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기가 사라지자마자, 부서진 객주 지붕 마루 틈새 위로 검은 기가 요동치는 갈운태의 인형 환영이 허공에 홀연히 형상화된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생명의 온기라곤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 칠흑의 응집체였다. 깨진 기와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검붉은 마기에 굴절되어 객주 바닥에 기괴한 그물망을 그렸다. 허공에 뜬 환영의 입술이 비틀리며 쇳소리 같은 음성이 사방의 벽을 흔들었다.
"결국 자독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꼴이라니. 천일선단의 영력을 지닌 자의 말로가 참으로 가련하구나, 혁련무."
혁련무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도가 막히고 전신의 모세혈관이 터져 나가듯 붉은 선혈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삼켜버린 천일선단의 영력이 체내의 장부와 공명하며 폭주하고 있었다. 힘을 발현할 때마다 영혼을 갉아먹는 선인들의 비극적인 기억이 뇌리를 난도질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살을 깎이고 뼈를 갈며 산 채로 도사(道士)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대 선인의 원념이 그의 사지를 마비시켰다.
"크윽……!"
신음마저 핏덩이에 막혀 둔탁하게 흩어졌다. 마음을 닫아걸수록 주화입마의 그물망은 심장을 조여왔고, 마음을 열면 타인의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영혼을 찢어발겼다.
갈운태의 환영이 기괴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파칵!
어둠 속에서 검은 마기의 사슬이 채찍처럼 뻗어 나가, 객주 구석에 숨어 숨죽이고 있던 무림맹 사장대의 패잔병들과 무고한 투숙객들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들의 신형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마기가 그들의 혈관을 타고 들어가 생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하자, 찰나의 순간에 살점이 말라붙고 눈동자가 뒤집혔다.
"보아라. 네놈이 방관하는 이 순간에도 인과의 고리는 피를 원한다. 네놈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느냐? 이들의 원혼이 네 영맥을 옥죄는 쾌감이 참으로 감미롭구나!"
갈운태의 조롱은 허공을 가르는 비수와 같았다. 살육당하는 이들의 공포와 원한이 천계의 인과 장부를 통해 혁련무의 뇌리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혁련무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신 이십사 혈도가 역류하는 고통 속에서, 그의 시야가 붉게 물들어갔다.
"그만…… 두어라."
혁련무의 목소리는 갈라진 대지처럼 거칠었다. 그러나 환영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잔혹하게 마기를 넓히며 객주의 기둥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그 손을 거두십시오."
설아란이었다. 그녀의 하얀 손이 혁련무의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동시에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반으로 깨진 옥패가 스스로 공명하며 눈이 시릴 정도의 백색 광휘를 뿜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과거 무상신공(無上神功)의 극의를 깨달았던 고대 선인이 후세를 위해 남겨둔 유일무이한 공명의 유산이었다. 옥패에서 흘러나온 태고의 도기(道氣)가 설아란의 때 묻지 않은 온기와 결합하여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스어어어어!
객주 내부를 가득 채웠던 음습한 마기가 백색의 안개에 닿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혁련무의 가슴을 짓누르던 심마의 압박이 일순간 가벼워졌다. 옥패의 빛은 혁련무의 전신을 감싸며 역류하던 진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란……."
혁련무의 눈동자에 맑은 명징함이 돌아왔다. 그의 뇌리 속에서 잠들어 있던 천계의 인과 장부가 황금빛 스스로 찬란하게 빛나며 강제로 책장을 넘겼다. 장부의 시선이 열리자, 눈앞에 있는 갈운태 환영의 본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갈운태가 자신의 수명을 깎아 만든 마기의 핵, 즉 '흑마법구'가 허공의 심장부에서 붉게 맥동하고 있었다. 우주의 에너지 흐름을 간파하는 장부의 힘이 그 위치를 정확히 가리켰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부의 다음 장에는 붉은 먹선으로 피비린내 나는 위지 가문의 채무가 기록되어 있었다. 선조 대에 백양선사에게 지었던 업보와 멸문의 저주가 바로 그곳에 얽혀 있었다. 위지량의 가슴을 짓누르던, 가문을 구하려는 처절한 집착의 근원이 바로 이 장부의 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혁련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주화입마에 흔들리는 나약한 무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천지의 기운을 다스리는 선가의 대리자로서의 위엄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갈운태. 네놈이 인과를 탐하고 기연을 가로채려 했으나,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결코 빠뜨리지 않는 법이다."
혁련무가 손을 뻗어 허공을 향해 단호하게 선포했다.
"선가의 명으로 선언하노라. 인과의 장부에서 위지 가문의 모든 혈채를 영구히 말소한다. 또한, 하늘의 이치를 어지럽히는 자의 허상을 이 자리에서 지우노라!"
