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죽어라, 이 배은망덕한 년!”

귓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시퍼런 쇠붙이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있던 벨몬트 자작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의 소매 끝에서 뱀처럼 미끄러져 나온 것은 맹수 퇴치용 은장 단검이었다. 날 선 칼끝이 레오니의 하얗고 가냘픈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짓쳐들었다.

“레오니!”

에르하르트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그의 손끝은 찰나의 차이로 허공을 갈랐다. 르네 역시 검자루를 쥐었지만 간발의 차로 늦은 순간이었다.

공포로 인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절체절명의 찰나. 하지만 레오니의 머릿속 계산기는 그 순간에도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장부, 방어막 기능 활성화!’

[경고! 현재 빙결 포인트 부족! 임시 마력 마스크 방어막을 전개합니다. 대가로 극심한 빙결 통증이 동반됩니다!]

레오니의 눈앞에 연한 민트빛 파스텔톤의 반투명한 장막이 아주 얇게 펼쳐졌다. 동시에 뼈를 깎는 듯한 시린 한기가 손가락 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서슬 퍼런 칼날이 레오니의 목전에 닿기 직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성문 밖의 대지가 시커먼 폭풍을 일으키며 단숨에 주저앉았다. 지독한 폭음과 함께 성벽의 돌가루가 파스텔 핑크빛 노을 속으로 뿌옇게 흩날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거대한 메테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장을 지배하는 피에 굶주린 신, 카엘렌 벨하르트 대공이었다.

투두둑!

대공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마력의 폭풍이 광장을 휩쓸었다. 그 무지막지한 압력에 벨몬트 자작의 몸이 낙엽처럼 뒹굴었다.

“크, 윽……!”

자작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기도 전에, 칠흑 같은 가죽 장갑을 낀 거대한 손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오도독-!

귀를 자극하는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악! 내 손! 내 손목이-!”

벨몬트 자작이 단검을 떨어뜨리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의 손목은 이미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카엘렌 대공은 부러진 자작의 손목을 쓰레기처럼 내던지며 그 앞을 가로막아 섰다. 대공의 전신은 전장에서 채 마르지 않은 마수의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그의 모습은 지옥에서 걸어 나온 마수 그 자체였다.

“감히.”

그의 입술 사이로 낮게 울리는 으르렁거림이 지면을 흔들었다.

“감히 내 성에서, 내 딸의 목을 겨누어?”

카엘렌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늑대의 환영이 일렁였다. 살기 어린 마력이 파도처럼 요동치며 자작이 데려온 용병들과 무법 군대를 짓눌렀다.

쿵! 쿵! 쿵!

대공의 사자후 한 번에 무기를 들고 서 있던 자작의 사병들이 차례대로 무릎을 꿇었다. 질겁한 그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대, 대공 전하! 오해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 양녀를……!”

벨몬트 자작이 부러진 손목을 움켜쥐고 꼴사납게 기어 다니며 변명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카엘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군화 발로 자작의 가슴팍을 짓밟았을 뿐이다.

콰직!

“억……!”

자작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자작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제국 최대의 무력을 지닌 전신의 분노 앞에서는 그 어떤 감언이설도 무용지물이었다.

“르네.”

카엘렌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쓰레기들을 당장 지하 감옥으로 처넣어라. 단, 살려만 둬라. 내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일 테니.”

“명령 받들겠습니다, 전하.”

르네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벨하르트의 기사들이 들이닥쳐 뼈가 부러진 자작과 사병들을 개처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자작은 악에 바쳐 소리쳤다.

“이건 불법이다! 내게는 저 아이를 데려갈 권리서가 있다! 대공가의 법이 제국의 법 위에 서겠다는 것이냐! 내 흑장미 인장이 찍힌 진짜 양육 계약서란 말이다!”

그 비열한 외침에 광장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국의 법이라는 단어가 기사들의 발을 잠시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은 조그마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자작님.”

레오니가 에르하르트의 품에서 꼬물거리며 내려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살구색 뺨은 한기로 인해 조금 창백해져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사파이어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조 서류가 진짜라고 끝까지 우기실 생각인가요?”

“뭐, 뭐라고? 위조라니! 엄연히 5년 전에 작성된 진짜 계약서다!”

레오니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르네가 들고 있던 자작의 서류를 가리키며 조목조목 읊조렸다.

“자작님이 가문의 중요한 문서에만 사용하시는 특유의 흑장미 인장 잉크. 참 독특하고 아름답죠. 하지만 그 잉크에는 치명적인 비밀이 있어요. 바로 납 성분이 아주 많이 들어있다는 점이에요.”

레오니의 머릿속 '괴수 교감 장부'의 데이터 분석창이 반짝였다.

[벨몬트 가문 특제 흑장미 인장 잉크: 시간이 흐를수록 납 성분이 산화되어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 방지적 성질을 지님.]

“그 납 성분은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성질이 있답니다. 진짜 5년 전에 작성된 서류라면, 인장의 테두리가 푸른 은빛으로 바래 있어야 정상이에요. 르네 씨, 제 말이 틀린가요?”

르네가 서둘러 마법 돋보기를 꺼내 서류의 인장을 비추었다.

“……오, 과연.”

르네의 입가에 짙은 감탄이 서렸다.

