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갈라진 안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등 뒤에 거대한 백염 보검을 메고 무시무시한 눈빛을 한 위지량이 걸어 나온다.

사방을 메우던 짙은 안개가 그의 발걸음이 지나는 자리마다 서리처럼 얼어붙었다가, 이내 붉은 열기에 녹아내려 가느다란 수증기로 흩어졌다. 음양의 기운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기괴한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가문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스스로 사냥개의 굴레를 쓴 사내, 위지량의 눈동자에는 오직 생사를 가벼이 여기는 야수의 흉광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혁련무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를 응시했다. 시골 객주의 뒤뜰, 방금 전까지 사장대의 사냥개들이 서로를 도륙했던 피비린내 나는 참상 위로 밤이슬보다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어이 끝을 보러 왔는가."

혁련무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숲의 서늘한 서걱임 같은 음성이었다.

위지량은 대답 대신 제 등에 메여 있던 거대한 백염보검의 자루를 거머쥐었다. 검을 뽑는 찰나, 철커덕하는 쇳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검신이 드러나자마자 사방 삼십 보의 대지가 차디찬 백색의 화염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차갑지만 살을 태우는 형질의 괴이한 진기였다.

"내게는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윈 없다."

위지량의 입술 사이로 서리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멸문지화의 벼랑 끝에 선 가문을 홀로 짊어진 자의 가혹한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천일선단의 정수. 그것이 없다면 내 동생들은 물론, 위지 가문의 가솔 백여 명의 목숨이 사장대의 손에 도륙당할 것이다. 네놈이 아무리 은거한 고수라 한들, 내 앞길을 막아선다면 이 검으로 베어 넘길 수밖에 없다."

위지량이 검 끝을 천천히 들어 혁련무의 미간을 겨누었다.

"원망하려무나. 이것이 강호의 이치요, 힘없는 자가 치러야 할 업보이니라."

위지량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검기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사납게 요동쳤다. 그의 발밑에 흩어져 있던 낙엽들이 순식간에 백색 불꽃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스으으읍.

위지량이 깊게 숨을 들이켜는 순간, 그의 형체가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단순한 신법이 아니었다. 보법의 박자와 동조하는 기의 흐름을 지워버리는 수호검세(守護劍勢)의 극의였다.

단 일 평의 공간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사방에서 백색의 불길이 회오리치며 혁련무의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대기를 태우는 열기와 뼈를 얼리는 한기가 동시에 오감을 난도질하는 형국이었다.

혁련무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 장부의 글귀가 어렴풋이 명멸했다.

'천일선단(天一仙丹)의 채무, 백양선사(白陽仙師)의 혈채(血債)가 공명한다.'

동시에 골든핑거의 이능이 혁련무의 뇌해를 두드렸다. 상대의 무공 흐름이, 백염보검의 궤적이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선명하게 갈래갈래 찢어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막강한 힘의 대가는 즉시 영혼을 옥죄어 왔다.

끄으윽.

혁련무의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과거 백양선사가 제자들의 배신으로 만인에게 손가락질당하며 가슴에 칼을 꽂히던 그 비극적인 고통과 한이, 혁련무의 심장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숨이 턱 막히고 피가 역류할 것 같은 주화입마의 전조였다. 마음을 닫고 세상을 조소하려 할 때마다 장부는 이 혹독한 채무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고통의 심연 속에서, 혁련무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위지량의 눈빛을 보았다.

그것은 광기 어린 침략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타인의 것을 빼앗아 제 배를 불리려는 탐욕의 눈빛 또한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은 꺼져가는 가문의 불씨를 지키기 위해, 제 온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려는 처절한 횃불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동생들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무림맹 사장대의 사냥개가 되기를 자처한 사내의, 찢어질 대로 찢어진 영혼의 비명이었다.

'이 자 역시…… 나처럼 버림받고 쫓기는 가련한 짐승에 불과하군.'

그 순간, 혁련무의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냉소의 벽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일평생 타인과의 인연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그였으나, 가문의 무게를 지고 사지로 뛰어든 이 처절한 적수에게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연민이 싹트자, 기이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심마의 독기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장부의 인과 장벽이 한 꺼풀 벗겨지며, 막혔던 진기가 대하처럼 혈도를 따라 도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선인의 무상한 고통을 중화시키는 유일한 열쇠는, 다름 아닌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연민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하찮은 굴레에 얽매여 춤을 추는 꼴이라니."

혁련무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손은 여전히 허리춤의 검자루에 닿지 않았다.

위지량의 백염보검이 마침내 혁련무의 목덜미를 베어 가기 직전, 혁련무는 검을 뽑는 대신 발밑에 떨어져 있던 마른 대나무 껍질 하나를 가볍게 밟아 올렸다.

툭.

허공으로 떠오른 것은 한 자 남짓한 허름한 대나무 껍질이었다.

위지량의 안색이 변했다. 자신은 평생을 연마한 가문의 비전 신공과 백염보검의 위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거늘, 상대는 단 한 자루의 쇠붙이조차 손에 쥐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오만을 넘어선 모욕이었다.

"감히 나를 멸시하는구나!"

