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23:45. 밤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귀에서 떨어져 나간 액정 화면 위로 ‘통화 종료’를 알리는 붉은 숫자가 명멸했다.

이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원의 벤치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바래다 못해 파르르 떨렸다. 가슴 복판을 송곳으로 꿰찌르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밀려왔다. 민건우가 뱉어낸 독설 때문이 아니었다. '의신의 안안(眼)'을 가동한 뒤 찾아오는 필연적인 대가, 심장 과부하였다.

두근, 두근두근, 콰르릉.

심장이 제 박자를 잃고 제멋대로 요동쳤다.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호흡을 가로막았다. 전형적인 3도 방실차단[1] 증상이었다. 이준은 떨리는 손으로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차도현이 건넸던 자그마한 바이알 병이었다.

명인그룹 바이알 연구소에서 극비리에 개발 중인 특수 베타블로커[2] 약물 샘플.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 않은, 오직 이준의 심장 과부하를 억제하기 위해 설계된 특허 신약이었다.

이준은 마개를 이빨로 뽑아내고 투명한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액체가 심장 주변의 과활동성 교감신경을 얼려버리는 듯했다. 요동치던 가슴팍의 폭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거친 호흡 사이로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일 오전 9시라……."

민건우는 이준을 '백강혁의 명의를 도용한 범죄자'로 낙인찍어 검찰청 보건범죄특별수사팀에 밀고하겠다고 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다른 육체에서 깨어났다는 비과학적인 사실은 법정에서 통하지 않는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한이준은 그저 타인의 면허를 도용해 칼을 잡은 사기꾼에 불과할 터였다.

하지만 이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민건우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준이 단순히 미련하게 메스를 휘두르는 재주만 가진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자신을 겨눌 칼날을 예상하고 사법적 방패를 견고하게 다듬어 둔 상태였다.

이준은 곧바로 개인 태블릿을 켜고 전산망에 접속했다. 화면 위로 푸른빛이 그의 차가운 눈동자를 비추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법무부와 법원에 신청해 두었던 '성명 개정 및 신분 정정 허가서'의 최종 승인 여부였다. 화면에는 법원의 직인이 찍힌 전자 등기 조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건번호: 202X아총XXXX 성명 개정 및 신분 동일성 확인 청구] - 주문: 신청인 '한이준'의 성명을 '백강혁'으로 개명하는 것을 허가하며, 과거 백강혁 명의의 모든 의료 행위 및 면허 이력을 합법적으로 승계·소급 적용함에 있어 행정적 결격 사유가 없음을 확인함.

이준은 전생의 육체가 사망하기 직전, 자신이 남겨두었던 합법적 대리인 지정 서류와 사후 입양 형식의 신분 합병 절차를 사법 당국을 통해 완벽하게 마무리지어 둔 상태였다. 법적으로 한이준은 단순한 도용자가 아니었다. 사법부가 공식 인정한, 백강혁의 모든 의학적 자산과 신분을 합법적으로 상속받아 개명한 유일무이한 주체였다.

"공격할 빌미를 찾았다고 좋아했겠지, 민건우 병원장."

이준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을 빠르게 두드렸다. 그가 다음으로 열어젖힌 것은 명인대 병원 본관 12수술실의 전산망 백업 폴더였다.

그곳에는 임준필이 기획조정실장 권한을 남용해 약제 보관함에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3]과 케타민[4]을 불법으로 출고하고, 이를 이준의 수술 카트에 밀어 넣으려 했던 당일의 전산 수정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정 일시: DAY 1 23:14:02] - 조작자 IP: 10.110.2.15 (기획조정실장 전용 단말기) - 조작 내용: 12수술실 향정신성의약품 보관함 임의 개방 및 수량 변경.

타임스탬프[5]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임준필이 이준에게 마약 누명을 씌우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긴급 가동시켰던 시스템 로그는 이미 이준의 손아귀에 완벽한 증거물로 보존되어 있었다. 형사소송법상 공문서 위조 및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치명적인 마스터키였다.

이준은 이 두 가지 문서를 하나의 암호화 파일로 묶었다. 그리고 수신처를 대한민국 10대 일간지 사회부 데스크와 방송사 법조팀으로 지정했다.

"전송."

손가락 끝이 화면을 가볍게 두드리는 순간, 수백 메가바이트의 법적 증거 자료가 언론사들로 일제히 송출되었다. 민건우가 내일 아침 기획 취재 형식으로 보도하려 했던 '한이준 면허 도용 의혹' 기사는, 데스크에 도달하자마자 '허위 사실 유포 및 무고죄'라는 무거운 법적 책임을 지게 될 부메랑으로 변모할 터였다.

언론사 데스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사법부의 공식 개명 등기 조서와 기조실의 마약 조작 로그가 담긴 이 파일을 보는 순간 민건우의 제보를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밖에 없다. 완벽한 정보 차단이자 대역습의 시작이었다.

***

01:30.

