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08시 20분]
"이게 무슨 지거리야!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경비원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기획조정실장 임준필이 광기 어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핏대가 터질 듯 솟아올랐고, 흐트러진 넥타이가 뱀처럼 목에 감겨 있었다. 이사회장의 육중한 참나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난 이사들이 차도현의 등장을 보며 숨을 죽였다.
명인그룹의 후계자. 이 병원의 목줄을 쥔 자본의 화신이 그곳에 서 있었다.
"병원장님."
차도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대회의실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표류하다가, 오직 한 사람, 한이준에게로 고정되었다.
"징계위원회라는 게 고작 이런 수준이었습니까? 일개 기조실장이 복도에서 쇠파이프라도 휘두른 것처럼 난동을 피우는데, 명인대 병원의 품격이 땅바닥을 기는군요."
병원장 민건우의 미간이 잘게 떨렸다. 그는 얼른 안경을 고쳐 쓰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치가다운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차 전무님께서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영접을 나갔을 것을……."
"영접은 필요 없고."
차도현이 손을 가볍게 젓자, 그의 뒤를 지키던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임준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임준필은 이준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저 새끼는 사기꾼이야! 마약류 관리법 위반이라고! 수술실 약제 보관함에서 펜타닐[2]을 무단으로 빼돌린 범죄자란 말입니다! 병원장님, 저놈을 당장 파면하고 경찰에 넘겨야 합니다!"
임준필의 손끝이 이준의 코앞에서 부르르 떨렸다.
이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표면으로 푸르스름한 안광이 미세하게 스쳤다. '의신의 안안(眼)'이 활성화되며 임준필의 안면 근육 흐름과 호흡 주기가 실시간 데이터로 치환되었다.
[우측 안륜근의 불규칙한 경련. 호흡수 분당 28회. 전형적인 거짓말과 극도의 불안 상태.]
이준은 천천히 양복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둔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화면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자, 대회의실 정면에 설치된 대형 프로젝터 화면으로 정교한 데이터 시트가 출력되었다.
"임준필 실장님."
이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그 펜타닐 건 말입니다. 참 정교한 설계였습니다. 원내 마약류 전산망에 제 사번으로 무단 접속해 100마이크로그램짜리 바이알 세 개를 청구한 것처럼 조작하셨더군요."
"조작이라니! 전산 기록에 네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어! 로그 일지[3]는 거짓말을 안 해!"
"맞습니다. 로그 일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그래서 제가 '진짜' 로그 일지를 가져왔습니다."
이준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붉은색으로 강조된 특정 타임스탬프[1]와 IP 주소가 이사들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취제 불법 투여 전산 수정이 발생한 시각은 어제 오후 11시 14분 02초. 접속된 IP는 병원 외부가 아니라, 본관 6층 기획조정실장실의 개인 데스크톱 PC입니다."
대회의실 내부가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민건우 병원장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게다가 당시 저는 12수술실에서 급성 대동맥 박리 환자의 하이브리드 수술을 집도하고 있었습니다. 수술실 내 CCTV와 마취 기록지에 제 수술 개시 시각은 오후 9시 30분, 종료 시각은 오늘 오전 3시 15분으로 기록되어 있죠. 제가 수술 도중에 유체이탈이라도 해서 기조실장실 PC로 마약 전산망을 해킹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이건……!"
임준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누런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정막한 실내에 울렸다.
"또한, 이 전산 수정 기록의 최종 승인자 포트에는 기조실장의 전용 마스터 키코드가 사용되었습니다. 임 실장님,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및 공문서 위조, 그리고 전산망 무단 침입죄는 의사 면허 취소는 물론이고 실형을 면하기 어려운 중범죄입니다만."
이준이 태블릿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이 모든 데이터는 이미 보건복지부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과 관할 경찰서 지능범죄수사대에 실시간으로 전송되었습니다. 전산 수정 시각의 '타임스탬프'가 완벽한 증거죠."
"아, 아니야……! 병원장님! 저 새끼가 절 모함하는 겁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임준필이 절규하며 민건우를 바라보았으나, 민건우는 이미 싸늘하게 시선을 돌린 뒤였다. 꼬리를 자를 타이밍이었다. 민건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임준필 실장. 자네가 감히 원내 전산망을 조작해 동료 의사를 음해하려 했다니…… 실망이 크네. 당장 기조실장 직위에서 해제하고, 대기발령 조치하겠네. 보안요원들, 뭐 하나? 이 자를 당장 밖으로 끌어내게."