위지량의 포효와 함께 백색의 검강이 대나무 껍질을 향해 쏟아졌다. 공간이 번쩍이며 열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혁련무의 손끝이 대나무 껍질의 끝을 가볍게 퉁기는 순간, 천지의 기운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천계의 인과 장부가 일러준 우주의 흐름, 기의 매듭이 대나무 껍질을 통해 실현되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마른 죽피(竹皮)가 혁련무의 웅혼한 내공을 머금는 순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예리한 신병기보다 더 무서운 기운을 뿜어냈다.

쉬이익!

대나무 껍질이 허공에 호를 그리며 위지량이 전개한 백염검세의 가장 취약한 혈(穴)을 짚어 들어갔다. 그것은 기의 흐름이 시작되고 끝나는 찰나의 틈새였다.

지 지 직!

마치 달구어진 쇠가 얼음물에 닿는 듯한 괴이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위지량의 압도적인 백색 검강이, 단 한 조각의 마른 대나무 껍질과 부딪히는 순간 사방으로 산산이 비산했다. 억센 파도처럼 밀려들던 백염의 기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직 서늘한 죽향(竹香)만이 뒤뜰의 안개를 깨끗하게 쓸어냈다.

"커헉!"

위지량의 전신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백염보검은 혁련무의 미간에서 단 세 치를 남겨두고 완전히 멈춰 서 있었다. 검 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혁련무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쥐고 있는 마른 대나무 껍질이었다.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천하를 오시하던 위지 가문의 비전 초식을 정면에서 완벽하게 파쇄한 것이다. 힘의 격차가, 경지의 높낮이가 손바닥을 뒤집듯 명백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위지량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입술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것이…… 은거고수의 무공이란 말인가……."

한편, 이 장절한 격돌이 벌어지던 객주 뒤뜰의 음침한 구석, 짙은 어둠이 깔린 목조 지지 기둥 밑바닥에서는 또 다른 음모가 소리 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사천당문 출신의 고수이자, 기연의 냄새를 맡고 독사처럼 암약하던 갈운태의 심복 배일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혁련무와 위지량의 대치에 쏠려 있는 듯했으나, 손끝은 이미 객주의 가장 원천적인 지반 기둥 하단을 향해 있었다.

"어리석은 무리들. 서로 치고받으며 힘을 빼는 동안, 이 객주는 우리의 손바닥 안에서 무너지게 될 터."

배일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품속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것은 사천당문에서도 극비리에 전해 내려오는 기문 파쇄의 극독, 흑황(黑黃) 가루였다. 이 가루는 단순한 인체용 독이 아니었다. 목조 건물의 지지 기둥과 지반에 침투하여 신비한 기문 방어막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부식시키고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배일혁은 소리 없이 바닥을 기어 객주 대들보를 떠받치는 거대한 목조 기둥 밑바닥에 도달했다. 그는 주저 없이 흑황 독가루 주머니를 기둥 하단의 틈새 깊숙이 무자비하게 쑤셔 박았다.

치이이익.

기둥의 밑동이 보이지 않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벽향객주를 수호하던 무형의 진법과 방어막의 근간이, 가장 원천적인 부분에서부터 소리 없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 순간, 객주 안방에서 밤새 불을 밝히고 누룽지를 끓이던 설아란의 목에 걸린 파손된 옥패가 기이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파르르.

옥패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청색의 빛무리와 온기가 설아란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감쌌다. 설아란은 가슴을 쥐며 창밖의 뒤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불길한 기운과 함께, 혁련무가 처한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위기의 그림자가 비쳤다. 과거 선인의 무상신공 공명 유산인 이 옥패는, 객주의 진법이 훼손되는 그 미세한 균열을 귀신같이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뒤뜰의 대치는 극점에 달해 있었다.

위지량은 제 손에 쥐어진 백염보검을 내려다보았다. 가문을 구하기 위해, 동생들의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사냥개가 되었건만, 눈앞의 사내에게는 검을 뽑게 만들지도 못했다.

절망이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가문은 멸문할 것이고, 동생들은 사장대의 칼날 아래 목이 잘려 효수될 터였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위지량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백색의 화염이 순간적으로 칠흑 같은 흑색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문의 비전 무공을 역행하여 생명력을 순식간에 불태우는 금忌의 초식이었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내 혼백 따위는 마귀에게 넘겨주겠다!"

위지량은 광오하게 외치며, 제 손에 쥔 거대한 백염보검을 자신의 왼쪽 무릎 위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쩌어어어엉!

명검 백염보검이 그의 무릎에서 두 동강으로 부러져 나갔다.

부러진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파괴적인 백색과 흑색의 광류가 위지량의 전신 혈도를 타고 흐르며, 주변의 대지를 밑바닥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기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안에 깃든 모든 영기와 평생의 진기를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위지 가문 최후의 비보(秘寶)이자 동귀어진의 극의였다.

"혁련무!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반 토막 난 검자루를 거머쥔 위지량의 신형이, 피를 흘리며 혁련무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했다. 파괴적인 광류가 객주의 뒤뜰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듯 폭발하는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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