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액정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백라이트가 어두운 연구실 안을 차갑게 물들였다. 한이준은 미동도 없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뜬 것은 병원 행정처로부터 송신된 '비상 이사회 긴급 소집 통지서'였다. 안건은 흉부외과 서재희 교수 외 3인의 원내 징계 및 직권 면직 처분의 건. 다급해진 민건우가 대기업 투자 우회 주식단의 권력 지분을 억지로 소집해, 다음 날 아침 흉부외과의 한이준 우호 성향 교수들 전체를 한꺼번에 직권 면직시키려는 마지막 극단적 소집 통지가 기어이 울린 것이다.

"결국 바닥을 드러내는군."

이준의 입술 틈새로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왼쪽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벼락이 치듯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윽, 하며 이준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의신의 안안(眼)'을 무리하게 가동했던 여파가 심장에 고스란히 누적되어 있었다. 방실차단[1]의 전조 증상인 불규칙한 맥박이 목덜미를 타고 쿵쾅거리며 머릿속을 흔들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흰 가운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자그마한 유리 앰플이었다. 지난번 차도현이 심장의 대가를 억제하기 위한 임상 테스트용이라며 비밀리에 독점 신약 특허 거래용으로 건넸던 특수 신약 베타블로커[2] 약물 샘플이었다. 이준은 망설임 없이 일회용 주사기를 꺼내 앰플의 주둥이를 부수고 약액을 빨아올렸다. 허벅지 근육에 바늘을 찔러 넣고 플런저를 끝까지 밀었다.

차가운 약물이 혈관을 타고 흐르자마자, 성나게 날뛰던 심장의 폭주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분당 140회를 넘나들던 심박수가 안정적인 영역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이명도 걷혔다.

"민건우, 당신이 짠 판이 얼마나 허술한지 똑똑히 보여주지."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시계 바늘은 오전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DAY 10, 오전 07시 20분. 명인대학교 병원 본관 12수술실 앞.

평소라면 고요해야 할 수술실 복도에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사법부 증거보전 명령관들과 서울중앙지검 소속 디지털 포렌식 수사관들이 이준의 뒤를 따라 도열했다. 그들의 손에는 법원이 발부한 '증거보전 결정문'과 강제집행 영장이 들려 있었다.

"한이준 선생, 정말로 이 안에 확실한 로그가 남아 있는 겁니까?"

앞장선 수사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준은 대답 대신 수술실 문을 열어젖혔다.

"12수술실은 고난도 하이브리드 수술을 위해 병원 내에서 가장 첨단 장비가 밀집된 곳입니다. 민건우 병원장과 임준필 실장은 이곳의 전산망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겠지만,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준은 수술실 중앙에 위치한 대형 하이브리드 수술 콘솔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장비 하단의 철제 패널을 가리켰다.

"이 장비의 통합 포트 백업 폴더 안에는, 지난 6화 수술 당시 제가 원격 조작의 흔적을 우회 기록해 두었던 백업 데이터가 잠겨 있습니다. 외부 네트워크를 통해 메인 시스템의 로그를 지우더라도, 이 기기의 비휘발성 플래시 메모리에 물리적으로 각인된 '기기 조작 오동작 로그 강제 주입 세팅'은 지울 수 없습니다."

수사관의 지시에 따라 기술 요원이 정밀 드라이버를 꺼내 패널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틱, 틱 하는 기계음과 함께 나사가 풀려 나갔다. 이준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과거 백강혁이던 시절부터 쌓아온 의료 장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메인보드가 드러나고, 요원이 특수 전송 케이블을 연결하자 노트북 화면에 수천 줄의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요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이윽고 특정 날짜와 시간대에 붉은색 경고 표시가 켜졌다.

"찾았습니다! 12수술실 첨단 장비 통합 포트 백업 폴더 내에 민건우가 설계한 임상 기계 조작 오동작 로그 강제 주입 세팅 값입니다. 수술 중인 환자의 생체 신호를 왜곡해 집도의의 과실로 몰아가려 했던 원격 명령어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확실합니까?"

"예, IP 추적 결과 원내 기획조정실 관리자 단말기에서 송신된 것이 확실합니다."

이준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사관님, 그 메모리 내에서 다른 타임스탬프[5]도 함께 조회해 주십시오. 임준필 실장이 수술실 약제 보관함에 제게 마약 누명을 씌우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긴급 가동시켰던, 마취제 불법 투여 전산 수정 기록이 있을 겁니다."

요원이 재빠르게 엔터 키를 눌렀다. 잠시 후, 화면에 펜타닐[3]과 케타민[4]의 원내 재고 전산 수정 로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수정 시간은 이준이 마약 수수 의혹을 받기 바로 직전이었고, 수정에 사용된 계정은 임준필의 개인 행정 ID였다.

"이건 완벽한 공문서 위조 및 전산망 무단 침입, 그리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입니다."

수사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증거물들은 단순한 행정 오류 수준을 넘어선 조직적인 범죄의 실체였다.

***

오전 07시 40분. 본관 로비.

"한 선생!"

단호하면서도 신뢰감 넘치는 목소리에 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흉부외과 서재희 교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묵직한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사회 쪽에서 직권 면직 처분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저들이 대기업 지분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려 하더군요."

"대비는 하셨습니까?"

서재희는 서류 뭉치를 툭툭 치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대한의료연대 학회 부의장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저들이 간과한 모양입니다. 어젯밤부터 긴급 연락망을 가동해 명인대 병원 내 전 공보 의사들과 전공의들의 가처분 반대 성명 동의서 300부를 일거에 조달했습니다."