"병원장님! 민건우!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당신이 시켜서…… 읍! 읍!"
보안요원들이 임준필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비참하게 바닥을 긁으며 끌려 나가는 그의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이준은 그 뒷모습을 냉정하게 응시했다.
철저한 데이터의 승리였다. 서클 9이 설계한 법망의 덫을, 그들이 만든 규정의 타임스탬프로 되받아쳐 완전히 박살 낸 순간이었다.
***
[오전 08시 35분]
본관 12층에 위치한 VIP 전용 접견실.
두꺼운 이중창 너머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펫 깔린 방 안에는 오직 한이준과 차도현 둘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차도현은 비서진을 모두 밖에 대기시킨 채, 직접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였다.
"한이준 선생. 아니, 백강혁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차도현의 첫 마디에 이준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이준은 찻잔을 들며 차갑게 대꾸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건 취향이 독특하시군요, 차 전무님."
"껍데기가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데이터니까요."
차도현이 품 안에서 소형 리더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이준이 집도했던 수술실의 바이탈 사인과 초정밀 봉합 장면이 3D 그래픽으로 분석되어 있었다.
"인간의 손끝이 만들어낼 수 없는 나노 단위의 미세 혈관 봉합 성공률 100%. 어시스트의 보조 없이 혼자서 이중 대동맥 인조혈관 치환술을 20분 만에 끝내는 속도. 이건 의학이 아니라 기적입니다. 혹은, 아주 유용한 '무기'이거나."
차도현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에 탐욕과 이성이 뒤섞인 기묘한 빛이 감돌았다.
"서클 9이 이 병원을 장악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단순한 리베이트가 아닙니다. 그들은 VIP들을 대상으로 승인받지 않은 생체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핵심 약물의 특허권과 유통 권한을 독점하려 하죠. 내가 원하는 건 그들이 가진 신약 유통 권한을 완전히 빼앗아 명인그룹의 바이오 계열사로 편입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저를 사냥개로 쓰시겠다?"
"서로 돕자는 겁니다. 한 선생은 서클 9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고, 나는 그들의 이권을 원하니까."
차도현이 정장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케이스를 꺼내 테이블 아래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케이스가 열리자, 그 안에는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2ml 용량의 유리 바이알 세 개가 정렬되어 있었다.
[5]특수 화학 신약 샘플 베타블로커.
"명인그룹 연구소에서 극비리에 개발 중인 심장 충격 제어용 특수 약물입니다. 자율신경계를 급격히 안정시켜 심근의 과부하를 일시적으로 제로(Zero)에 가깝게 리셋해주죠. 한 선생, 당신이 그 대단한 '눈'을 쓸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비명을 지른다는 걸 모를 줄 알았습니까?"
이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의신의 안안'을 사용할 때마다 심장을 짓누르는 부정맥과 칼로 찌르는 듯한 흉통. 그것은 이준의 육체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페널티였다. 이 약물은 그의 자기파괴적인 영웅주의를 지속시켜 줄 유일한 열쇠였다.
"조건이 있습니다."
이준이 낮게 읊조렸다.
"말해 보십시오."
"병원 내에서의 완전한 독립 집도 권한을 보장해 주십시오. 과장이나 병원장의 결재 없이, 오직 내 판단하에 응급 환자를 수술할 수 있는 독립 수술실과 전용 스태프를 구성할 권리. 그리고 내 수술에 그 어떤 행정적, 정치적 태클도 걸지 않겠다는 명인재단의 공식 보증서가 필요합니다."
일개 전공의가 대기업 후계자 앞에서 내걸기에는 지나치게 오만하고 대담한 요구였다.
하지만 차도현은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교수들조차 제 앞에서는 허리를 굽히고 아첨하기 바쁜 이 병원에서, 이토록 대등하고 차갑게 전제 조건을 조율하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좋습니다. 명인재단 이사회의 이름으로 '특별 비상 집도권' 승인서를 발급해 드리죠. 대신, 내 거래에도 확실히 응하셔야 합니다."
차도현이 바이알 케이스를 이준의 손에 쥐여주며 속삭였다.
