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09시 10분]
귀를 찢는 적색 초응급 호출음이 좁은 의국 복도 벽면에 부딪쳐 고막을 찔렀다.
벽면에 매달린 LED 모니터가 피빛으로 깜빡였다. [12수술실 비상 대기. 환자: 노길현. 급성 승모판 파열 및 심원성 쇼크.]
서재희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준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전임 이사장이자 서클 9의 정점에 선 노인, 노길현.
"이준 씨, 이건……."
"갑시다."
이준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차도현이 말했던 사냥감이 제 발로 덫을 향해 기어 들어온 꼴이었다. 주머니 속 가죽 케이스에 담긴 특수 약물 바이알의 단단한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12수술실 앞 하이브리드 대기실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이미 한 사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민건우 병원장이었다.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그의 포마드 헤어가 미세하게 흩어져 있었다. 민건우는 수술실 입구의 불투명 유리창을 등진 채, 두꺼운 가죽 클립보드를 이준을 향해 내밀었다.
"한이준 선생."
민건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사냥감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포식자의 습기가 묻어났다.
"병원 이사장님이자 전 총리이신 노길현 고문님이시네. 상태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이 수술, 자네가 집도하게."
이준의 시선이 민건우가 내민 클립보드 서류로 향했다.
[VIP 긴급 집도 및 결과 책임 서약서]
종이 위에는 이미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집도의 한이준이 수술 중 발생하는 모든 사태와 예후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전적으로 부담한다는 조항이 굵은 고딕체로 박혀 있었다. 전형적인 외통수였다. 수술이 실패하면 이준은 살인마가 되어 의사 면허가 박탈될 것이고, 수술을 거부해도 환자 방치로 파멸할 터였다.
"병원장님."
이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서류가 아닌 민건우의 눈동자를 꿰뚫고 있었다.
"이런 조잡한 종이 쪼가리로 제 손발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장님의 수술은 국가적인 중대사네. 확실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면, 병원장으로서 집도를 허가할 수 없네."
민건우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12수술실 내부의 무균 제어기와 인공심폐기 라인에는 이미 그들이 손을 써둔 상태였으니까.
이준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가운 안주머니에서 얇은 태블릿 PC 한 대를 꺼내 민건우의 가슴팍에 가볍게 툭 쳤다.
"이걸 보시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실지 모르겠군요."
"이게 뭔가?"
"임준필 실장이 제 개인 약제 보관함 전산망에 침입해 마약류 불법 투여 기록을 조작했던 타임스탬프[1] 로그 파일입니다."
민건우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이준은 태블릿의 화면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조작이 실행된 IP 주소의 발신지를 추적해 봤습니다. 기획조정실 내부망이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시간대 기획실의 전산망 게이트웨이를 열어준 마스터 키가 바로 '병원장 직속 IP'였습니다."
"한 선생, 지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공문서 위조 및 전산 무단 접근, 그리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교사 혐의. 이 로그 파일을 보건복지부와 검찰청에 바로 전송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임준필이 혼자 독박을 쓰고 끝낼 위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이준의 손끝이 민건우의 턱밑을 겨누듯 서류판을 툭툭 쳤다.
"이 서약서에 서명하는 대신, 이 전산 조작 기록에 대한 형사 고발은 잠시 보류해 드리죠. 하지만 수술실 내에서 내 집도 권한을 방해하는 그 어떤 움직임이라도 포착된다면, 이 데이터는 즉시 대검찰청 첨단범죄수사과로 전송됩니다."
민건우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꽉 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이준은 놓치지 않았다. 정치적 야욕을 위해 법망을 장난감처럼 부리던 남자가, 자신이 쳐놓은 덫의 역풍을 맞고 있었다.
"……좋을 대로 하게. 하지만 명심하게. 테이블 위의 노인은 30분도 버티기 힘들 걸세."
민건우는 서류판을 낚아채듯 거두어들이며 뒤를 돌았다. 그의 뒷모습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전 09시 20분]
민건우가 대기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준비실의 정적이 깨졌다.
스윽.
거친 마찰음과 함께 서재희가 이준의 의사 가운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준 씨, 미쳤어요? 이건 살인이에요. 저 노인의 심장은 이미 괴사 한계선에 다다랐어요. 혈압 60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요. 게다가 병원장이 저렇게 대놓고 덫을 깔아둔 수술실에 제 발로 들어가겠다니요!"
재희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천재적인 감각을 지녔으나 매번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는 이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비명이기도 했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희의 손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떼어내며 낮게 읊조렸다.
"서 선생."
"말리지 마요. 지금이라도 타 병원 전원 신청을……."
"의사는 환자의 심장이 정지했을 때만 포기를 선언하는 법입니다."
이준의 눈동자가 깊고 푸른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과거 백강혁 시절, 서클 9의 배신으로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가던 순간에도 그가 놓지 않았던 단 하나의 신념이었다.
"환자가 누구든, 그 배후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든 간에 내 눈앞에 누워 있는 한 그는 살려야 할 환자일 뿐입니다. 그게 내가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유일한 이유요."
재희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이준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할 정도의 숭고함과 자기파괴적인 영웅적 면모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관통했다. 타협과 정치질로 얼룩진 이 병원 안에서, 오직 환자의 생명만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이 남자의 광기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도울게요."
재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대신,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수술은 제가 중단시킬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준은 차갑게 웃으며 스크럽 대를 향해 걸어갔다.
[오전 09시 30분]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리자, 차가운 무균 공기가 이준의 뺨을 때렸다.
웅웅웅—.
