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보랏빛 안개가 대기를 잠식하는 속도는 잔인할 정도로 신속했다.

사장대 총관의 손끝에서 떠난 자독 소혼향(紫毒 燒魂香) 주머니들은 허공에서 요란한 파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찰나의 순간, 밤하늘을 수놓았던 붉은 불꽃의 잔영마저 집어삼키며 검붉고 끈적한 아지랑이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독이 아니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의 혼백을 녹이고 살을 부패시키는 금단의 이독(異毒)이자, 인간의 가장 깊은 원념을 자극하는 파멸의 기운이었다.

"치이이익!"

독무가 스친 자리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사장대 무인들이 흘린 선혈로 붉게 물들었던 대지는 순식간에 시커넓게 타들어 가며 거품을 내뿜었고, 백 년을 버텨온 벽향객주 주변의 고목들은 잎사귀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앙상한 해골처럼 말라붙었다. 썩은 황과 비린 쇠붙이가 뒤섞인 듯한 악취가 폐부를 찔렀다.

혁련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으나, 그의 체내에서는 이미 묵직한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천일선단을 삼킨 이래 그의 영혼에 각인된 '천계의 인과 장부'가 자독의 침투에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우주의 정순한 법도를 담은 장부는 사악한 이독이 체내의 기경팔맥을 침범하자 이를 정화하기 위해 황금빛 신성을 뿜어내었다. 그러나 그 신성은 공짜가 아니었다. 장부의 잠재력이 개화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선인들의 부채와 비극적인 말로가, 침투한 주독(呪毒)과 결합하여 한층 더 잔혹한 형태로 혁련무의 정신을 난타했다.

'이 힘을 탐한 자들의 종말을 보아라. 배신과 불신 속에 홀로 썩어간 혼백들의 곡소리를 들어라.'

머릿속을 찢고 들어오는 환청은 수천 명의 망자가 동시에 지르는 비명과 같았다. 과거 무상신공을 연마하다 의형제들의 배신으로 만인총에 던져졌던 고대 선인의 원혼이 혁련무의 뇌리를 강타했다. 전신 48혈이 일시에 뒤틀리며 불길에 휩싸인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심장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심마(心魔)가 장부의 독기와 공명하여 미친 듯이 팽창했다.

"으…… 윽!"

혁련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더니, 이내 핏빛 붉은 기운이 그 자리를 채웠다.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붉은 피눈물이 뺨을 적셨다. 이성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오직 세상을 향한 증오와 파괴의 충동만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모두…… 사라져라."

그의 목소리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쇠 가죽을 긁는 듯한 탁하고 무거운 파음이 벽향객주의 앞마당을 진동시켰다.

혁련무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무상진기가 제어력을 잃고 폭주했다. 콰아아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객주의 우측 방벽이 종이장처럼 찢겨 나갔다. 흙먼지와 돌가루가 폭풍처럼 휘날리는 가운데, 혁련무는 피눈물을 흘리며 제 손으로 일구어온 안식처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땅이 갈라지고 기둥이 꺾였다.

"괴물…… 진짜 괴물이다!"

사장대 총관은 자독 소혼향마저 집어삼키며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혁련무의 독보적인 기세에 압도되어 비명을 질렀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장대 무인들은 무기를 버려둔 채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으나, 폭주하는 진기의 압력에 짓눌려 걸음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그 파멸의 중심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는 가녀린 그림자가 있었다.

설아란이었다.

그녀의 하얀 옷자락은 이미 보랏빛 독무에 스쳐 군데군데 검게 변해 가고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독기가 폐를 찔러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오직 피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혁련무를 향한 깊은 연민과 슬픔만이 고요하게 일렁일 뿐이었다.

"아란! 오지 마라! 저 자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멀리서 잔해를 헤치고 일어나던 무인들이 비명을 질렀으나, 설아란은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혁련무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그는 거대한 장풍을 일으켜 눈앞의 모든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다. 손끝에 모인 금백색의 진기가 흉포한 뇌전처럼 요동쳤다. 그 일격이 가해진다면 설아란은 형체도 남지 않고 소멸할 터였다.

하지만 설아란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촉진하여 혁련무의 품 안으로 스스로를 던졌다.

팍!

