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적색 경보등이 주황색 비상 조명과 교차하며 격실의 기하학적 장갑 벽면을 피처럼 붉게 물들였다. 3%에 불과한 잔여 전력 탓에 냉각 팬의 회전 소리마저 멎은 기계실은 진공에 가까운 정적으로 가득했다. 사그라드는 산소 속에서 오직 콘솔의 경고음만이 고막을 찌르고 들어왔다.

[위험: 인접 구역인 3구역 미해동 격실 해치에서 비인가 생체 신호 감지.] [경고: 시스템 루트 권한에 대한 강제 복제 시도 포착. 생체 복제 시스템 오입력 탈취 경보 작동.]

엘레나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려다 희박해진 산소 농도 때문에 가늘게 기침했다.

“미해동 격실이라니? 거기엔 아직 동면 포드가…….”

“아카샤, 3구역의 환경 제어 밸브를 즉각 폐쇄해.”

태오는 엘레나의 말을 자르며 허공에 가상 패널을 띄웠다. 그의 왼팔은 아카샤와의 동기화 왜곡으로 인해 팔꿈치 아래까지 회백색의 석재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석화의 형벌 속에서도, 그의 오른손은 잔인할 만큼 정밀하게 터치스크린을 미끄러졌다.

= 예비 전자기 차단막을 기동합니다. 잔여 전력 2.9%로 하락. 차단막 유지 시간은 최대 120초입니다. =

아카샤의 음성은 고저가 없는 진공의 상태를 닮아 있었다.

태오의 눈동자가 고속으로 흐르는 무수한 전자기 로그를 훑었다. 그의 망막 위에 주전력 보조 라인의 말단 회로도가 기하학적인 선으로 투사되었다. 지난 기동 당시 복구했던 보조 라인 끝단, 그 전자기 결선 내부에서 발생했던 초당 0.003초 단위의 미세한 2차 주파수 변조 오류 흔적이 뇌리를 스쳤다.

단순한 전선 노후화나 열역학적 노이즈가 아니었다. 보안의 빈틈을 노리고 침입자가 인위적으로 심어 둔 역방향 우회 통로였다.

“외부 주파수 변조 신호의 발신원, 3-C 배관 진입벽 내부로 특정.”

태오의 목소리에는 한 줌의 온기도 없었다. 그는 배신과 침입이라는 변수를 용납하지 않는 통제광이었다. 동료들의 시체 위에서 살아남은 대가로 얻은 극심한 인간 불신이 그의 신경망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아카샤, 3-C 배관의 초저온 액체 헬륨 순환 밸브를 강제로 원격 개방해. 진입벽 내부의 온도를 절대 영도 부근까지 순간 압착시킨다.”

“잠깐만, 태오! 배관 안에 사람이 있다면 세포막이 전부 파괴될 거야!”

엘레나가 태오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태오는 그녀의 바이탈 사인을 표시하는 붉은색 그래프를 흘긋 보았을 뿐이다. 그녀의 심박수는 130을 넘어서고 있었다. 동정심이라는 비합리적인 회로가 그녀의 연산을 흐리고 있었다.

“우리의 산소는 3%의 전력과 함께 소멸하고 있다. 침입자가 루트 권한을 장악하는 순간, 우리는 이 심해의 무덤에서 질식사한다. 엘레나, 너의 감상은 우주 공간의 엔트로피보다 가치 없다.”

태오의 검지 손가락이 가상 버튼을 눌렀다.

기계실 저편에서 무거운 유압 실린더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배관 벽면을 따라 초저온의 가스가 고압으로 분사되며 하얀 이산화탄소 결정이 장갑판 표면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배관 격벽 너머에서 쇠사슬이 긁히는 듯한 거친 비명과 함께, 둔중한 타격음이 벽을 흔들었다.

비인가 생체 신호의 파형이 급격히 꺾였다. 수축하는 열역학적 팽창 속에서, 배관의 안전 해치가 강제로 개방되었다.

푸른색 동면복을 입은 형체가 성에와 얼어붙은 핏방울을 사방으로 뿌리며 강철 바닥 위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피부는 극저온 가스에 노출되어 군데군데 청자색으로 변해 있었고, 불규칙하게 호흡할 때마다 입가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침입자는 바닥을 긁으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관절이 얼어붙어 연신 미끄러졌다.

