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위지량의 처절한 외침이 한밤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무릎으로 꺾어버린 백염보검의 반 토막 난 검자루에서 흑백의 광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가문의 비전 무공을 역행시켜 제 생명력을 통째로 불태우는 동귀어진의 극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백색의 화염과 검은 귀기가 뒤섞여, 뒤뜰의 대지는 순식간에 아비지옥의 묵시록처럼 일그러졌다.

"혁련무!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위지량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쇄도했다. 그가 딛고 선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흙먼지가 용솟음쳤다. 단 한 치의 퇴로도, 살고자 하는 미련도 없는 파멸의 검세였다.

혁련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폭발하는 광류가 고스란히 비쳤다.

두근.

그 순간, 혁련무의 가슴 깊은 곳에서 천계의 인과 장부가 붉은 낙인처럼 요동쳤다. 머릿속으로 백양선사의 한 맺힌 절규와 가문의 파멸을 지켜보아야 했던 옛 선인의 비극적인 기억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영혼의 밑바닥을 송두리째 찢어발기는 듯한 극심한 조열(燥熱)과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으흑……."

혁련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샜다. 기연의 대가는 언제나 가혹했다. 위지 가문의 비장한 인과를 마주하는 순간, 장부에 기록된 채무의 무게가 그의 기맥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마음을 닫고 고립을 자처하려 할수록, 선인의 영혼 계율은 그에게 타인의 슬픔을 강제로 주입하며 온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이대로 저 검세를 힘으로 찍어 누른다면, 위지량은 물론이요 혁련무 자신 또한 심마의 범박에 걸려 기맥이 산산조각 날 터였다.

'살기를 지우고, 흐름을 읽는다.'

혁련무는 눈을 감았다. 천일선단의 웅혼한 진기가 전신 48혈을 타고 연기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 흐름을 간파하는 장부의 혜안이 그의 심안을 밝혔다. 위지량이 펼치는 파괴적인 역천의 검로, 그 거칠고 날카로운 광류 사이로 단 한 줄기, 고요하게 비어 있는 무(無)의 틈새가 보였다.

스스슥.

혁련무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것은 싸우고자 하는 자의 보법이 아니었다. 세속의 모든 은원과 투쟁을 내려놓은 자의 평화로운 발걸음이었다.

위지량의 반 토막 난 검이 혁련무의 옷자락을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살을 깎아낼 듯한 검풍이 몰아쳤으나, 혁련무의 신형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처럼 그 맹렬한 궤적을 유연하게 흘려보냈다.

"무엇을……!"

위지량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찰나, 혁련무의 오른손이 무욕의 진동을 머금은 채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의 손바닥 끝은 거칠거나 빠르지 않았다. 마치 아침 안개를 헤치고 피어나는 연꽃처럼, 지극히 우아하고 고요하게 위지량의 이마를 향해 뻗어 나갔다.

소리 없는 진동이 대기에 번졌다.

스윽.

혁련무의 손가락 끝이 위지량의 인당혈에 가볍게 닿았다. 그 순간, 위지량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흑백의 파괴적인 광류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폭포처럼 요동치던 진기가 한순간에 정화되어 대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위지량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붉은 핏발이 가라앉고, 끝없는 피로와 허탈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자살적인 기세로 신검합일을 이루려던 그의 모든 내력이, 혁련무의 단 한 번의 무욕의 타격에 의해 완벽하게 해체된 것이다.

위지량의 무릎이 꺾였다. 그의 신형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 혁련무는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받아 안아 바닥에 뉘었다. 위지량은 이미 깊은 혼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

뒤뜰에는 오직 고요한 바람만이 불어왔다. 혁련무는 하얗게 질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선인의 기연을 사용한 대가로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피비린내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어리석은 놈."

혁련무는 쓰러진 위지량을 향해 차갑게 읊조렸다. 타인과 얽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건만, 강호의 은원은 언제나 잔혹한 사슬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객주의 지지 기둥 옆을 지나칠 때였다. 어둠 속에서 스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옥빛 도포를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서진이었다.

"훌륭한 무혼이군, 혁련 형. 살기 없는 손길로 동귀어진의 신검을 잠재우다니. 내 천하를 돌며 수많은 고수를 보았으나, 이토록 무욕에 가까운 경지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소."

백서진은 들고 있던 허름한 술병을 흔들며 기둥에 기대어 섰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능글맞은 농담조와 달리 지극히 가라앉아 있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이곳은 객주니, 술을 마시려거든 안으로 들어가라."

혁련무가 가슴을 거머쥐며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백서진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으로 들기에는 밤공기가 너무 탁하군. 혁련 형, 장부의 무게가 자네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소? 기연이란 달콤한 꿀이 아니라, 과거의 원념이 빽빽이 적힌 붉은 채무서제."

혁련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백서진은 이 모든 인과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자네가 삼킨 천일선단의 독기는 결국 자네의 심마를 폭발시킬 것이오. 특히 저 어둠 속에서 기어 다니는 쥐새끼들…… 갈운태의 무리가 객주의 밑동을 갉아먹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위험하지."

백서진은 기둥 하단, 검게 썩어 들어가는 틈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미세한 흑황 독가루의 냄새와 함께 객주를 수호하던 무형의 기운이 지반에서부터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갈운태는 기연의 순수한 정수를 취하기 위해서라면 산 자의 가죽도 벗길 자요. 그가 보낸 자들이 이미 이 객주의 뿌리를 썩히고 있소. 인과율을 더럽히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지."

백서진이 술병을 허리춤에 차고는, 혁련무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기이한 모양으로 얽히며 허공에 보이지 않는 궤적을 그렸다.

