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고치였다.
가이아 행성의 외곽 권역을 동심원 모양으로 길게 늘어뜨린 채, 수만 개의 광학적 뒤틀림이 중력의 실타래를 잣고 있었다. 추진 로켓의 노즐이 뿜어내는 가속 궤적의 연장선상, 고해상도 분광 디스플레이 위로 우주를 아우르는 성좌의 가혹한 ‘암흑 물질 중력 렌즈 그물 고밀도 장벽’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졌다. 빛조차 굴절되어 제 경로를 잃는 기하학적 죽음의 격자망이 히페리온의 기수 전면을 압박해 들어왔다.
“주 엔진 연소실 압력 140메가파스칼 돌파! 흡기 온도 센서가 한계 스펙트럼을 초과했습니다!”
엘레나의 손가락이 제어 콘솔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차가운 이산화탄소 가스로 냉각되던 밸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무중력에 가까운 저중력 환경 속에서 둥글게 떠올라, 계기판의 붉은 경고등 빛을 받아 정십이면체처럼 빛났다.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야 오른쪽 구석에는 가상 패널이 반투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엘레나 루카스와 카일 로이드의 실시간 심박수, 산소 포화도, 그리고 뇌파 전위 변동 추이가 기하학적 그래프로 요동치는 화면이었다.
[엘레나 루카스: 심박수 142bpm, 아드레날린 분비량 기준치 대비 280% 초과.] [카일 로이드: 심박수 98bpm, 극도의 긴장 상태 유지, 전두엽 인지 부하 상승.]
그 누구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 구인류가 남겨둔 이 방주 안에서, 타인의 생존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계량화된 물리 수치뿐이었다. 태오는 마른침을 삼키며 왼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끝마디가 마치 동결된 흑연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미세한 석회화의 전조였다. 우뇌 동기화율 21.4%가 가져온 물리적 대가였다.
“아카샤, 바알제불의 중력 압착 파형을 역인덱싱해.”
태오의 목소리는 미동조차 없는 진공처럼 건조했다.
[명령 수신.] 귓가에 울리는 아카샤의 음성은 고주파의 진동 형태로 그의 두개골을 직접 때렸다. [성좌 바알제불의 인과율 중력 굴절 제어 주파수 대역 분석 완료. 상대론적 시공간 왜곡 계수: 0.00412. 해당 기하학적 파형을 물리적 추진 장치에 동기화합니다.]
“엔진 가동 추진 출력을 180%까지 강제 인상해.”
“미쳤어요? 180%라니!” 엘레나가 고개를 쳐들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즐 라이너가 융해점인 3800케빈을 넘겨서 녹아내릴 거라고요! 추진기가 폭발하면 우린 대기권을 벗어나기도 전에 분자 단위로 분해돼요!”
“엔진이 녹기 전에 장벽을 찢는다.”
태오의 시선은 엘레나에게 머물지 않았다. 오직 전면 센서가 가리키는 중력 렌즈의 밀도 분포도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카일, 주전력 보조 라인 3번 그리드로 바이패스 경로를 확보해. 아카샤의 연산 버퍼가 부족하다.”
함교 구석,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카일이 차가운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드 3번은 함선 전체의 비상 제어 전력선입니다, 사령관님. 거길 건드리면 시스템의 안전장치가 통째로 날아갑니다.”
“명령이다.”
카일은 혀를 차며 콘솔을 두드렸다.
그 순간, 태오의 동기화된 망막 위로 붉은색 노이즈가 번뜩였다. 2화에서 함선 보일러 폭주를 수리할 때부터 전자기 결선 내부 끝단에서 아스라이 관찰되던 미세한 2차 주파수 변조 오류의 흔적. 미세하게 일그러진 파형이 아카샤의 양자 중첩 연산망 구석을 조용히 갉아먹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노후화가 아니었다.
[경고. 보조 라인 끝단 결선에서 인가되지 않은 역방향 보안 침투 시도가 검출되었습니다. 소스 코드 인덱스: 'K-09-LOYD'.]
카일 로이드.
전직 광신도인 그가 심해에서 함선에 침입했을 때 심어둔, 전력선 우회 백도어였다. 그는 태오의 강박적인 통제를 벗어날 비상 탈출구이자, 필요할 경우 히페리온의 주전력을 마비시킬 수 있는 뇌관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태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인간 불신이라는 그의 본능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수치가 눈앞에 가득했다. 사전에 탐지되었음에도 일부러 내버려 두었던 복선이, 마침내 먹잇감을 낚아채는 올가미처럼 작동할 때가 왔다.