미세한 기계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준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방에 배치된 최신형 HD CCTV 카메라 세 대가 렌즈를 기괴하게 꺾으며 상향 앵글을 잡고 있었다. 카메라 바디에 새겨진 파란색 LED 등이 깜빡이는 것은, 관제센터로 실시간 고화질 스트리밍이 전송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모니터 너머, 민건우와 서클 9의 노회한 원로들이 이준의 칼끝을 시시각각 지켜보고 있으리라. 그들은 이준이 실수를 저지르는 순간만을 고대하며 숨을 죽이고 있을 터였다.
"환자 바이탈 확인해."
이준이 수술대로 다가서며 명령했다.
"BP 65/42, HR 115회. 도파민 및 에피네프린 풀 도즈로 간신히 유지 중입니다. 대동맥 우회기[2] 가동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마취과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의신의 안안(眼)' 활성화.
망막 위에 푸른빛의 스펙트럼이 펼쳐졌다. 노길현의 가슴 가죽을 투과하여, 그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요동치는 심장의 형상이 3차원 입체 그래픽처럼 뇌리에 박혔다.
좌심방과 좌심실 사이에 위치한 승모판막(Mitral Valve)의 전엽이 완전히 찢어져, 심장이 수축할 때마다 붉은 혈류가 거꾸로 뿜어져 나와 폐정맥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미 폐부종이 극도로 진행된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안의 미세 혈류 스캔이 수술 장비로 향했다. 대동맥 우회기(CPB)와 연결된 무균 제어기의 압력 수치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정상 범위를 벗어난, 인위적인 세팅 조작의 흔적이었다. 누군가 수술 도중 장비의 오동작을 유도하기 위해 시스템을 건드려 놓은 것이 분명했다.
'쥐새끼들이 덫을 촘촘히도 깔아놨군.'
이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겁먹고 물러설 단계는 이미 지났다. 그들이 이 수술실을 무덤으로 설계했다면, 이준은 이곳을 신의 영역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수술을 시작한다. 똑똑히 봐라."
이준이 천장의 카메라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진 뒤, 손을 뻗었다.
"메스."
[오전 09시 42분]
서재희가 건넨 메스가 이준의 손바닥에 척 하고 감겼다.
이준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노길현의 흉골 정중앙을 절개해 들어갔다. 가죽이 열리고, 전기 소작기(Bovie)가 단백질이 타는 연기와 함께 쉭쉭 소리를 내며 지혈을 해나갔다.
"리트랙터[3] 걸어."
시야가 확보되자, 마침내 요동치는 노인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검붉게 부푼 좌심방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해 있었다.
"대동맥 및 상·하대정맥 캐뉼레이션[4] 준비. 인공심폐기 가동합니다."
이준이 빠르게 캐뉼라관을 삽입하고 인공심폐기를 연결했다. 노인의 혈액이 투명한 튜브를 타고 나와 인공심폐기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환자의 생명은 오직 이 기계와 이준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대동맥 차단(Aortic Cross-Clamp) 실시. 심정지액(Cardioplegia) 주입해."
심장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평평한 일직선을 그리는 모니터의 심전도 신호음이 수술실을 무겁게 채웠다.
이준은 이중 메스를 쥐고 좌심방을 절개했다. 찢어진 승모판막이 드러났다.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판막의 조직들이 안안의 시각 정보 위로 붉은색 경고등처럼 명멸했다.
"승모판 성형술(Mitral Valvuloplasty)은 불가능하다. 판막 치환술(Mitral Valve Replacement)로 전환한다. 조직 판막 29mm 준비해."
"예, 여기 있습니다!"
스태프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이준의 손끝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로 움직였다. 바늘이 찢어진 판막 조직을 통과해 새로운 인공 판막을 고정하는 과정은 나노 단위의 오차도 없이 완벽했다. 서재희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바늘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수술실의 유일한 파동이었다.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수술실 한구석에 위치한 대동맥 우회기의 모니터 장비가 원인 불명의 급격한 전압 급변을 일으키며 붉은색 경고등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WARNING: CPB FLOW RATE DROP - 1.2L/min]
"어, 어레스트! 대동맥 우회기 유량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환자 뇌 관류압이 무너지고 있어요!"
체외순환사의 비명이 수술실을 강타했다. 기계의 오동작. 누군가 무균 제어기에 심어둔 오동작 로그가 활성화된 것이었다. 노인의 뇌로 가는 혈류가 차단되기 시작했다. 30초 내로 복구하지 못하면 영구적인 뇌사였다.
동시에, 이준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격통이 일어났다.
쿵! 쿵! 쿵! 쿵!
'의신의 안안'을 장시간 유지한 대가가 이준의 심장을 직격했다. 심박수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180, 200, 마침내 220bpm을 돌파했다. 가슴을 짓개는 듯한 극심한 부정맥의 통증에 이준의 시야가 붉게 물들며 메스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한이준 선생?!"
서재희의 경악 섞인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천장의 HD 카메라는 이준의 흔들리는 손끝을 집요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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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임스탬프(Timestamp): 특정 시점에 데이터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컴퓨터 시스템이 기록하는 시간 정보. [2] 대동맥 우회기(Cardiopulmonary Bypass, CPB): 심장 수술 중 심장과 폐의 기능을 대신하여 온몸에 혈액을 순환시켜 주는 장치. [3] 리트랙터(Retractor): 수술 부위를 넓게 벌려 시야를 확보하는 데 사용하는 갈고리 모양의 기구. [4] 캐뉼레이션(Cannulation): 인공심폐기와 환자의 혈관을 연결하기 위해 굵은 관(캐뉼라)을 삽입하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