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정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광채가 이준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찌르고 들어왔다.
[WARNING: UNAUTHORIZED DRUG PRESCRIBED] [환자: 오창석 (VIP) / 처방 약물: 메틸페니데이트 고농축액 50mg (중추신경자극제)[1]] [처방 상태: 승인 완료 / 처방의: 한이준]
자신이 손대지 않은 처방 데이터. 마우스를 쥔 손끝에 핏기가 가셨다.
"결국 이 따위 장난질인가."
낮게 읊조리는 이준의 목소리에 서리가 서렸다.
대동맥 우회 수술을 마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환자였다. 혈관을 이어 붙인 미세 봉합사들이 아직 자리도 잡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중추신경자극제가 투여된다면 결과는 뻔했다. 혈압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분당 심박수가 치솟으며, 봉합 부위가 터져나가 흉강 내 대량 출혈로 사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살인적인 처방을 내린 의사는 시스템상 '한이준'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준은 의신의 안안(眼)을 발동해 단말기 화면 너머의 네트워크 데이터 흐름을 추적했다. 붉은색 실선으로 얽힌 가상의 신호들이 병원 메인 서버실과 기획조정실을 거쳐 원격으로 이곳 중환자실 단말기에 침투한 흔적이 보였다.
그때, 중환자실 입구의 약제 카트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간호사가 오창석 환자의 병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손에는 메틸페니데이트 앰플이 들려 있었다.
"멈춰요."
이준이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간호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하지만 한 선생님 명의로 긴급 포스트 오피(Post-Op)[2] 처방이 내려왔는데요. 기조실에서도 직접 확인 전화가 와서 조속히 투여하라고……."
"처방 오류입니다. 약물 회수하고 원내 전산팀에 확인하기 전까지 해당 환자에게 어떤 약물도 추가 투여하지 마세요."
"하지만 기조실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건이라……."
간호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주저했다. 임준필이 뒤에서 손을 쓴 것이 명백했다. 이준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임 실장님이 전산 조작에 서투르시더군요."
이준은 화면의 로그 기록을 역추적해 타임스탬프[3]를 열었다.
거기에는 오늘 발생한 오류뿐만 아니라, 지난 1화에서 임준필이 수술실 약제 보관함에 마약류를 무단으로 가동한 뒤 이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전산망에 무단 접근하여 수정했던 행정 로그인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ID: JPlim_admin / Access Time: 14:22:05 / Action: Modify Narcotics Log]
"이게 당신의 아킬레스건이야, 임준필."
이준이 그 로그를 개인 보안 드라이브로 백업하려는 찰나, 갑자기 모니터 화면이 거칠게 점멸했다.
파지직!
시스템 전체가 원격으로 락(Lock)이 걸리기 시작했다. 민건우 병원장이 제어하는 메인 서버에서 이준의 접근 권한을 실시간으로 박탈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접근 제한: 기획조정실 승인 필요'라는 문구만 반복해서 떴다.
동시에, 이준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끔찍한 통증이 치솟았다.
쿵!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크게 요동치더니, 이내 끈적한 늪 속으로 가라앉듯 고동을 멈추려 했다.
비정상적인 서맥과 함께 심방과 심실의 신호가 완전히 어긋나는 3도 방실차단[4] 증상이었다. 의신의 안안을 과도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원격 서버의 압박에 대응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운 대가였다.
"하윽……!"
이준은 가슴을 움켜쥐고 단말기 데스크 위로 쓰러졌다.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폐포가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대로…… 멎는 건가.'
심장 박동수가 분당 30회 이하로 떨어지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이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그때 이준의 손끝이 코트 주머니 안의 단단한 유리 감각을 인지했다.
차도현이 건넸던 임상 테스트용 특수 신약 베타블로커[5] 앰플.
이준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주머니에서 2ml 용량의 푸른 앰플을 꺼냈다. 필터 주사기를 찾아 결합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앰플 목을 손끝으로 쳐서 부러뜨린 뒤, 싱크대 옆에 놓여 있던 일회용 3cc 주사기로 액체를 빨아들였다.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자신의 왼쪽 팔뚝 안쪽, 정맥의 푸른 선을 안안의 초감각으로 겨냥했다.