가느다란 두 팔이 혁련무의 단단하고 차가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설아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호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혁련무의 가슴에 밀착시키고,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뺨에 얼굴을 맞대었다.

그 순간, 설아란의 목에 걸려 있던 파손된 옥패가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선인이 남긴 무상신공의 독특한 영적 유산이었다. 부서진 틈새 사이로 눈이 부실 정도의 금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설아란이 품은 숭고한 연민의 온기와 결합하여, 혁련무의 체내에 흐르는 폭주하는 진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선인의 계율이 응답한다. 타인의 고통을 짊어지려는 순수한 온기가 인과의 사슬을 녹인다.'

장부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울림이 일었다. 혁련무의 심장을 갉아먹던 심마의 범박(凡縛)이 설아란의 신체 접촉을 통해 전달된 온기로 인해 급격하게 느슨해졌다. 이성이 마비되었던 혁련무의 눈동자에 점차 명징한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신체가 맞닿은 지점을 발원지로 하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보랏빛 자독 소혼향이 한순간에 정화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독연 안개가 금백색의 찬란한 진기로 변모하더니, 이내 거대한 해일과 같은 정화의 물결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스으으으으!

독기가 사라진 대지에는 기이하게도 맑고 향기로운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부러졌던 나무의 밑동에서 푸른 싹이 돋아나고, 산산이 조각났던 객주의 잔해 위로 금빛 서기가 내려앉았다. 사장대의 무인들이 내뿜던 살기와 원념마저 그 거대한 정화의 물결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 한 번의 영적 동조와 신체 접촉으로, 천지를 뒤덮었던 치명적인 독산(毒山)이 완벽한 선도(仙道)의 영역으로 화한 것이다. 극상의 이적이었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넋을 잃고 그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혁련무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자신을 껴안은 설아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피로 물든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타인과의 인연을 그토록 냉소적으로 거부하려 했던 자신의 결함이, 그녀의 헌신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리석은…… 짓을 하였구나."

혁련무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가웠으나,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아란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당신이 무사하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상황이 진정되자, 흩어졌던 먼지 사이로 한 사내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백서진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한 손에 술병을 쥔 채, 부서진 객주의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능글맞은 장난기를 지우고 묵직한 진중함을 담고 있었다.

"허어, 눈물겨운 남녀의 정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만, 강호의 판세가 그리 녹록지 않게 흘러가는구나."

백서진이 담벼락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혁련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혁련무의 전신을 훑은 뒤, 이내 객주의 바닥을 향했다.

"갈운태 그 늙은 여우가 움직였다. 그놈은 이미 무림맹 수뇌부의 탐욕스러운 자들과 은밀한 계약을 맺었어. 자네가 소유한 '천계의 인과 장부'에 적힌 지고 기연 명부를 편취하기 위해, 무림맹의 공권력인 사장대까지 미끼로 던진 셈이지."

혁련무의 미간이 좁아졌다.

"갈운태…… 그자가 맹주 백들과 결탁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네. 그놈은 기연의 정수만을 취해 불사의 육체를 얻으려 하는 미치광이야. 사장대의 이번 습격은 자네의 힘을 시험하고, 장부의 인과를 흔들어 틈을 만들기 위한 정초(奠草)에 불과했지."

백서진은 말을 마치며 발끝으로 객주의 목조 지지 기둥 밑바닥을 툭툭 쳤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네. 자네들이 방금 독안개를 정화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기둥 밑바닥에 스며든 불길한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가?"

혁련무의 시선이 기둥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젠가 갈운태의 세작이 은밀히 뿌려두었던 특수한 흑황(黑黃) 가루가 지반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정화의 진기마저 비껴간 그 어두운 구석에서, 미세한 검은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객주의 근간을 이루는 기문 방어막의 원천을 안으로부터 서서히 좀먹고 있었다. 방어막의 기초가 흔들리는 불길한 진동이 혁련무의 발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것은……."

혁련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더 거대하고 음습한 음모의 덫이 이미 벽향객주의 발밑까지 옥죄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화의 바람이 완전히 가라앉고 고요가 찾아온 전장의 상공, 부서진 객주 지붕 마루의 틈새 위로 홀연히 검은 기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그 기류는 이내 인간의 형상을 이루며 허공에 기괴하게 형상화되었다. 그것은 기(氣)와 혼(魂)을 엮어 만든 갈운태의 인형 환영(人形幻影)이었다.

