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패배한 영웅들이 눈물을 흘리려던 찰나, 객주 외부 대지 사방에서 무림맹의 정예 사장대 군화 소리가 세차게 진동해 온다. 대지를 짓밟는 무거운 철갑의 울림은 벽향객주의 낡은 목조 벽을 지탱하는 기둥마저 미세하게 뒤흔들고, 탁자 위의 등잔불을 가늘게 흐트러뜨린다. 어둠이 짙게 깔린 산야를 뚫고 다가오는 살기는 단순한 기세의 발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생명을 도륙하고 얻어낸 피비린내를 머금은 채, 사방의 숨통을 조여 들어오는 죽음의 장막이다.

위지량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며 검자루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검을 쥐는 것조차 버겨워 보일 정도로 그의 전신은 상흔으로 가득했고, 가문을 수호하겠다는 비장한 집념마저 거대한 권력의 군둣발 아래 짓밟히기 직전이었다.

"그들이…… 마침내 당도했구나. 기어코 나를 찾아내어 가문의 숨통마저 끊으려 하는구나."

낙담 어린 독백이 그의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무림맹 직속 사장대는 한 번 목표로 삼은 사냥감을 결코 놓치지 않는 추살귀들의 집단이다. 그들이 벽향객주를 완전히 포위했다는 사실은, 이제 이 조용한 산골짜기가 피로 물든 도살장으로 변할 것임을 의미했다.

설아란은 위지량의 떨리는 손을 쥔 채, 걱정 어린 눈빛으로 혁련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도, 늘 자신들을 지켜주던 사내의 안위를 걱정하는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혁련무는 객주 중앙에 버티고 서서 가늘게 눈을 찌푸렸다. 천일선단을 삼킨 이후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의 감각이, 밤공기를 타고 날아오는 무수한 쇠붙이의 마찰음과 화약의 매캐한 냄새를 잡아냈다.

"물러서라."

짧게 던진 한마디에는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 순간, 밤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객주의 지붕을 뒤덮었다.

슈우우우욱!

수백, 수천에 달하는 불화살이 일제히 허공을 가르며 벽향객주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어둠을 붉게 물들이며 낙하하는 불의 비는 자비가 없었다. 지붕의 기와가 깨지고, 건조한 목조 벽면에 화살이 박히며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단순한 화살이 아니었다. 화살촉 끝에 묶인 화포용 철환들이 사방에서 폭발하며 객주의 창문과 문짝을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

파편이 비산하고 대지가 뒤흔들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혁련무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단 한 걸음 만에 설아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불화살 폭풍과 깨진 기와 조각들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혁련무는 거친 몸짓으로 장포의 자락을 넓게 펼쳐 설아란의 전신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콰아아앙!

그의 등 뒤에서 화포 철환이 폭발하며 뜨거운 열풍이 불어닥쳤지만, 혁련무의 단단한 등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두터운 장포가 장벽이 되어 모든 화염과 파편을 차단했다. 품에 안긴 설아란의 가녀린 어깨가 가볍게 떨리는 것이 전해졌다. 화약 연기와 불길의 열기 속에서, 오직 그녀가 흘리는 고요한 숨결만이 혁련무의 가슴팍에 닿아 선명한 촉각으로 남았다.

"형님……."

낮게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맑았으나, 그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혁련무가 그녀를 더욱 깊게 품에 안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찰나였다. 설아란의 품 안에서 둔탁하고도 맑은 마찰음이 일었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반쯤 파손된 오래된 옥패가 혁련무의 단단한 흉경과 강하게 충돌한 것이다.

바지직.

지극히 미세한 균열음이 폭발음 사이를 뚫고 혁련무의 고막을 때렸다.

설아란이 지니고 있던 옥패 조각이 마침내 한계를 맞이하여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평범한 돌 조각에 불과한 줄 알았던 그 파편이 부서지는 순간, 그 안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도 장엄한 백색의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과거 전설적인 선인이 남겨둔 독특한 무상신공(無常神功)의 공명 유산이었다. 옥패의 내부에 봉인되어 있던 정순한 선가(仙家)의 내력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혁련무의 체내에 깃든 천계의 인과 장부와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혁련무의 뇌해 속에서 거대한 황금빛 책장이 스스로 펼쳐졌다.

천계의 인과 장부가 요동치며 새로운 구절을 선명하게 새겨 넣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붉은 피와 황금빛 불꽃으로 타오르며 그의 영혼에 각인되었다.

[인과의 채무자여,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으라. 영원한 것은 없으며, 오직 흩어지고 모이는 기의 흐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의 전수가 아니었다. 옥패에 깃들어 있던 선인의 기억과 한(恨)이 혁련무의 정신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과거 무상신공을 완성하고 천하를 이롭게 하려 했던 선인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구원하려 했던 세상 사람들의 탐욕에 배신당해, 온몸의 맥이 끊긴 채 차가운 동굴 속에서 쓸쓸히 홀로 소멸해 가야 했다. 배신의 고통, 억울함, 그리고 세상 모든 인연을 향한 깊은 원망과 고독이 혁련무의 전신 혈도를 타고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끄윽……!"

