료!] [체온 정상 회복! 저체온증 버프가 일시적으로 해제됩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따스한 온기가 전신을 감돌자, 레오니는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반짝였다. 뺨에 가득 차오른 핑크빛 생기가 대공가의 맹수들을 안도시켰다.

살육자로 대륙을 벌벌 떨게 만들던 제국 최강의 거수 대공 가문 3인방이, 단 한 명의 자그마한 꼬마 양녀를 품에 안고 뭉개질까 봐 쩔쩔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레오니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라면 벨몬트 자작의 위조문서 공격도 완벽하게 받아칠 수 있겠어.’

정신을 차린 레오니는 카엘렌의 품에 안긴 채, 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벨몬트 자작을 내려다보았다. 자작은 대공의 서슬 퍼런 살기에 짓눌려 안면수심의 가스라이팅을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 대공 전하…… 오해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 양딸인 레오니를 합법적으로 데려가려 했을 뿐…… 여기 5년 전에 작성된 양육 합의서 원본이 있습니다!”

자작은 품속에서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종이 끝에는 벨몬트 가문을 상징하는 흑장미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레오니는 카엘렌의 망토 틈새로 고개를 쏙 내밀며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서류, 진짜가 아니에요.”

“뭐, 뭐라고? 네 이년! 감히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고아년이 어디서 목소리를 높이느냐!”

자작이 악을 쓰며 레오니를 노려보았지만, 카엘렌이 그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는 순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레오니는 르네가 가져온 돋보기를 가리키며 조목조목 반박하기 시작했다.

“벨몬트 자작가의 가문 인장용 잉크는 제국 서부의 특산품인 ‘흑철석’ 가루를 섞어 만들지요. 그 잉크에는 납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서, 종이에 찍힌 지 3년이 지나면 공기 중의 마력과 반응해 서서히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 방지 특성이 있습니다.”

레오니의 맑은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 또박또박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자작님이 가져오신 합의서의 흑장미 인장을 보세요. 푸른 은광은커녕, 방금 인장 도장을 찍어서 말린 것처럼 검은빛이 아주 선명하고 깨끗하네요. 5년 전 원본이라면서요?”

“……!”

벨몬트 자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르네가 돋보기를 들고 자작의 서류를 넘겨받아 꼼꼼히 살폈다. 르네의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아가씨의 말씀이 정확합니다. 이 인장은 찍힌 지 사흘도 채 되지 않은 인조 잉크입니다. 벨몬트 자작, 대공가를 상대로 감히 문서 위조 및 사기 공작을 펼치다니. 이는 제국법에 의거해 즉각 영지 지하 감옥에 투옥될 중죄입니다.”

“이, 이럴 수가……! 그깟 잉크 성분을 꼬맹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자작은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레오니를 가스라이팅해 대공가를 뜯어먹으려던 비열한 침입자의 최후는 그야말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카엘렌은 만족스러운 듯 콧김을 뿜으며 레오니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영리하군. 내 딸답다.”

“웅, 아빠가 지켜 주셔서 그런 거예요.”

레오니가 배시시 웃으며 카엘렌의 볼에 뽀뽀를 쪽 남기자, 대공의 귀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에르하르트는 질투심에 휩싸여 제 꼬리를 바짝 세우고 레오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 나도 도왔거든! 내가 발 잡아줘서 따뜻해진 거잖아!”

“응! 에르 오빠도 고마워요. 오빠 짱!”

레오니가 에르하르트의 손을 꼭 쥐어 주자, 녀석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고개를 휙 돌렸다. 맹수 수인들의 단순하고 귀여운 반응에 레오니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날 밤, 대공성 집무실의 금빛 촛불 아래에서 카엘렌은 직접 깃펜을 들었다.

스르릉, 사락사락.

묵직한 양피지 위에 제국의 전쟁신이 직접 글을 써 내려갔다. 벨하르트 대공가의 가풍을 상징하는 황금빛 사자 인장이 쾅 하고 찍히는 소리가 성스럽게 울렸다.

“이것으로 네 신분은 완벽해졌다.”

카엘렌이 완성된 문서를 레오니 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레오니를 벨하르트 가문의 정식이자 유일무이한 대공녀로 제국 사교계와 황실에 선포하는 공식 입양 선언서였다. 이제 그 누구도 레오니를 ‘굴러들어온 고아 양녀’라 부르며 무시할 수 없으리라.

[알림! 메인 퀘스트 ‘가문의 안주인 및 정식 영애 지위 확보’를 완료했습니다!] [보상: 가문원들의 호감도 대폭 상승, 정식 후계 연회 개최 권한 획득!]

레오니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이전 생에서 겪었던 학대와 추위,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 따뜻한 대공가의 품 안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르네가 어두운 낯빛으로 카엘렌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보고를 올렸다.

“대공 전하, 한 가지 긴급히 처리해야 할 내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말해라.”

“최근 성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일시적 압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열 냉각석 표면에서 미세한 크랙이 여러 개 발견되었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성 전체의 열순환 구조에 심각한 과부하가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르네의 보고에 레오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열 냉각석의 크랙……?’

그것은 레오니가 이전에 장부를 통해 확인했던 불길한 정보 중 하나였다. 대공성의 지하 지열선은 고대 마력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어, 아주 작은 균열로도 성 전체가 폭발하거나 지옥 같은 고온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게다가 르네가 몰래 쥐여주었던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 도면’과 보조 비상 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위기는 단순한 기계 결함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같은 시각, 그레이시어 성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질러 사악하게 길들여진 전령 독수리 한 마리가 소리 없이 하강하고 있었다.