그의 목소리는 칠언절구의 시적 리듬을 타고 객주 전체에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건곤일기소음마(乾坤一氣掃陰魔), 천지명경조화생(天地明鏡照化生)." (하늘과 땅의 한 기운이 음침한 마를 쓸어내니, 천지의 밝은 거울이 만물의 화생을 비추도다.)
쾅!
혁련무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의 신성이 갈운태 환영의 심장부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것은 무공의 초식이 아니었다. 인과의 법칙 그 자체를 재조정하는 천계의 권능이었다.
"끄아아아아악!"
갈운태의 환영이 단 한 마디의 명령에 온몸이 찢겨 나가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그가 모았던 수많은 원혼의 마기가 빛의 사슬에 묶여 순식간에 정화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기연을 독차지하고 세상을 지배하려던 갈운태의 허상 무리가, 단지 선가의 말 한마디 명령으로 우주에서 영구히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빛이 잦아들고 객주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위지량은 멍하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대대로 가문을 옭아매고 동생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보이지 않는 저주의 사슬이, 영혼의 기저에서부터 완전히 부서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멸문의 공포와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맑고 깨끗한 진기가 그의 단전을 채웠다.
"이…… 이것은……."
위지량의 눈에서 핏물이 섞인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멸시하고 짓밟으려 했던 무림맹의 협박도, 갈운태의 검은 손길도 더 이상 그의 영혼을 구속할 수 없었다. 혁련무가 단 한 번의 결단으로 위지 가문의 백 년 업보를 대리 청산해 준 것이다.
위지량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오만하던 어깨가 깊게 숙여졌다. 가문의 존망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 했던 고고한 후기지수가, 진정한 구원자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쿵.
그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배례를 올렸다. 그것은 가식 없는 복종이자,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신하의 맹세였다.
"위지 가문의 대대손손 이어질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위지량, 오늘부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오직 대인만을 모시는 검이 되겠나이다. 저의 가문과 혈육의 이름으로 영원한 복종을 서약합니다."
혁련무는 무릎 꿇은 숙적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타인과의 인연을 냉소적으로 거부하려 했던 그의 가슴속에, 위지량의 진심 어린 충성이 묵직한 인과의 고리로 안착했다. 심마의 범박이 한 겹 더 느슨해지는 기묘한 해방감이 그의 영맥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평온함도 잠시였다.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위지량이, 갑자기 붉은 피를 토해내며 혁련무의 소맷자락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공포와 경고가 서려 있었다.
"대인……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갈운태의 간계는 이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혁련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소리냐."
위지량이 떨리는 목소리로, 객주의 목조 지지 기둥 밑바닥을 가리키며 폭로했다.
"갈운태가 보낸 진짜 첩자…… 연진이, 아주 오래전부터 신분을 숨기고 이 객주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그 자가 노린 것은 단순한 기연이 아닙니다. 이 벽향객주의 지반 밑에 묻힌 천계의 원천 지맥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미 수 년 전부터 흑황 가루를 침투시켜 왔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객주 바닥 깊은 곳에서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불길한 진동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무너져 내리는 안식처의 원천 지반에서, 검붉은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지반의 진동은 단순한 땅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지의 뼈대가 부러지고 영맥(靈脈)의 피가 역류하는 거대한 단말마였다.
우지끈!
객주의 중심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적송 기둥의 밑동이 검붉게 타들어가며 세로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새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끈적한 진흙이 아니라, 검은 마기와 황색의 독기가 기이하게 뒤섞인 액체였다. 그것이 바닥 타일에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마모되어 구멍이 뚫렸다.
"이것은…… 단순한 독이 아니로군."
백서진이 깨진 술병 조각을 던져두고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언제나 유랑하는 구름처럼 태연자약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맥의 기틀을 썩혀 무너뜨리는 천부적인 이독(異毒)이다. 갈운태 그 늙은 여우가 이 한적한 객주를 영구히 소멸시키기 위해 수년 전부터 흙을 오염시켜 왔던 게야. 지맥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면, 하늘은 이 땅을 부정한 곳으로 여겨 천뢰(天雷)의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붕의 깨진 틈새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은 이미 검붉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구름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번뜩이는 적색의 뇌전은 지상의 흑황 가루가 뿜어내는 음습한 마기를 정밀한 이정표 삼아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계의 인과 장부가 경고음처럼 붉은 빛을 깜빡이며 혁련무의 뇌해를 두드렸다.
[경고: 인과의 터전이 소멸 위기에 처함. 지맥의 파괴는 주변 삼십 리 안의 모든 민초와 생령의 죽음을 초래함. 이타의 계율을 저버리고 방관할 시, 장부의 채무는 백 배로 가중되어 영혼을 잠식할 것임.]