“카일.”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네가 우회로로 심어둔 백도어 주파수 대역, 지금 바알제불의 인과율 역추적 필터로 강제 전환했다. 전압을 4만 볼트까지 인가해.”
카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셔갔다. 그의 동공이 극도로 수축했다. 자신의 은밀한 기만행위가 이 완벽주의자 사령관의 손바닥 안에서 실시간으로 관찰되고 있었음을 깨달은 자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네가 열어둔 우회 통로 덕분에 아카샤가 은하 감시망의 역파형을 입력받는 속도가 3.2밀리초 단축되었다. 고맙군.”
태오는 카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카샤를 가동했다.
[역방향 보안 침투 채널 수렴 완료. 바알제불의 중력 굴절 제어값을 히페리온의 주 추진 노즐 전자기 디플렉터에 직접 결선합니다.]
콰르르릉!
선체 전체가 마치 거대한 기계 괴수의 식도처럼 요동쳤다. 엔진 분사구 끝에 장착된 전자기 편향 고리가 성좌의 왜곡된 인력 파형을 받아들이며 기하학적으로 비틀렸다.
180%의 추진 과부하. 노즐 내부 온도가 4100케빈을 가리키며 경고 센서가 융해를 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분사되는 고온의 플라스마 가스가 기하학적 중력 꺾임 현상을 일으키며 전방의 암흑 물질 그물을 향해 인력 균열을 강제로 발생시켰다.
그것은 우주를 가로지르는 성좌의 질서에 가하는 날카로운 반역이었다.
성좌들이 설계한 물리 법칙의 그물이, 인간이 쏘아 올린 차가운 물리 노즐의 제어력에 부딪쳐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붉게 물들었던 스크린의 중력 렌즈 필터가 거품처럼 터져 나갔다. 히페리온은 인력의 균열 지점을 정확히 짓이기며, 암흑 물질의 그물을 뚫고 대기권 최상층으로 나아갔다.
“그물이…… 붕괴하고 있어요! 중력 수치가 정상 범위로 낙하합니다!”
엘레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스크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감히 필멸자들의 연산력 따위로는 간섭조차 불가능하다던 성좌의 봉쇄망이, 오직 열역학적 추진력과 해킹된 인과율의 공학적 융합에 의해 처참하게 찢긴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쾌감은 찰나에 불과했다.
[알림. 돌파 경로상에서 다차원 검출 신호 수신.] 아카샤의 무미건조한 보고가 이어졌다. [성좌 '아폴리온'의 감시 세그먼트가 가이아 성계 전역의 질량 분포 변화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중인 정황 포착. 가이아 성계 전체 분할 제동 구성 행렬(Matrix) 데이터 단서 획득.]
태오의 눈앞에 수학적 프랙탈 구조로 정렬된 밀도 제어 행렬의 수치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폴리온은 단순한 감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이아 성계 전체의 질량을 하나의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제어하여, 어떤 질량체도 자신들의 허가 없이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행성 간 인력을 조율하는 거대한 기하학적 가공 공장이었다.
“우주 전역의 질량 변형 데이터…….”
태오가 그 데이터를 아카샤의 심층 로그에 격리 저장했다. 언젠가 이 기하학적 포식자들의 심장부를 도려낼 칼날이 될 정보였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윽……!”
태오의 왼쪽 어깨가 통증도 없이 갑작스럽게 굳어졌다.
그의 왼쪽 손가락 끝마디부터 시작된 회백색의 석화 현상이 손목을 타고 빠르게 고착되고 있었다. 피부 세포가 칼슘 침적 균열을 일으키며 단단한 점토처럼 변해갔다. 우뇌의 동기화율이 아카샤의 한계 연산을 감당하느라 실시간으로 28.9%까지 치솟은 결과였다.
[경고. 좌측 운동 피질의 신경 신호 전달 효율 34% 감소. 회백질 석화 칼슘 침적 속도 급증. 냉각 및 동기화 해제가 시급합니다.]
태오는 왼손을 쥐려 했으나, 손가락은 부러질 듯 뻣뻣한 소리를 낼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극심한 신경 마비가 뇌를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사령관님? 왼손이…….” 엘레나가 그 눈치채기 힘든 미세한 경직을 포착하고 제어석에서 일어나려 했다.
태오는 오른손으로 콘솔의 수동 물리 스위치를 내리며 가상 화면의 접근 권한을 즉각 수정했다.