독수리의 발목에는 붉은 실로 묶인 은밀한 밀서가 매달려 있었다. 대공가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레오니를 축출하기 위해, 음험한 클로이 영애가 대공성 지하 지열 마수 사역장에 가하는 사악한 이간 공작 음모의 서막이었다.

그늘진 창가 너머, 보랏빛 밤하늘을 가로지른 독수리가 성벽의 가장 어두운 총안구 사이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새의 발목에 묶인 가죽 통에는 벨몬트 자작의 몰락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은 클로이 영애의 다급하고도 악독한 지령이 들어 있었다. 대공가 내부를 마수 폭동으로 마비시켜 레오니의 입양 선포를 무산시키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어라……?’

카엘렌의 품에 안겨 뺨을 부비던 레오니는 발바닥 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둥, 두두둥.

아주 미약하지만 일정한 주기로 성의 바닥이 고동치고 있었다. 이내 레오니의 맑은 눈동자 앞으로 하늘색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경고음과 함께 떠올랐다.

[위험! 그레이시어 성 지하 3층, 지열 제어 장치의 밸브가 강제 폐쇄 경로로 진입 중입니다!] [경고! 누적 압력 수치: 115% 초과!] [지하 심층에 잠들어 있던 고대 마수 ‘켈베로스’의 정서 자극 수치가 폭등합니다. 각성 확률: 92%!]

‘지열 제어 장치 밸브가 닫히고 있다고? 5분 내로 우회 관로를 열지 않으면 성 전체가 폭발할지도 몰라!’

레오니의 둥근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송골송골 맺혔다.

클로이 영애가 보낸 밀사가 기어코 지하 마수 사역장까지 침투해 깽판을 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대공가의 안주인 자리를 노리는 사교계의 독사답게,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벨하르트의 요새를 통째로 무너뜨리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아빠, 르네 아저씨.”

레오니는 카엘렌의 옷자락을 꼭 쥐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레몬빛 촛불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아기답지 않은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지하 세탁실 옆에 있는 지열 우회 관로를 열어야 해요. 지금 누군가 고의로 메인 밸브를 잠그고 있어요!”

“……!”

카엘렌의 붉은 안광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무자비한 포식자의 살기가 그의 단단한 어깨 위로 검붉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르네, 아가씨의 말씀이 사실인지 확인해라.”

“전하! 벌써 지하 1층의 마수 사육장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사역마들이 과열로 인해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르네의 품 안에서 통신기 마석이 붉은빛을 뿜으며 요란하게 울려 댔다.

성하(城下)에서 흘러나오는 열기가 순식간에 집무실 바닥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창밖의 에메랄드빛 만년설이 무색할 정도로 성 내부의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가겠다. 감히 내 성에서 쥐새끼가 날뛰는군.”

카엘렌이 레오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레오니는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대공의 무력은 세계 최강이지만, 마력 폭주와 지열 제어는 칼로 베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지하에는 이빨이 자라나 극도로 예민해진 고대 마수들이 열기 때문에 미쳐 날뛰고 있을 터였다.

‘내게는 르네 아저씨가 준 우회 관로 도면과 보조 비상 키가 있어. 그리고…….’

레오니는 제 품속의 주머니를 슬쩍 만졌다. 아까 소환해 두었던, 은빛 냉기를 내뿜는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의 서늘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이 빗의 수냉 냉각 변환 기믹을 작동시키면 폭주하는 마수들의 잇몸 열기를 식혀 단숨에 잠재울 수 있었다.

“아빠, 저도 같이 가요! 제가 우회 밸브를 열 수 있는 비밀 도면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마수들을 진정시킬 방법도요!”

“안 된다. 지하에는 미쳐버린 고대 마수들이 날뛰고 있어. 꼬맹이 너는 손가락 하나만 스쳐도 부서진다!”

에르하르트가 앞장서서 레오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녀석의 꼬리가 빳빳하게 서서 좌우로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맹수의 으르렁거림이었다.

“에르 오빠, 날 믿어 줘. 나 벨하르트의 정식 막내 영애잖아. 가문을 지키는 일에 나만 쏙 빠질 순 없어!”

레오니가 당차게 외치며 카엘렌을 올려다보았다.

카엘렌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제 수양딸의 단단하고 영리한 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가냘픈 아이는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벨하르트의 재정을 구하고, 가문의 후계자인 에르하르트의 폭주까지 막아낸 영웅이었다.

“……가자.”

카엘렌이 마침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레오니를 다시 한번 제 넓은 품에 단단히 안아 올렸다.

“내 품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라.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치면, 이 성을 통째로 불태워 버릴 테니.”

“웅! 아빠 뒤에 꼭 붙어 있을게요.”

레오니는 카엘렌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서둘러 집무실을 나서 지하 계단으로 향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궁―!

방금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대지진이 그레이시어 성 전체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벽에 걸려 있던 화려한 초상화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천장의 샹들리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동시에 성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오오오오오―!

그것은 단순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대지를 파괴하고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갈 만한 고대 거수의 분노였다.

레오니의 눈앞에 붉은색 경고 박스가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고대 마수 ‘켈베로스’가 완벽하게 각성했습니다!] [지열 핵의 과부하율이 140%를 돌파합니다. 대공성 붕괴까지 남은 시간: 03분 50초!] [반전 발생! 클로이 영애의 밀사가 지열 우회 관로의 비상 열쇠 구멍에 강력한 마력 폭탄을 설치했습니다!]

‘뭐라고……? 우회 관로마저 폭파하겠다고?!’

레오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는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동쪽 탑 복도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 내렸다. 사나운 폭풍과 함께 검은 망토를 쓴 괴한이 단검을 꼬나쥔 채 그들의 머리 위로 바람처럼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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