바늘이 거칠게 피부를 뚫고 정맥을 관통했다. 피가 역류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준은 파란 액체를 단숨에 밀어 넣었다.
주입된 약물이 혈관을 타고 우심방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불덩이가 심장을 통과하는 듯한 격렬한 작열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아아악!"
비명이 목구멍 안쪽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미친 듯이 엇박자를 타던 하트 레이트가 서서히 일정한 리듬을 찾기 시작했다. 삐- 삐- 소리를 내며 울리던 머릿속의 이명이 걷히고, 차갑고 맑은 기운이 심근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분당 70회. 완벽한 정상 맥박이었다.
이준은 단말기 데스크를 짚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한 선생님! 괜찮으세요?"
달려온 간호사가 이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준은 거칠게 숨을 고른 뒤, 주사기를 쓰레기통 깊숙이 밀어 넣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창석 환자 처방은 방금 제 권한으로 전산 취소 처리했습니다. 기조실에서 뭐라고 하든, 내 허락 없이 약물 투여는 불가하다고 전하세요."
말을 마친 이준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벽을 짚고 겨우 버텼다. 약의 효능은 확실했지만, 육체가 감당해야 하는 피로는 한계를 초과하고 있었다.
***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회복실 구석, 간이 침대에 이준이 누워 있었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것은 벽면에 걸린 바이탈 모니터의 흐릿한 녹색 광원뿐이었다.
서재희는 이준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준의 창백한 얼굴과 자신의 손목시계, 그리고 모니터 화면을 끊임없이 오갔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돌아갈 때마다 그녀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이준의 손목에는 그녀가 직접 연결한 간이 심전도 패드가 부착되어 있었다.
"고집 센 인간 같으니라고."
재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밤새 이준의 곁을 지켰다. 수술실에서의 그 압도적인 집도 실력 뒤에 이토록 처절한 육체적 붕괴가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준의 가슴께가 불규칙하게 오르내릴 때마다 그녀의 손가락이 이준의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식은땀을 닦아내는 그녀의 손길은 평소의 차가운 태도와 달리 조심스러웠다.
이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서 선생."
갈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재희는 얼른 손을 거두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한 기색이 감돌았다.
"깼군요. Bio-monitor[6]상 심박수가 40 이하로 떨어졌을 때는 응급실로 실어 보낼까 고민했습니다."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여섯 시간째요. 환자는 무사합니다. 오창석 환자 처방 조작 건은 내가 원내 안전 보고서로 정식 등록해 뒀어요. 임준필 실장도 더는 손대지 못할 겁니다."
이준이 상체를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심장의 고동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차도현의 신약이 가진 임상 데이터의 정확성에 이준은 내심 감탄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난 그저 내 수술방 파트너가 허무하게 급사하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니까."
재희는 시계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녀의 눈가에 서린 피로는 밤새 그를 모니터링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도현 대표에게 연락이 와 있었습니다. 깨어나는 대로 연락하라고 하더군요."
이준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차도현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
"몸은 좀 어떠십니까, 한 선생님?"
송수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도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여유롭고도 계산적이었다.
"신약의 효과는 아주 훌륭하더군요. 부작용을 경감시키는 것을 넘어 심근의 전도 유도를 강제로 정상화시키는 기전이더군요."
이준은 냉철하게 약물의 피드백을 전달했다. 차도현이 건넸던 푸른 앰플의 성분과 자신의 신체 반응을 정밀한 의학적 수치로 나열하자, 수화기 저편에서 나직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과연 천재 외과의답군요. 단 한 번의 투여로 약물의 정밀 기전까지 파악해 내다니. 서클 9이 왜 그 약물의 특허를 그토록 꽁꽁 싸매고 독점하려 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그들이 이 약물을 미승인 VIP 임상시험의 부작용 치료제로 비밀리에 유통하고 있었다는 뜻이겠군요."
