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구겨진 서찰의 가장자리가 밤바람에 파르르 떨렸다. 조장의 터진 가슴팍에서 흘러나온 선혈은 붉은 보장령의 종이를 검게 오염시켰다. 위지 가문의 존망을 저울질하는 무림맹 사장대의 강압, 그리고 그 아래 절박하게 찍힌 손톱자국. 혁련무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이 마치 불에 달군 철판처럼 뜨거웠다.

그의 망막을 스치며 이글거리는 문자들이 허공에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천계의 인과 장부 - 붉은 장부의 인장] [대상: 위지 가문(尉遲家門)] [업보: 억울하게 몰락한 선인 '백양선사'의 생전 원념이 깃든 혈채(血債).] [경고: 기한 내에 위지 가문의 은원을 해소하지 못할 시, 천일선단(天一仙丹)의 극독이 심맥을 역류하여 전신 전혈을 불태우리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가 치밀어 올랐다.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은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 리 밖 먼 옛날,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만인의 손가락질 속에 참수당했던 선인의 비참한 임종의 순간이었다. 잘려 나간 목에서 뿜어지는 피의 비린내가 후각을 마비시키고, 억울함에 울부짖는 군중의 함성이 고막을 찢었다.

혁련무는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검은 피를 간신히 삼켰다.

"이것이…… 기연의 대가란 말인가."

천일선단을 삼켜 얻은 웅혼한 내공은 양날의 검이었다. 장부에 새겨진 인과의 사슬을 풀어내지 않는 한, 그가 소유한 힘은 언제든 그의 목을 꺾어버릴 저주로 변할 터였다. 위지 가문의 피눈물을 외면하는 순간, 그의 체내에 잠든 선단의 독력은 기상을 터뜨려 전신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공자!"

곁에서 푸른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설아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혁련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자마자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바닥에 흩어진 약초 더미를 향해 있었다. 자객들과의 격투로 난장판이 된 바닥에서, 그녀는 귀한 설란초의 이파리를 다급하게 골라냈다.

"숨을 크게 쉬셔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설아란은 작은 돌멩이를 주워 약초를 거칠게 짓이기기 시작했다. 초조함에 그녀의 하얀 손가락끝이 흙먼지와 푸른 약즙으로 더러워졌다. 짓이겨진 약초에서는 쌉싸름하면서도 머리를 맑게 하는 독특한 향취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혁련무의 앞으로 다가섰다. 차갑게 굳어버린 혁련무의 겉옷을 밀쳐내고, 단단하게 굳은 그의 가슴팍에 짓이긴 약초를 은밀하고도 강하게 밀착시켰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순간, 차가운 약초의 기운과 함께 그녀의 체온이 혁련무의 살결을 타고 스며들었다.

"흐읍……!"

혁련무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지혈이나 해독의 과정이 아니었다. 설아란의 온기가 닿는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던 선인의 비참한 단말마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얼어붙어 가던 심장이 다시금 규칙적인 고동을 시작했다. 온몸의 모공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지극한 염려와 연민이 장부의 가혹한 계율을 일시적으로 중화시키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혁련무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차마 힘을 싣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설아란은 오히려 그의 가슴에 닿은 손에 힘을 주며, 제 뺨을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그녀의 가쁜 호흡이 혁련무의 쇄골 부근에 닿아 흩어졌다.

"쓸데없는 짓이라 하셔도 좋습니다. 공자가 눈앞에서 부서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미움을 받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혁련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타인과의 인연을 맺는 것을 맹렬히 거부해 온 그였다. 과거 의형제들의 배신은 그의 마음에 깊은 흉터를 남겼고, 그 누구도 믿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살이 닿는 온기는 그의 차가운 불신마저 녹여버릴 만큼 집요하고 따뜻했다.

가슴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사방을 둘러싼 공기가 기이하게 무거워졌다.

스스스스.

풀잎이 비벼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산자락 밑바닥에서부터 번져온 짙은 안개가 벽향객주의 뒤뜰을 소리 없이 잠식해 들어왔다. 단순한 자연의 안개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미세한 살기와 함께 인위적으로 조절된 진법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왔군."