태오는 권총을 겨눈 채 그에게 다가갔다. 비상 조명의 주황색 광선이 침입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카일…… 로이드?”

엘레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침입자의 정체는 과거 가이아 행성의 궤도 방위군이자, 우주를 수호한다는 기하학적 성좌들을 광신적으로 숭배했던 참회 기사 단원, 카일 로이드였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기이한 기계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일의 척추와 경추 라인을 따라 정다면체의 금속 격자들이 피부를 뚫고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성좌 바알제불이 그의 하수인들에게 내리는 소위 ‘성흔’이자, 주술적으로 변형된 초소형 전자기 이식 단말이었다. 단말의 중심부에서는 육안으로 식별하기 힘든 미세한 보라색 가간섭성 광선이 명멸하며 히페리온의 주전력 선로를 향해 무선 코드를 송신하고 있었다.

“성좌의 개가 여기에 살아남아 있었군.”

태오의 총구가 카일의 미간을 정확히 지향했다. 그의 우뇌 접속 로그에 동기화된 아카샤의 연산 장치가 카일의 몸에서 나오는 전파 주파수를 나노초 단위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 자의 이식 단말이 히페리온의 위치 제어 시스템을 역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바알제불 감시망에 동적 궤도 좌표를 무선 전송하려는 시도입니다.”

아카샤의 차가운 보고에 태오의 눈빛이 더욱 깊은 심해의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살려…… 다오…….”

카일이 얼어붙은 혀를 굴리며 쇳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와 극심한 신경통으로 인해 초점을 잃고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척추에 박힌 기하학적 단말이 그의 신경 세포를 자극할 때마다, 그의 온몸이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들이…… 나를…… 태우고 있다…….”

카일은 자신의 목을 쥐어짜며 울부짖었다. 그의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혈관들이 푸른빛이 아닌, 성좌 특유의 차가운 자색 광린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통신 단말이 아니었어. 기만이다……. 바알제불은 우리의 뇌 뉴런을 단순한 탄소 필라멘트처럼 연소시키고 있었다……. 그 거대한 기하학적 포식자들의 궤도 계산을 위한…… 소모품 전지로 말이다!”

카일의 통곡이 적막한 기계실의 철판을 울렸다.

태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가슴 속 저편에서 과거의 잔상이 떠올랐다. 성좌들의 자비를 믿고 방어막 제어권을 넘겨주었던 옛 함대원들. 그들이 온몸의 수분이 증발하며 빛의 입자로 분해되던 순간의 열기가 피부를 스치는 듯했다. 인간은 성좌에게 있어 지성체가 아니다. 그저 물리적 연산을 수행하는 유기물 회로에 불과했다.

“구원해 달라고?”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너희 광신도들이 기하학적 포식자들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인류의 99%가 대기권 밖에서 재가 되었다. 이제 와서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건가?”

“살고 싶다……. 내 뇌가 완전히 탄화하기 전에…… 그 구속을 끊어내 줘……. 제발…….”

카일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애원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차가운 기계실 바닥에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번져 나갔다.

엘레나가 태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오, 저 단말의 주파수를 역이용할 수 없을까? 어차피 저 상태라면 금방 죽어. 하지만 카일의 신경망이 아직 성좌의 네트워크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태오는 대답 대신 허공의 홀로그램 패널을 넘겼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카샤의 양자 중첩 연산기가 이미 수만 개의 시뮬레이션을 끝마친 상태였다.

“아카샤, 역해킹 프로토콜 준비.”

= 승인합니다. 단, 침입자의 기하학적 단말을 역공학적으로 해킹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우뇌 동기화율을 85%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뇌 신경세포의 석화 속도가 가속화될 위험이 존재합니다. =

“제한 제어(Limit control)를 해제해. 뇌세포의 손실률은 0.5% 내로 억제한다. 즉각 실행해.”

태오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 끝마디가 서서히 감각을 잃으며 회백색으로 변해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신경을 타고 흐르는 극심한 가열 현상에 치아가 가볍게 맞부딪쳤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태오는 카일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다목적 공학 케이블을 꺼내 카일의 척추 단말 인터페이스에 강제로 꽂아 넣었다.

“우아악!”