"정답입니다. 그리고 방금 우리 법률 대리인을 통해 서클 9 내부 제약 커넥션의 핵심인 '명인 바이오'를 상대로 특허 침해 및 불법 물질 유통에 관한 형사 고소장을 접수했습니다."
차도현의 목소리에 서늘한 승기를 띤 어조가 섞였다.
"그들이 한 선생님의 심장을 마비시켜 은밀히 매장하려 했던 그 물리적 독약을, 이제 우리는 그들의 목줄을 죄는 법적 올가미로 바꾼 겁니다. 지적재산권 위반과 불법 처방 조작 혐의가 동시에 터지면, 민건우 병원장도 이사회에서 제 목숨 부지하기 바쁠 겁니다."
이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민건우와 임준필이 설계한 화학적 습격을 역으로 그들이 독점하던 신약 특허의 취약성을 치고 들어가는 거대한 법적 무기로 치환해 낸 것이다. 서클 9이라는 거대한 카르텔의 철옹성에 마침내 메울 수 없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군요, 차 대표."
"서로의 패가 확실하니까요. 그럼 병원 내부의 쥐새끼들은 한 선생님이 마저 처리해 주시죠."
통화가 끊겼다. 이준은 전공의 연구실의 가죽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머릿속으로 다음 단계의 법적 공방과 원내 규정을 대조하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
오전 11시 45분.
연구실 안은 고요했다. 서재희는 책상에 앉아 오창석 환자의 포스트 오피 차트를 최종 점검하고 있었고, 이준은 커피잔을 든 채 창밖의 병원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콰광-!
연구실 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리며 정적이 산산조각 났다.
양복을 입은 이사회 소속 보안 경비원 네 명이 들이닥쳐 양옆으로 도열했다. 그 뒤로 잔뜩 독기가 오른 얼굴의 기획조정실장 임준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직인이 찍힌 서류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한이준."
임준필이 이빨 사이로 불꽃을 튀기며 이준의 이름을 뱉어냈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때렸다.
"기조실장님,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여기는 의사들의 연구 공간입니다."
서재희가 벌떡 일어나며 앞을 가로막았지만, 임준필은 그녀를 본체만체하며 이준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이준 전공의. 아니, 이제 전공의라고 불러줄 필요도 없겠군."
임준필이 들고 있던 서류를 이준의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두꺼운 종이가 책상 유리에 부딪히며 탁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병원장 직인 명의로 발부된 임시 행정 명령서다. 사유는 마약류 처방 오남용 및 원내 전산망 무단 해킹 혐의."
명령서의 맨 위에는 굵은 고딕체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의무 면허 자격 일시 정지 및 병원 출입 금지 명령]
"지금 이 순간부로 네놈의 의사 면허 자격은 원내에서 일시 정지된다. 또한 명인대학교 병원 본관을 비롯한 모든 시설에 대한 출입을 금지한다. 보안 요원들, 당장 저 자의 신분증과 면허 카드를 압수하고 병원 밖으로 끌어내!"
임준필의 얼굴에 광기 어린 승리감이 일어났다.
그는 이준이 전산 로그를 백업해 두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정식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물리적으로 그를 병원에서 격리해 증거를 인멸하려는 최후의 수단을 동반한 법적 압박을 선택한 것이었다.
보안 요원들이 차가운 눈빛으로 이준을 향해 한 걸음 좁혀왔다.
이준은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냉소만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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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틸페니데이트(Methylphenidate): 중추신경계를 자극하여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의 재흡수를 억제하는 약물. 심박수와 혈압을 급격히 상승시킨다. [2] 포스트 오피(Post-operative): 수술 후 상태를 의미함. [3] 타임스탬프(Timestamp): 특정 시점에 데이터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컴퓨터 시스템이 기록하는 시간 정보. [4] 방실차단(Atrioventricular Block): 심방에서 심실로 전도되는 전기 신호가 지연되거나 차단되는 부정맥 상태. [5] 베타블로커(Beta-blocker): 심장의 베타 수용체를 차단하여 심박수와 혈압을 낮추고 심장의 부하를 줄여주는 약물. [6] Bio-monitor: 생체 신호(심박수, 혈압, 산소포화도 등)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