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내일 오전 8시. 병원 본관 대회의실에서 긴급 징계위원회가 개최된다. 민건우 병원장님을 비롯한 온 이사진과 원로 교수들이 전부 배석할 것이다. 그 자리에서도 그 얄팍한 정관 쪼가리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임준필이 이빨을 갈며 뱉어낸 최후통첩은 수술실의 두꺼운 자동문이 닫힌 뒤에도 차가운 공기 속에 스산하게 맴돌았다. 깨진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긁는 듯했다. 한이준의 육체 속에서 백강혁의 영혼은 그 잔향을 들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쥐새끼가 제 발로 호랑이 굴의 빗장을 풀겠다고 날뛰는 꼴이었다.

***

[08:00:00 - 대회의실의 침묵]

다음 날 오전 8시 정각. 명인대학교 병원 본관 5층 대회의실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열렸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짓눌릴 것 같은 침묵, 그리고 권위라는 이름의 악취였다. 타원형의 거대한 대리석 테이블 주위로 백발이 성성한 원로 교수들과 정장을 차려입은 이사진들이 빽빽하게 둘러앉아 있었다. 그 정점에는 명인대 병원의 절대 권력자, 민건우 병원장이 얼음 조각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앉게."

민건우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기계적인 음성이 가두 심문하듯 방 한가운데 놓인 외톨이 의자로 이준을 몰아세웠다.

이준은 한 걸음씩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가죽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해부하듯 쫓았다. 집단이 뿜어내는 유무형의 압박감은 보통의 전공의라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들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준의 눈빛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오히려 머릿속은 소름 돋을 만큼 명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심의에 앞서, 기획조정실장으로부터 경위 보고가 있겠습니다."

간사의 선언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임준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야비한 미소가 얇게 깔려 있었다. 어제의 굴욕을 수천 배로 갚아주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사진 여러분, 그리고 병원장님."

임준필이 서류철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이준을 가리켰다.

"여기 앉아 있는 한이준 전공의는 어제 오후, 정식 집도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실에 무단 침입해 독단적인 시술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자 원내 규정 훼손입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임준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였다.

"이 친구가 수술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약제과에 보관 중이던 최고 등급의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2]을 사적으로 절취해 투여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원내 징계 사유가 아닙니다. 의사면허 취소는 물론, 형사 처벌을 면할 수 없는 중범죄입니다!"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원로 교수들이 혀를 차며 이준을 향해 비난의 눈빛을 보냈다.

"전공의가 마약을 손댔다고?" "이거 원, 병원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군."

비난의 파도가 이준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임준필은 그 흐름을 즐기듯 턱을 치켜세웠다. 완벽한 덫이었다. 마약류 관리법 위반이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의사로서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이니까.

"한이준 선생, 할 말이 있는가?"

민건우 병원장이 이준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판결을 내린 재판관의 그것이었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슬픔도, 억울함도 없는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임 기조실장님."

이준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대회의실의 소음을 갈라놓았다.

"제가 펜타닐을 절취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어제 수술실 약제 카트와 전산 재고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네놈이 수술실에 들어간 직후에 로그가 변경되었더군. 발뺌할 생각 마라!"

임준필이 기세등등하게 쏘아붙였다.

이준은 셔츠 주머니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대리석 테이블 중앙을 향해 가볍게 흩뿌렸다. 하얀 종이들이 이사진들의 앞마당에 낙엽처럼 흩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사들이 반사적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게 뭔가?"

한 원로 교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인쇄된 데이터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제 오후 5시 14분."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 위를 짚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종이 위를 정확히 지목했다.

"수술실 마취 기록 백업 서버의 시스템 로그 일지[3]입니다. 기조실장님 말씀대로 어제 펜타닐의 전산 재고 로그가 수정된 흔적이 있더군요. 그런데 아주 기묘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준의 시선이 임준필의 얼굴에 꽂혔다. 임준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정된 시간은 오후 5시 14분 22초. 하지만 어제 제가 수술실에 진입해 메스를 잡은 시각은 오후 5시 18분이었습니다. 제가 수술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가 전산망에 접속해 마약류 재고를 '수정'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 그건 관리자의 단순 행정 오류일 수도……!"

임준필이 다급하게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 행정 오류를 범한 단말기의 IP 주소를 추적해 보았습니다."

이준이 다음 장을 가리켰다.

"211.234.xx.xx. 명인대학교 병원 기획조정실장실에 거치된 개인 PC의 고유 IP더군요. 게다가 로그인된 계정은 임준필 기조실장님 본인의 마스터 ID였습니다. 타임스탬프[1]에 기록된 초 단위의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회의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사들은 번갈아 가며 서류와 임준필을 바라보았다. 데이터는 명백했다. 이준이 수술을 시작하기도 전에, 임준필의 컴퓨터에서 마약류 기록이 조작된 것이다. 한이준에게 마약 절취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임준필이 사전에 전산을 무단으로 주물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이, 이건 조작된 서류야! 이준이 이 자식이 전산실과 짜고 문서를 위조한 겁니다!"

임준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목줄이 조여드는 짐승처럼 그가 비명을 질렀다. 목에 굵은 핏대가 벌겋게 솟아올랐다.

"조작이라니요."

그때, 회의실 문가에 서 있던 서재희 교수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힘을 실었다.

"이 자료는 오늘 아침 제가 원내 전산보안팀의 공식 승인을 받아 출력한 정식 데이터 백업본입니다. 이사님들께서 지금 당장 전산실에 확인해 보셔도 1초의 오차도 없이 일치할 겁니다."