"크윽……!"
혁련무는 밀려드는 이명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단전에서 천일선단의 영력이 요동치며 혈도를 찢을 듯 날뛰었다. 마음을 닫고 혼자만의 안식을 위해 이곳을 탈출하려 하는 순간, 주화입마의 붉은 그물이 그의 심장을 옭아맸다. 선인들의 영혼 계율은 그에게 사기(私己)를 버리고 약자를 구하라는 가혹한 자비를 강제하고 있었다.
"대인, 피하셔야 합니다! 이 객주의 밑바닥은 이미 거대한 화약고와 같습니다!"
위지량이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일어서며 혁련무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전신은 여전히 내상으로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은혜를 갚겠다는 결연함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퇴로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스스스스.
어둠이 짙게 깔린 객주의 뒤안길, 마구간과 창고가 연결된 어두운 복도 끝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늘 허리를 굽히고 손님들의 말바꿈통을 치우던, 말수 적고 유순하던 늙은 마부 연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걸음걸이에는 구부정한 노인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무림맹의 일류 고수조차 압도할 만큼 예리하고 차가웠다. 그의 손에는 기이한 기문 방위가 새겨진 청동 판이 들려 있었다.
"결국 위지 가문의 맹약은 이렇게 깨어지는구려."
연진의 목소리는 쇠가 긁히는 듯 음산했다. 그가 청동 판을 바닥에 내려놓자, 객주 사방의 기둥 밑바닥에 스며들어 있던 흑황 가루가 일제히 반응하며 황색의 광막을 형성했다.
"갈운태 어르신의 혜안은 삼십 년 앞을 내다보셨지. 혁련무, 네놈이 아무리 천계의 영약을 먹고 등선의 무공을 지녔다 한들, 이 땅의 지맥 자체를 통째로 썩혀 하늘의 제물로 바치는 법진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네놈이…… 처음부터 첩자였군."
혁련무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가운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피어올랐으나,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심장의 고통이 발목을 잡았다. 아란이 지닌 옥패의 백색 광휘가 필사적으로 그의 심마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대지 전체가 흔들리는 이 상황에서는 정화의 힘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벽향객주는 오늘로 천하의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네놈이 가진 천일선단의 남은 정수는 갈운태 어르신의 육신을 완성할 마지막 제물이 되리라!"
연진이 광소를 터뜨리며 기문 청동 판을 밟았다.
쿠구구구궁!
지하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황색의 독풍이 객주의 바닥을 완전히 뜯어내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썩어 들어가는 지맥의 기운이 하늘의 적색 뇌전과 마침내 완전히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밤하늘을 채운 뇌운이 거대한 용의 형상을 그리며 객주의 지붕을 향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아란, 물러서라!"
혁련무는 설아란을 자신의 등 뒤로 밀쳐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 끝에 서린 검망이 황금빛으로 물들었으나, 하늘의 진노를 담은 천뢰의 위압감 앞에서는 한 자루 촛불에 불과했다.
백서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혁련무! 내 말을 기억하느냐? 천수결(天手決)의 역천 구절이다! 그것은 고통을 피하는 편법이 아니야! 하늘의 벌을 몸으로 받아내어 역류시키는 전신 기하의 전치 비법이다!"
천수결의 구절이 혁련무의 뇌리를 스쳤다.
'천도역행(天道逆行), 이뢰제마(以雷制魔).' 하늘의 도를 거슬러 행하며, 천뢰로써 마를 제압한다.
그것은 인간의 육신으로 하늘의 벼락을 직접 받아내야 하는, 사실상 자살행위에 가까운 구도(求道)의 비법이었다. 단 한 치의 오차만 있어도 전신의 맥이 타버리고 혼백이 산산이 조각나 소멸할 터였다.
쾅! 쾅! 쾅!
하늘의 적색 뇌전이 객주의 지붕을 때리기 시작했다. 기와가 가루가 되어 날리고, 불타는 대들보가 혁련무와 설아란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지반은 이미 완전히 주저앉아 거대한 심연의 구멍을 드러내고 있었다.
퇴로는 끊겼고, 하늘은 무너져 내린다.
혁련무는 떨리는 손으로 검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뇌전의 빛과 황금빛 장부의 글씨가 동시에 투영되었다. 일생 동안 세속의 인연을 거부하며 고립을 자처했던 그가, 이제 자신을 믿고 무릎을 꿇은 이들과 이 보잘것없는 객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하늘의 중심에서 가장 거대하고 붉은 벼락이 대지를 일도양단할 기세로 내리꽂혔다. 혁련무의 검이 그 거대한 천뢰를 향해 역방향으로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