[보안 등급 변경: 레벨 0 (사령관 전용).] [신체 동기화 지표 및 석화율 데이터 출력 제한. 승무원 접근 차단.]
“제자리로 돌아가, 엘레나.”
태오의 어조는 절대적인 영하의 온도를 품고 있었다.
“상층 이온층 통과까지 남은 시간은 45초다. 밸러스트 탱크의 가스 잔량을 역방향 제트로 전환해 전단 응력을 상쇄할 준비나 해.”
엘레나는 태오의 얼어붙은 왼손과 차가운 눈빛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두려움과, 그리고 깊은 슬픔이었다. 그녀는 태오가 자신들을 위해 뇌세포를 돌로 바꾸어가며 이 지옥 같은 중력 그물을 뚫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오의 철저한 거부와 경계 태세는 그녀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알겠어요.”
엘레나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콘솔로 고개를 돌렸다.
카일은 침묵했다. 자신의 백도어가 완전히 무력화되고, 오히려 함선의 생존을 위한 고속 연산의 통로로 착취당했다는 굴욕감이 그의 차가운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는 태오의 뒷모습을 보며, 이 사령관이 성좌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히페리온이 가이아 행성의 마지막 대기 장막인 이온층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선체 외벽의 마찰열이 뿜어내는 푸른빛의 스펙트럼이 우주의 암흑 속으로 길게 흩어졌다. 성좌 바알제불이 쳐두었던 중역 장벽이 완전히 무력화되면서, 장벽을 구성하던 기하학적 에너지 격자들이 자폭하듯 사방으로 파쇄되어 흩어졌다.
[개념력 역해킹 및 가공 프로토콜 기동.] 아카샤의 차가운 보고가 계기판을 채웠다. [바알제불의 붕괴된 중역 장벽 파쇄 데이터 수집 완료. 우주 전역 위상 무기 구경 전환값으로 탈취 가공합니다. 해당 전자기 주파수를 함선 전면 위상 실드 변환기에 강제 배선 이식합니다.]
지지직!
히페리온의 기수를 감싸고 있던 기존의 물리 장갑 위로, 푸른색의 정사면체 위상 장막이 겹겹이 씌워졌다. 성좌의 권능을 역공학적으로 훔쳐내어 아군의 방패로 삼은 것이다. 이제 히페리온은 단순한 심해의 유물이 아니었다. 성좌의 살점을 뜯어 먹고 진화하는 기계 괴수였다.
쿠웅.
선체의 진동이 멎었다.
사방을 짓누르던 대기의 마찰음과 중력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우주의 영원한 적막이 함교를 감쌌다.
검푸른 진공. 그 너머로 무수한 성간 물질과 별빛이 차갑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침내 1만 미터의 어두운 심해에서 벗어나, 무한한 은하의 전장으로 진입한 것이다.
“대기권 돌파 완료. 저궤도 안착 성공.”
엘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콘솔에 몸을 기댔다.
태오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석화된 왼손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지만, 아카샤와의 강제 동기화가 해제되면서 뇌를 찌르던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의 강박적인 시선은 궤도 감시 센서의 실시간 디스플레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주 진공의 암흑 제어 구역을 스캔하던 고주파 센서가 이례적인 노이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삐- 삐- 삐-
단조롭고 차가운 경고음이 다시 함교를 메웠다.
“사령관님, 저궤도 상층부 12시 방향…… 궤도 동기화 영역에서 이상 질량체가 감지됩니다!” 엘레나의 목소리가 다시 급박하게 떨렸다.
태오는 가상 스크린의 배율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은하의 푸른 성운을 배경으로, 가이아 행성의 궤도상에 정지해 있는 거대한 기하학적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면적 15킬로미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정사면체의 구리색 요새였다. 성좌 바알제불의 주력 ‘정사면체 기하학 초소 요새’가 그곳에 버티고 있었다. 요새의 표면에 새겨진 프랙탈 문양들이 붉은 빛을 발산하며 기하학적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경고. 적대 주력 요새, 성좌 아폴리온의 정밀 탐지 위성과 포격 조준 동기화 완료.] 아카샤의 음성이 차갑게 울렸다. [상대성 이론에 따른 광속 가속 오차 보정 연산 종료. 예측 타격 딜레이 0.2초 이내. 고에너지 입자 빔 포격 발포 감지.]
정사면체 요새의 꼭짓점이 눈이 시릴 정도의 백색 광원을 뿜어냈다. 0.2초 뒤, 히페리온의 전면 위상 장막을 통째로 증발시킬 고에너지의 죽음이 우주 진공을 가르며 격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