실체 없는 환영의 입술이 비틀리며, 잔인하고 가학적인 미소가 어둠 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환영의 붉은 눈동자가 혁련무의 시선과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대기가 다시금 무겁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갈운태의 환영이 내뿜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실체 없는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풍기는 마성(魔性)의 기운은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옥죄는 듯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하하하! 실로 눈부신 광경이로구나. 천일선단의 정수와 선인의 기연을 얻고도, 고작 가녀린 계집의 온기에 기댄 채 연명하는 꼴이라니. 혁련무, 네놈은 하늘이 내린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가련한 필부에 불과하다."

환영의 목소리는 사방의 벽을 타고 메아리치며 객주 전체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음산한 음색 속에 담긴 조롱은 혁련무의 평정심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혁련무는 무상진기를 끌어올려 환영을 일격에 소멸시키려 했으나, 뇌리를 스치는 장부의 경고가 그의 행동을 제약했다. 실체 없는 초상(肖像)을 타격하는 순간, 그 반발력이 지반에 스며든 흑황 가루와 공명하여 객주를 완전히 붕괴시킬 것이라는 직관적 경고였다.

"네놈이 이곳에서 한가롭게 정화의 유희를 즐기는 동안, 저 아래에서는 어떤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는 있느냐?"

갈운태의 환영이 비틀린 손가락으로 남쪽 하늘을 가리켰다.

"무림맹 사장대의 칼날이 위지 가문의 가솔들을 도륙하고 있다. 위지량, 그 어리석은 놈이 가문을 구하겠다고 네놈의 목숨을 취하려 했으나, 결국 가문은 무림맹의 탐욕 아래 피의 제물이 될 뿐이지. 그리고 그 흘러넘치는 원한의 피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겠느냐?"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객주의 목조 지지 기둥 밑바닥이 시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지반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있던 흑황 가루가 위지 가문의 멸문지화와 공명하듯, 무서운 속도로 끓어오르며 기둥의 원천 지반을 녹여내렸다. 벽향객주를 굳건히 지탱하던 기문 방어막의 연결 고리가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둔중한 파열음이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크윽……!"

혁련무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인과 장부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아직 마주하지 않은 위지 가문의 처절한 원념과 고통을 그의 영혼에 고스란히 전이시켰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피비린내가 그의 이성을 다시금 마비시키려 했다. 마음을 닫으면 주화입마가 오고, 마음을 열면 타인의 비극이 그의 영혼을 난도질하는 가혹한 형국이었다.

설아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혁련무의 고통을 나누어 받으려는 듯 그의 소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았으나, 지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침한 기운은 이미 그녀의 정화 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백서진이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던져 깨뜨렸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찰나, 그의 신형이 혁련무의 앞을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갈운태, 이 비열한 극독의 지식인이 결국 선을 넘는구나. 지맥의 기틀을 무너뜨려, 기어코 하늘의 진노를 이 땅에 강림시키려는 속셈이로구나!"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은 법이지."

갈운태의 환영이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며 서서히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혁련무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혁련무, 선택해라. 이 객주를 버리고 위지 가문의 남은 혈육을 구하러 갈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 남아 네놈이 아끼는 것들과 함께 천계의 진노 아래 가루가 될 것인가. 인과의 채무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파아아앗!

환영이 완전히 소멸함과 동시에, 하늘에서 웅장한 천뢰(天雷)의 진동이 울렸다. 구름 한 점 없던 밤하늘에 붉은빛의 뇌전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고, 객주 바닥의 흑황 가루는 그 뇌전을 지상으로 끌어당기는 거대한 뇌기(雷氣)의 침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혁련무의 인과 장부가 피로 물든 새로운 장을 강제로 펼치기 시작했다. 다음 장에 기록된 것은 다름 아닌 위지량의 이름이었다. 그의 가문이 멸문당하기 직전의 순간이 붉은 먹선으로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과연 혁련무는 무너져 내리는 안식처와, 자신을 배신하려 했던 숙적의 가문 중 어느 곳을 향해 검을 뽑아야 할 것인가. 천지를 뒤흔드는 천뢰의 포효가 벽향객주의 지붕을 강타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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