혁련무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듯한 고통이었다. 선인이 느꼈던 말로의 비극이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마음을 닫고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던 혁련무의 심상에 심마의 그물망, 심마의 범박이 사정없이 옥죄어 왔다. 이대로 힘의 폭주에 휘말려 자멸할 것인가, 아니면 이 고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질 것인가.

그때, 품 안에서 느껴지는 설아란의 온기가 그의 차디찬 심장을 두드렸다.

그녀는 고통으로 몸을 떠는 혁련무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차갑게 얼어붙어 가던 그의 육신에 전해지는 그녀의 미열은, 마치 엄동설한의 눈밭에 피어난 한 송이 매화처럼 애틋하고도 강인했다. 타인의 상처를 읽어내는 그녀의 섬세한 영혼이 혁련무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 하고 있었다.

'이 온기를…… 잃을 수 없다.'

혁련무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퇴전의 수호 본능이 마침내 눈을 떴다. 과거 의형제들의 배신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타인을 냉소했던 그였지만, 매일 밤 자신의 문앞에 따뜻한 누룽지탕을 두고 가던 그녀의 온기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강호의 풍랑이 이 고요한 벽향객주를 박살 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 차디차고도 따뜻한 아이를,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사장대의 군화 아래 짓밟히게 둘 수는 없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혁련무가 나직하게 읊조리자, 그의 전신을 옥죄던 심마의 독기가 기적처럼 설아란의 온기에 녹아내렸다. 동시에 옥패에서 흘러나온 무상신공의 정수가 천계의 인과 장부와 완벽하게 동화되며, 그의 단전에 소용돌이치던 내력을 온전히 그의 주권 아래 두게 만들었다. 천일선단의 숨겨진 잠재력이 100% 개화하는 순간이었다.

파아앗!

혁련무의 눈동자가 깊고 그윽한 백색의 안광으로 채워졌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더 이상 거칠고 투박한 무부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흐름을 간파하고 지배하는 선가의 독특한 무상신공이었다.

그는 천천히 설아란을 품에서 놓아주고, 성큼성큼 객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짝이 날아간 객주의 정문 너머로, 밤하늘을 가득 메운 시커먼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사장대 무인들의 검날이 보였다.

"쏘아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사장대의 전위 대장이 외치는 악에 받친 명령과 함께, 다시 한번 천여 발이 넘는 불화살과 화포 철환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벽향객주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산야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혁련무는 그 엄청난 파괴의 폭풍을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향해 가볍게 밀어냈다.

단 한 번의 손짓이었다.

징-!

순간적으로 객주 앞뜰의 모든 대기가 정지했다.

시간이 멈춘 듯,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던 천여 발의 불화살과 시뻘겋게 달아오른 화포 철환들이 혁련무의 손끝에서 시작된 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혀 허공에 그대로 정지했다.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으나, 단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바람조차 멈추어 선 기이한 침묵이 대지를 지배했다.

사장대 무인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한 광경이었다.

"이, 이게 무슨……!"

혁련무는 차가운 눈빛으로 적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이 가볍게 튕겨 나갔다. 무상신공의 신성이 담긴 내력이 멈춰 있던 화살과 철환들에 깃들었다.

"너희가 뿌린 씨앗이다. 스스로 거두어가라."

콰아아아앙!

혁련무의 거대한 장풍이 대기를 밀어내자, 허공에 정지해 있던 천여 발의 불화살과 철환들이 왔던 방향보다 열 배는 빠른 속도로 되날아갔다. 밤하늘을 가르는 붉은 유성우의 역류였다.

"으아아악!"

" 피해라! 회피해라!"

비명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사장대의 전위 부대가 위치한 숲과 언덕이 일시에 폭발했다. 자신들이 쏘아 올린 화포 철환과 불화살이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쏟아지며, 사방에서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처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 한 번의 반격으로, 벽향객주를 빈틈없이 포위하고 있던 무림맹의 정예 전위 부대 수백 명이 일사천리로 초토화되었다. 대지는 붉은 불길과 자욱한 먼지로 뒤덮였고, 기세등등하던 살기는 순식간에 공포와 절망의 신음으로 바뀌었다.

허공을 가득 채웠던 화약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처참한 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남은 사장대 무인들은 이빨을 마주치며 뒤로 물러섰고, 그들의 중심에 서 있던 사장대 총관의 얼굴은 극도의 공포와 분노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괴물…… 괴물 같은 놈!"

총관은 자신의 전위 부대가 단 일격에 괴멸당한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대로 패배하여 돌아간다면 맹주의 가혹한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의 손이 품속으로 다급하게 움직였다.

"내 비록 여기서 죽을지언정, 너희 놈들만은 길동무로 삼겠다!"

총관이 품안에서 꺼내 든 것은 검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가죽 주머니들이었다. 그것은 무림맹 내에서도 제조와 사용이 엄격히 금지된 자독 소혼향(紫毒 燒魂香)이었다. 마주하는 모든 생명체의 혼백을 녹이고 전신을 부패시키는 최악의 금단 이독(異毒)이었다.

"다 같이 죽자!"

총관이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주머니들을 허공으로 세차게 던졌다.

콰직!

공중에서 터진 주머니들로부터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보랏빛 독안개가 폭발하듯 비산하여 벽향객주와 혁련무가 서 있는 사방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개가 닿는 바닥의 풀과 나무들이 순식간에 검게 타들어가며 녹아내리는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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