그녀가 내민 서류에는 빽빽한 서명들이 적혀 있었다.

"이사회에서 우리 중 단 한 명이라도 면직 처분을 내리는 순간, 이 동의서들은 즉각 법원과 보건복지부, 그리고 언론사에 동시에 뿌려질 겁니다. 사립대학 병원의 독단적인 보복성 징계 정치를 사회적 비난의 한복판에 세워두고 여론의 뭇매를 맞게 만들 생각입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철저함은 언제나 훌륭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든든하군요, 서 교수님. 이제 방패는 마련되었으니, 검을 휘두를 차례입니다."

그 시각, 수술실에서 획득한 범죄 로그에 적시된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임준필의 기획조정실 행정 단말기임이 확인되자, 법원은 영장을 전격 발부했다. 대기하고 있던 서울중앙지검 형사팀 수사관들이 법원 집행관들과 함께 명인대 병원 본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오전 07시 55분. 본관 12층 이사회 소회의실.

"회의 시작 전, 마지막으로 안건을 점검하겠습니다."

민건우 병원장이 테이블 상석에 앉아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말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기획조정실장 임준필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흉부외과 서재희 교수를 비롯한 한이준 우호 세력들을 오늘부로 전부 직권 면직 처리해야 합니다. 병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재단 이사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임준필은 자신이 드디어 눈엣가시 같던 한이준의 날개를 꺾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기업 투자 우회 주식단의 위임장도 완벽히 확보해 두었으니, 표결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합니다. 병원장님, 바로 가결하시지요."

이사진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만년필을 쥐었다. 민건우가 의사봉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소회의실의 묵직한 참나무 문이 거칠게 열려 젖혀졌다.

쿵!

"회의 중에 무슨 무례한 짓인가!"

민건우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푸른색 검찰 뱃지를 가슴에 단 수사관들과 그 뒤로 한이준, 서재희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입니다."

중앙지검 검사가 수사관들을 거느리고 회의실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임준필에게 꽂혔다.

"기획조정실장 임준필 씨. 당신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교사, 공문서 위조 및 행사, 그리고 전산망 무단 침입을 통한 환자 상해 교사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뭐, 뭐라고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내가 이 병원의 기획조정실장이야! 감히 누굴 체포하겠다는 거야!"

임준필이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거침없이 다가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찰칵!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임준필의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졌다. 회의실 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사진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 병원은 사법권의 침해를 묵과할 수 없습니다!"

민건우가 테이블을 탁 치며 일어났다. 그러나 이준이 그 앞을 가로막아 서며 품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던졌다. 서류들이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사법권 침해가 아니라 정당한 법 집행입니다, 민 병원장님. 12수술실 하이브리드 콘솔 백업 메모리에서 추출한 실제 로그 데이터입니다. 임 실장이 사용하는 단말기의 맥 어드레스와 개인 ID로, 수술 중인 환자의 기계 설정을 조작해 저를 수술 실패자로 만들려 한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하고 정교했다.

"또한, 제게 마약 누명을 씌우기 위해 전산망을 조작해 마취약 처방 기록을 무단 수정한 타임스탬프 역시 고스란히 복구되었습니다. 이 모든 범죄 행위가 기획조정실장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음이 과학적 데이터로 입증되었습니다."

민건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는 흩어진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이내 손끝을 부르르 떨며 내려놓았다. 승리를 확신했던 이사회의 장소는 순식간에 범죄자의 현장 검거 현장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서재희 교수님을 비롯한 의료진들을 함부로 면직시키려 하시는 모양인데."

이준이 서재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서명부를 테이블 중앙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전국 전임의 및 전공의 300명이 서명한 가처분 반대 성명 동의서입니다. 만약 오늘 이사회에서 단 한 명이라도 부당한 면직 처분을 받는다면, 명인대 병원의 불법 임상시험 의혹과 보복성 인사 징계에 대한 전면 투쟁 성명서가 언론에 배포될 것입니다.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서재희의 일침에 이사진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대기업 우회 지분이고 뭐고, 이런 초대형 스캔들이 터지면 주가는 물론이고 병원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터였다. 주주들의 시선이 민건우를 향해 싸늘하게 꽂히기 시작했다.

"병원장님! 이거 다 병원장님이 시키신 일이잖아요! 12수술실 하이브리드 장비 오작동 로그 주입도, 한이준 마약 누명 씌우라고 한 것도 전부 다...!"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가던 임준필이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민건우는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헛소린가, 임 실장. 법을 어겼으면 죗값을 치러야지. 나는 자네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네."

완벽한 꼬리 자르기였다. 자신을 철저히 소모품으로 버리려는 민건우의 태도에, 임준필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그는 사지를 떨며 자신을 끌고 가려는 수사관들의 손아귀에서 발버둥 쳤다. 그리고 소회의실 문턱을 넘어서기 직전,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민건우! 네가 내게 넘기기로 한 대기업 불법 주식 매도 확약서는 무효다! 나만 죽을 것 같아? 기조실 금고 안에 숨겨둔 서클 9 불법 계약서 복사본도 내가 다 검찰에 넘겨 버릴 거야! 다 같이 죽는 거라고, 이 나쁜 새끼야!"

울부짖는 임준필의 목소리가 12층 복도와 이사회실 벽면에 부딪치며 흉포한 메아리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순간, 민건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의 눈동자가 이준의 서늘한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이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아주 느리게 올라갔다.

이제, 사냥의 진정한 종착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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