"이번 주 내로 서클 9의 핵심 인물이자 정계 거물 한 명이 이 병원에 입원할 겁니다. 그들이 준비한 불법 임상 시험의 첫 번째 타깃이죠. 그 수술의 키를 한 선생이 쥐어야 합니다."
***
[오전 08시 55분]
터벅, 터벅.
접견실을 나와 한적한 비상계단으로 들어선 순간, 이준의 무릎이 꺾였다.
"윽……!"
가슴뼈 안쪽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폭발하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이준은 거친 시멘트 벽을 짚으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쿵, 쿵쿵, 쿠우웅.
[초감각적 시각 동기화 해제 후유증. 심근 허혈성 부정맥 발생. 심박수 분당 165회.]
"하아…… 하아……."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눈 앞을 가렸다. 손끝이 덜덜 떨려 주머니 속의 베타블로커 바이알을 꺼낼 힘조차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차가운 계단 바닥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철컥-!
비상구 문이 열리며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한이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이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흉부외과 전임의 서재희였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이준의 손목을 잡아채 맥박을 짚었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 끝으로 이준의 불규칙하고 격렬한 심장 고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맥박이 왜 이래요? 완전히 망가졌잖아! 당장 응급실로 내려가서 심전도 찍고 아미오다론 투여해야 해요!"
재희의 눈동자에 신랄한 우려와 다급함이 가득 찼다. 그녀는 자신의 체온을 전달하듯 이준의 차가운 손을 꼭 쥐며, 마치 아이를 달래는 자장가처럼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숨 쉬어요. 깊게. 내 호흡에 맞춰요. 흡…… 후우. 제발 고집 좀 부리지 말고 내 말 들어요. 당신 이러다 진짜 죽어."
"……괜찮, 습니다."
이준은 이가 부딪히는 것을 참으며 억지로 대답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니까."
그녀의 온기가 전해지자 미칠 것 같던 심장의 폭주가 아주 미세하게 안정을 찾아갔다. 이준은 재희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타협 없는 고집과 순수한 걱정이, 빙하기 같던 이준의 내면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내고 있었다.
"서클 9의 음모를 밝히는 것도 좋지만, 당신 몸이 먼저 부서지면 아무 소용 없어요."
재희가 이준의 옷무새를 정리해주며 씁쓸하게 말했다.
"방금 원내 기획실에서 공문이 내려왔어요. 임준필 실장은 직위해제 되었고, 당신에게는 '원내 독립 집도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병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에요. 도대체 차도현 전무와 무슨 거래를 한 거죠?"
이준은 대답 대신 가죽 케이스를 깊숙이 감추었다.
"살아남기 위한 거래였습니다."
***
[오전 09시 10분]
두 사람이 의국 복도로 들어선 순간, 이준의 의사 가운 주머니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삐--! 삐--! 삐--!
일반적인 호출음이 아니었다. 원내에서 단 한 번도 듣기 힘든, 최고 등급의 적색 초응급 호출(Code Red)이었다.
동시에 복도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의 붉은 경고등이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12수술실 비상 대기. 환자: 노길현 (81세). 진단명: 급성 승모판 파열[6] (Acute Mitral Valve Rupture) 및 심원성 쇼크.]
서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노길현……? 전 국무총리이자, 명인대 재단의 전임 이사장……!"
"서클 9의 상징적 영수이자, 그들의 정점에 서 있는 노인네로군."
이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차도현이 말했던 '이번 주 내로 입원할 정계 거물'이 바로 이 자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게다가 단순한 입원이 아닌, 판막이 완전히 파열되어 심장이 터지기 직전인 초응급 상태로 실려 온 것이다.
[삐- 흉부외과 한이준 선생, 즉시 12수술실로 이동 바랍니다. 환자 혈압 60/40, 에피네프린 풀 도즈 투여 중이나 어레스트 임박.]
의국 호출기가 핏빛 경고를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구원의 기회인가, 아니면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서클 9이 파놓은 거대한 무덤인가.
이준은 주머니 속의 특수 약물 바이알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사냥터는 마련되었고, 사냥감은 이미 피를 흘리며 테이블 위에 누워 있었다.
이준은 한 걸음도 망설이지 않고 12수술실을 향해 차가운 복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