카일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신앙이라는 가치 없는 가상 회로를 걷어내 주지.”

태오의 목소리와 함께, 히페리온의 메인 컴퓨터 아카샤가 카일의 신경망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역해킹 프로토콜 가동.] [대상: 성좌 바알제불의 하위 주파수 전도 단말.] [양자 중첩 연산 변조 개시: 인과율 파형 분석률 42%... 78%... 100% 완료.]

카일의 몸에 새겨진 보라색 기하학적 문양들이 아카샤의 강제 코드 주입에 따라 격렬하게 명멸했다. 성좌들이 보낸 수학적 명령어들이 인간의 가공 기술과 디지털 바이러스 수식에 의해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태오는 카일의 비명 속에서 아카샤의 연산식에 정밀한 변조 코드를 기입했다. 그것은 성좌들이 인간의 뇌를 지배할 때 사용하는 고유의 ‘개념력’ 파형을 역으로 뒤틀어 버리는 수학적 쐐기였다.

“바알제불의 통신 포트에 오버플로우(Overflow)를 유도한다. 그들이 관측하는 우리의 위상 좌표를 무한대 소수로 분열시켜라.”

= 역위상 교란 수식 주입 완료. 바알제불의 상위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히페리온의 위치 검출 로그를 영구 삭제합니다. 가이아 심해 3구역의 엔트로피 정보를 ‘완벽한 진공 무(無)’로 변환 완료. =

카일의 척추에 박혀 있던 정다면체 단말이 신경질적인 스파크를 튀기며 푸른빛을 잃고 회색의 고사한 금속 조각으로 변해갔다. 그의 동공에 서려 있던 보라색 광채가 걷히고, 평범한 인간의 검은 눈동자가 되돌아왔다.

카일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호흡은 여전히 가빴지만, 더는 성좌의 명령에 뇌가 타들어 가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해냈어…….”

엘레나가 주먹을 꽉 쥐며 나직하게 외쳤다.

“성좌의 추적망을 아예 지워버린 거야. 그들의 하드웨어를 역으로 이용해서!”

태오는 카일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고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목에 전자기 구속구를 채웠다. 구속구의 붉은 불빛이 카일의 피부 위에서 차갑게 빛났다.

“너를 살려두는 건 은혜를 베풀어서가 아니다.”

태오는 석화가 진행되어 굳어버린 오른손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너의 뉴런에 남아 있는 성좌의 잔류 주파수 데이터는 히페리온의 위상 장갑을 보강하는 훌륭한 유동 인자가 될 것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네가 가진 모든 공학적 가치를 이 함선에 지불해라. 배신의 징후가 0.1%라도 포착되는 즉시, 네 뇌의 남은 부분마저 절대 영도로 얼려버릴 테니까.”

카일은 겁에 질린 눈으로 태오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바이탈 사인은 서서히 안정 기류를 타고 있었지만, 태오의 감시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절망감이 그의 눈빛에 서려 있었다.

모든 상황이 통제 하에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히페리온의 중앙 콘솔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전자기적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상 주황색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오직 극도의 위험을 알리는 이중 적색 경보등만이 격렬하게 회전했다.

윙- 윙- 윙-

기해진 한계를 넘어서는 고주파 소음이 함내 전체를 진동시켰다.

“태오! 주파수 검출기가 미쳐가고 있어!”

엘레나가 비명을 지르며 콘솔로 달려갔다. 화면에는 기하학적인 프랙탈 문양이 무한히 증식하며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카샤, 상황 보고!”

태오가 소리쳤다. 그의 심박수 역시 처음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 경고. 가이아 심해 암흑 해구 전역에 초고밀도 중력파 포착. 수압 압착식 정밀 타격 프로토콜이 가동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아카샤의 목소리에 난생처음으로 미세한 주파수 왜곡 노이즈가 섞여 들었다.

= 성좌 바알제불 본대가 방금 전 발생한 ‘위치 로그 삭제 오류’를 감지했습니다. 그들은 오류의 원인을 찾는 대신, 해당 해구 전체를 물리적으로 짓눌러 지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극대 중력파 주파수 스캐너 발진까지 남은 시간, 180초. =

함선 외부의 심해 1만 미터 수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강철 방주 히페리온의 장갑판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미세하게 찌그러지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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