혁련무가 차가운 안광을 발하며 섰다.

무림맹 사장대의 하급 정찰 부대. 그들은 조장의 신호가 끊어지자 즉시 객주를 포위하고 살진(殺陣)을 전개한 것이다. 짙은 안개 속에서 사방을 울리는 발소리가 사방팔방에서 겹쳐 들렸다. 적들의 수는 대략 스무 명. 그들은 객주 주변의 수풀을 이용해 일격에 숨통을 끊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이 안개 속에서 중심을 잃고 각개격파당했을 터였다. 하지만 혁련무의 눈은 달랐다.

스스릉.

그의 뇌해 속에서 천계의 인과 장부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장부는 단순히 한과 채무만을 기록하는 서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에너지 흐름을 읽고, 주변 공간의 기하학적 구조를 완벽하게 간파하는 절대적인 신물이었다.

[기문둔갑(奇門遁甲) - 무영사생진(無影死生陣) 분석 완료] [안개의 흐름과 지형의 왜곡을 역이용할 수 있는 방위 확인.] [동북방 생문(生門)을 사문(死門)으로 전환하며, 서남방의 기운을 전치한다.]

혁련무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쥐새끼들이 안개 뒤에 숨어 춤을 추는구나."

그는 설아란을 자신의 등 뒤로 가볍게 밀어내고는 오른발을 들어 지면을 강하게 내리밟았다.

쿵!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내력이 땅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지반 밑바닥에 흐르는 수맥과 안개의 흐름이 혁련무의 발끝에서 시작된 파동에 의해 급격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공간의 왜곡이었다. 객주 주변의 기문 둔갑 지형이 장부의 정보대로 완벽하게 재편되었다.

안개 속에서 은밀하게 좁혀오던 사장대 무인들의 눈빛이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라? 이 방향이 아닌데?" "뒤다! 뒤에서 적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들이 전개했던 살진의 방위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동쪽에서 다가오던 자는 서쪽에서 오는 동료의 기척을 적으로 오인했고, 서쪽에서 매복하던 자는 남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죽어라!"

챙강! 챙! 콰아앙!

안개 속에서 처절한 쇠붙이의 마찰음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혁련무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뒤뜰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손가락을 퉁기며 안개의 흐름을 미세하게 조율할 뿐이었다.

사장대의 하급 무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안구 속에서 서로를 적으로 착각한 채 미친 듯이 칼부림을 벌였다. 자중지란이었다. 짙은 안개는 그들의 시야를 완벽히 차단했고, 뒤틀린 공간감은 그들의 감각을 난도질했다.

"커헉! 너, 너는 장 형이……!" "이 끄나풀 녀석, 감히 배신을!"

서로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 사냥개들의 비참한 참상이 숲속 곳곳에서 연출되었다. 붉은 선혈이 안개 속에서 안개꽃처럼 흩뿌려졌다.

단 일 초의 직접적인 격돌도 없이, 사장대의 정찰 부대는 스스로의 손으로 서로를 도륙해 나갔다. 무영의 살진 지형을 완벽하게 지배한 혁련무의 압도적인 지력 전투였다.

차갑게 불타오르던 살기가 점차 가라앉고, 안개 속의 비명 소리도 하나둘씩 끊겨갔다. 바닥에는 스스로의 칼에 찔려 쓰러진 사장대 무인들의 시신만이 즐비했다.

혁련무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손을 내렸다. 단숨에 전황을 뒤엎은 통쾌한 승리였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장부의 경고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위지 가문의 혈채를 풀지 않는 한, 이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스으으으으.

사방을 메우고 있던 짙은 안개가 기이한 힘에 이끌리듯 한곳으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 속에서, 안개의 장막이 양 갈래로 갈라졌다.

안개 너머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대지를 울리는 듯한 기파를 담고 있었다.

혁련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갈라진 안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내의 등 뒤에는 거대한 백염(白炎)의 보검이 메여 있었고, 그의 전신에서는 서리발 같은 한기와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공존하는 기괴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사내의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잃고 오직 복수만을 남겨둔 야수의 그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위지 가문의 후계자이자, 가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사냥개가 된 사내.

위지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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