"내 자네에게 재미있는 구절 하나를 들려주지. 귀담아듣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게요."

백서진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천수역류(天水逆流), 신혈전치(神血轉置). 하늘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고, 신성의 피가 자리를 바꾸니, 벼락의 노여움을 내 가슴에 담아 적의 뼈를 사르리라."

혁련무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냐."

"천수결(天水決)의 역천 구절이외다. 고통을 회피하는 방편이 아니니, 훗날 하늘이 자네에게 노여운 벼락을 내릴 때, 그 이물질 같은 천뢰를 받아내어 오직 적의 마성만을 타격하는 비장수가 될 것이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머지않아 이 구절이 자네의 목숨줄을 쥐게 될 터."

백서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강물에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흔적이 없었다.

혁련무는 백서진이 남긴 구절을 곱씹으며 가슴의 통증을 억눌렀다.

'천수역류, 신혈전치…….'

원치 않는 인연과 비급의 구절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혁련무는 쓰러진 위지량을 들쳐 업고 객주 안방으로 향했다.

***

객주 안방의 공기는 따뜻한 누룽지 탕의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방 한구석에서 설아란이 다급히 약상자를 챙겨 들고 다가왔다. 그녀의 목에 걸린 파손된 옥패가 은은한 청색의 빛무리를 뿜어내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옥패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온기가 방 안의 탁한 공기를 정화하듯 설아란의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무상 형님! 괜찮으신가요? 밖의 기운이 너무 흉흉해서……."

설아란의 맑은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혁련무가 업고 들어온 위지량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위지량의 전신은 역천의 공능으로 인해 혈도가 뒤틀려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지 않는다. 내력이 엉켰을 뿐이다."

혁련무는 위지량을 이부자리에 눕히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란, 약상자에 있는 자하고(紫霞膏)를 가져와라. 그리고 저 녀석의 가슴에 바르고 뒤틀린 기맥을 짚어주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설아란은 서둘러 연고를 꺼내 위지량의 가슴팍에 정성스레 바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위지량의 몸에 손을 댈 때마다, 그녀의 목에 걸린 파손된 옥패가 더욱 강하게 반응했다. 옥패에서 흘러나온 청색의 빛이 설아란의 손끝을 타고 위지량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음…… 으윽……."

위지량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천장의 낡은 목조 대들보와, 자신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설아란의 얼굴이었다.

"정신이 드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기맥이 다 자리 잡지 못했어요."

설아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지량의 귓가를 울렸다. 위지량은 제 손을 움직이려 했으나, 전신이 솜처럼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 내 검은 어디 있는가. 가문은…… 동생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위지량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을 꺾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연을 빼앗으려 했건만, 결국 패배했다. 이제 가문을 기다리는 것은 무림맹 사장대의 무자비한 도살뿐이었다. 절망감이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울지 마세요. 무상 형님이 당신을 살려주셨어요. 형님은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셔도, 절대 사람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실 분이 아니에요."

설아란이 위지량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 순간, 위지량은 자신의 체내에서 흘러 다니는 기이한 온기를 느꼈다. 그것은 설아란의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이기도 했고, 혁련무가 자신의 이마를 짚었을 때 남겨둔 아주 미세하고도 평화로운 내력이었다.

그 온기는 위지량이 평생 동안 가문을 지키기 위해 짊어져 왔던 차갑고 무거운 책임감과 두려움을 부드럽게 녹여내고 있었다.

'이것이…… 힘의 본질인가.'

무자비한 살기와 강압으로 가득 찬 무림맹의 무공과는 전혀 다른, 대지와도 같은 포용력과 평화. 위지량은 혁련무가 자신을 제압할 때 왜 살기를 품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혁련무는 방 한구석에 팔짱을 낀 채 서서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위지량과 설아란이 접촉하며 빚어내는 온기가 방 안에 퍼지자, 혁련무의 가슴을 옥죄던 심마의 독기가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타인의 온기를 수용하고 인연을 맺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계의 인과 장부가 내린 저주이자, 동시에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혁련무는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지는 못했으나, 이 기묘한 온기가 주는 안도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위지량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혁련무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나를 살려둔 것이냐. 나를 죽이고 후환을 없애는 것이 강호의 이치가 아니더냐."

혁련무는 차가운 눈빛으로 위지량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강호가 아니라 객주다. 내 객주에서 손님이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을 뿐이다. 그리고 네 가문의 은원은 네 스스로 해결해라. 남의 힘을 빌려 구걸하려 하지 말고."

"하지만 사장대는…… 그들은 괴물이다. 멸문지화를 막을 길이 없다……."

위지량의 눈가에 다시금 절망의 이슬이 맺혔다. 강인하던 무사가 가문의 운명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설아란이 위지량의 손을 꼭 쥐었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무상 형님도 도우실 거고요. 그렇지요, 형님?"

설아란이 혁련무를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혁련무는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지지해주며 새로운 기운의 온기를 간접적으로 체득해가던, 지극히 평화롭고도 애틋한 찰나였다.

쿵.

갑작스러운 진동이 객주 바닥을 울렸다.

쿵. 쿵. 쿵.

그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명의 무인이 일사불란하게 대지를 딛으며 다가오는 불길하고도 묵직한 군화 소리였다.

창문 종이가 미세하게 떨리고, 탁자 위의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살기가 벽향객주의 지붕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위지량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 소리는…… 사장대(司掌隊)다. 그들이…… 벌써 당도했다!"

객주 외부의 사방 대지에서 들려오는 군화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그리고 세차게 진동해 왔다.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무림맹 정예 사장대의 서슬 퍼런 살기가 객주 전체를 포위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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