본관 12수술실 간이 대기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준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구두 굽 소리가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서재희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칼칼함 대신 깊은 피로와 걱정이 묻어났다. 그녀는 이준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그의 창백한 안색을 살폈다.

"병원장 쪽에서 움직였다면서. 내일 아침에 검찰 고발과 동시에 언론 플레이를 시작할 거라는 소문이 본관 기조실 대외협력팀에서 흘러나오고 있어. 당신…… 정말 괜찮은 거야?"

이준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나지막이 아밀라아제 냄새가 섞인 병원 특유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상관없습니다. 준비는 끝났으니까."

"한이준."

재희가 그의 이름을 단호하게 불렀다. 이준이 천천히 눈을 뜨자, 흔들림 없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정면으로 부딪쳐 왔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당신이 백강혁의 망령이든 아니면 신분을 세탁한 범죄자이든 나한테는 아무 의미 없어."

그녀의 손이 이준의 차가운 손등 위로 얹어졌다.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어떤 껍데기이든 내 심장에 와 닿은 건 오직 환자를 살려내던 한이준 너뿐이야. 그러니까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법적이든, 의학적이든 내가 당신 옆에 서 있을 테니까."

이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타인을 향한 불신으로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마음에 서재희라는 존재가 남긴 파문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는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 하지 않고, 그녀의 온기를 가만히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서 선생님이 위험해질 비즈니스는 아닙니다. 이건 철저히 법률과 규정의 싸움이니까요."

냉소적인 말투였지만, 재희는 그 안에 담긴 배려를 읽어냈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차가운 인간이네. 그래도 싫지 않아."

***

02:30.

같은 시각, 서초동의 한 한정식집 지하 밀실.

명인대 병원을 막후에서 지배하는 초엘리트 카르텔 '서클 9'의 비공식 긴급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는 민건우 병원장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주변에는 카르텔의 핵심 주주들과 대기업 투자사 임원들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병원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클 9의 원로이자 명인대 의대 명예교수인 김진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한이준 그 전송의 놈을 내일 아침에 완벽하게 매장하겠다고 장담하더니, 언론사 데스크에서 기사화가 전부 기각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허위 제보로 역고소당할 판이에요."

민건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녀석의 신분 도용 정황은 확실합니다. 백강혁의 필적과 수술 어시스트 기록, 그리고……."

"법원의 성명 개정 허가서가 이미 발부되었더군요!"

투자사 대표가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로 거칠게 던졌다.

"한이준은 이미 사법적으로 백강혁이라는 이름을 승계했습니다. 게다가 기조실에서 마약류 관리 대장을 임의로 수정한 로그까지 언론사에 뿌려졌어요. 민 병원장, 당신이 사적인 보복을 하겠다고 서클 9의 자금과 국비 지원 R&D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민건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철두철미하다고 자부했던 자신의 설계가, 한이준이 쳐놓은 법률적 덫에 걸려 완전히 조각나고 있었다.

"우리가 민 병원장을 지지했던 건, 병원의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미승인 임상시험을 안전하게 통과시켜 줄 방패막이 필요해서였습니다."

김진태 교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한이준 하나를 잡겠다고 병원의 신뢰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어요. 서클 9 내부에서도 민 병원장의 자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최종 이사회에서 결과가 좋지 않다면, 우리도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주들의 싸늘한 시선이 민건우의 목 피부를 조여왔다. 민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한이준……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내 목을 겨눠?'

민건우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었다. 대기업 투자 우회 주식단이 보유한 원내 최대 지분 권력이었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비서에게 비밀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오전 08:00. 흉부외과 소속 한이준 우호 성향 교수 전원에 대한 직권 면직 처분 안건을 이사회 비상 발의로 상정해라. 이사회 의결권을 강제 집행한다.]

의사 면허를 빼앗지 못한다면, 그의 수족을 모두 잘라내어 병원 고립무원의 처지로 만들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이준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린 것은 그로부터 불과 몇 분 뒤였다. 화면에는 병원 행정처로부터 송신된 '비상 이사회 긴급 소집 통지서'가 붉은 경고등처럼 빛나고 있었다.

[안건: 흉부외과 서재희 교수 외 3인의 원내 징계 및 직권 면직 처분의 건]

이준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민건우가 마침내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

[1] 방실차단(Atrioventricular Block): 심방에서 심실로 전도되는 전기 신호가 지연되거나 차단되는 부정맥 상태. [2] 베타블로커(Beta-blocker): 심장의 베타 수용체를 차단하여 심박수와 혈압을 낮추고 심장의 부하를 줄여주는 약물. [3] 펜타닐(Fentanyl):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 강력한 마취 보조제로 사용되나 오남용 시 치명적임. [4] 케타민(Ketamine): 전신마취제로 사용되는 해리성 마취제. 오남용 우려가 높은 향정신성의약품. [5] 타임스탬프(Timestamp): 특정 시점에 데이터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컴퓨터 시스템이 기록하는 시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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