“인장의 테두리가 완벽하게 보라색 그대로군요. 부식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즉, 이 서류는 5년 전이 아니라…… 고작 며칠 전에 날조된 위조품이라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입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다!”

자작의 얼굴이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갔다. 자신의 완벽한 위조 기술이 고작 잉크의 부식 성질 때문에 파헤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레오니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작을 내려다보았다.

“저를 학대하며 가두었던 감옥의 철창 열쇠와, 자작님이 사적으로 유용한 가문의 비밀 장부 대조본도 이미 제 장부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제국의 법정에 제출할 준비는 끝났어요.”

완벽한 역심문이었다. 자작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덜덜 떨며 뒤로 자빠졌다. 영민하게 수집한 가계부 데이터와 심리적 침묵 심문으로 적의 가스라이팅을 완전히 박살 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바로 그때, 대공성의 지면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요동쳤다. 광장 중앙의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스팀이 더욱 짙어졌다.

[경고!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일시적 압력 수치 폭등!] [지열 냉각석 표면의 미세 크랙이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3분 뒤 대폭발 발생!]

“크아아아아아아-!”

지하 깊은 곳에서 고대 마수 켈베로스의 포효가 성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기사들이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사이, 레오니는 신속하게 머리를 굴렸다.

‘지열 냉각석의 표면 크랙……! 르네가 저번에 준 성의 도면과 우회 관로가 정답이야!’

“르네 씨!”

레오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하 세탁실 뒤편의 3번 보조 밸브를 열어야 해요! 냉각석의 크랙으로 지열이 막혀서 압력이 치솟는 거예요! 우회 관로를 열면 열기가 밖으로 분산되어 압력을 낮출 수 있어요!”

르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아가씨의 지시대로 3번 보조 밸브를 열어라! 어서!”

기사들이 썰물처럼 지하로 달려갔다. 몇 초 뒤, 슈우우우우욱- 하는 굉음과 함께 광장의 틈새로 뿜어져 나오던 시커먼 스팀이 하늘 위 우회 배출구로 시원하게 뿜어져 나갔다.

지면의 진동이 서서히 가라앉고, 지하에서 들려오던 켈베로스의 포효도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성 전체를 날려버릴 뻔한 초대형 위기를 꼬마 여주인공의 혜안으로 단숨에 해결한 것이다. 주변에 있던 벨하르트의 기사들과 하인들이 레오니를 경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소동이 가라앉은 광장.

전쟁터에서 귀환한 피투성이의 거구, 카엘렌 대공이 천천히 레오니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굳건한 발걸음마다 마수의 핏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기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대공 가문의 아이라 할지라도, 저토록 흉포한 기세를 풍기는 대공을 마주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레오니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름: 카엘렌 벨하르트] [호감도: 99% (측정 불가 수준으로 상승 중)] [감정 상태: 극도의 뚝딱임 / 내적 안절부절못함] [수양딸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걱정 지수: 120%] [특이사항: 내 딸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인데 피 묻은 모습 때문에 날 싫어하면 어쩌지? 무서워하면 어쩌지? 꼬리 숨기는 법이 뭐였더라?]

레오니는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겨우 참았다.

겉보기에는 제국을 멸망시킬 것 같은 서슬 퍼런 전쟁신인데, 속마음은 딸내미가 자기를 무서워할까 봐 꼬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뚝딱이 아빠라니.

심지어 그의 스트레스 지수는 딸을 보지 못한 불안감 때문에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동시에 레오니의 몸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조금 전 임시 방어막을 전개하고, 장부를 무리하게 조율한 대가가 치명적인 저체온증으로 밀려온 것이다.

‘앗, 추워……!’

손끝이 하얗게 변하며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눈앞의 고열 맹수에게 매달려야 했다.

레오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카엘렌을 향해 꼬물꼬물 달려갔다.

“어……? 아가씨, 위험합……!”

르네가 만류하려던 찰나, 레오니는 피비린내를 풍기는 카엘렌의 단단한 허벅지를 두 팔로 꼬옥 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살구색 볼을 그의 가죽 갑옷에 비벼대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빠……! 보고 싶었어요.”

“……!”

그 순간, 카엘렌 벨하르트의 거대한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대공의 등 뒤에서 흉포하게 춤추던 흑적색 마력의 환영이 단숨에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파스텔 핑크빛 기류로 화했다. 그의 꼬리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알림! 상대방의 체열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저체온증 수치 완화 중……!]

용광로처럼 뜨거운 카엘렌의 체열이 전해지자 얼어붙던 레오니의 몸에 서서히 온기가 돌았다. 레오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대공은 최고의 인간 보일러였다.

그때, 대공이 조심스럽게 큰 손을 뻗어 레오니의 작은 등덜미를 받쳐 들었다.

딸이 부서질까 봐 손가락 끝을 바르르 떨던 카엘렌이 마침내 레오니를 품에 안아 올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엘렌의 안광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두 팔에 안긴 아이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운 것은 둘째치고,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한기가 아니라, 생명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죽음의 빙결이었다.

“……너.”

카엘렌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몸이 왜 이 모양이지?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대공의 붉은 안광이 경악과 충격으로 무섭게 타올랐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레오니를 더욱 세차게 품에 끌어안았다. 수양딸의 몸이 사경을 헤매듯 얼어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쟁신의 눈에 전례 없는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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