서재희는 테이블에 앉은 소수 양심파 이사들과 주주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 이준의 자료를 보고 밤새 그들을 설득해 둔 터였다.

"명인대학교 병원은 생명을 다루는 곳입니다. 그런데 원내의 고위 간부가 개인적인 사리사욕과 사적 감정으로 전산 기록을 조작해 전공의에게 마약 사범이라는 공작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우리 명인대 병원의 투명한 감시 시스템의 실체입니까? 만약 이 사실이 외부 보건복지부나 언론에 알려진다면, 우리 병원의 신뢰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재희의 일침에 주주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병원의 대외 이미지와 주가는 그들의 목줄과도 같았다.

"임 실장, 이게 정말 자네 단말기에서 접속된 게 맞나?"

한 투자사 출신의 이사가 차가운 눈으로 임준필을 쏘아보았다.

"어, 그게…… 그러니까 누군가 제 비밀번호를 도용했을 가능성이……."

임준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의 변명은 지나가던 인턴이 들어도 비웃을 만큼 조잡했다.

전공의 한 명을 완벽하게 매장하려던 최고 의결 기구의 수장들이, 이제는 역으로 기조실장을 공문서 위조 및 마약류 관리 위반 방조 혐의로 조사해야 하는 법적 무력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준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그 광경을 감상했다.

그들이 만든 법망과 전산 시스템이라는 무덤에, 결국 임준필 스스로가 기어들어 가 목을 맨 꼴이었다.

***

[08:18:32 - 포식자의 시선]

민건우 병원장은 미동도 없이 이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회의실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민건우의 눈빛만큼은 칼날처럼 번뜩였다. 그는 임준필의 한심한 자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이준이라는 기묘한 전공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눈빛은 전공의의 것이 아니다.'

민건우는 직감했다. 자신이 설계하고, 서클 9이 뒤를 받쳐주는 이 거대한 카르텔의 톱니바퀴 사이에 아주 단단하고 위험한 이물질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어제 교통사고 환자를 살려낸 비현실적인 집도 실력, 그리고 오늘 보여준 치밀한 법률적, 전산적 방어 본능. 이것은 일개 전공의가 단 하루 만에 준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명인대 병원의 내부 시스템을 뼈저리게 겪어본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행보였다.

'백강혁.'

민건우의 머릿속에 3년 전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그 천재 외과의의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육체는 전혀 다르다. 한이준은 그저 평범한 배경의 전공의일 뿐이다. 하지만 저 눈빛, 자신을 향해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적의를 숨기지 않는 저 이성적인 광기는 백강혁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살려둘 수 없다.'

민건우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살의가 고개를 들었다. 서클 9의 VIP 임상시험 조작 음모는 명인대 병원을 넘어 정재계의 명줄이 걸린 거대한 판이다. 여기에 이런 제어 불가능한 변수가 굴러다니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임준필 따위는 버려도 그만인 사냥개에 불과했다.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였다.

민건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회의실의 소란을 잠재웠다. 그의 손짓 하나에 그 시끄럽던 이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임 실장의 전산 도용 여부에 대해서는 감사실을 통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겠네."

민건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임준필을 완벽하게 손절하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한이준 선생 또한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술을 집도한 사실은 변하지 않네. 비록 응급의료법 제5조[4]에 따른 면책 조항을 주장하고 있으나, 원내 규정 위반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피할 수 없네. 이에 본 위원회는……."

그가 이준에게 정직 또는 집도 정지라는 실질적인 칼날을 휘두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대회의실의 거대한 양문형 문이 거칠게 열려 젖혀졌다.

원래라면 징계위원회가 진행되는 동안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보디가드들이 바깥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의 기세는 그 보안 요원들조차 막아설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대여섯 명의 경호원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그리고 그사이로, 흐트러짐 없는 감색 수트를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구두 굽 소리를 울리며 걸어 들어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오만한 광채를 뿜어내는 눈동자.

명인그룹의 막강한 후계자이자, 이 병원의 가장 거대한 자금줄을 쥐고 있는 인물.

차도현이었다.

"아침부터 아주 재미있는 재판을 하고 계시는군요, 병원장님."

차도현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 한가운데로 걸어왔다. 그의 등장에 민건우를 비롯한 모든 이사진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도현은 자신을 붙잡으려 안달이 난 채 씩씩거리는 임준필을 가볍게 무시하고, 곧장 한이준의 앞에 섰다. 그가 이준을 지목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한이준 선생. 나와 얘기 좀 하셔야겠습니다."

그의 손에는 이준의 심장 과부하를 억제할 수 있는 특수 신약의 정보가 담긴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모든 권력자들의 시선이 두 사람의 대치에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

[1] 타임스탬프 (Timestamp): 전자적 기록이 생성되거나 수정된 정확한 시각을 나타내는 데이터 정보. [2] 펜타닐 (Fentanyl):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로, 엄격한 이중 잠금장치와 전산 로그 관리가 필수적인 약물. [3] 로그 일지 (Log File): 컴퓨터 시스템이나 네트워크에서 발생한 모든 동작과 이벤트를 시간순으로 기록한 파일. [4] 응급의료법 제5조 (Emergency Medical Services Act Article 5): 응급환자에게 제공한 응급의료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재산상 피해나 사상에 대해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형사책임을 감면하는 법적 면책 조항.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