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아란이 손을 떼자마자 객주의 출입문을 향해 무림맹 사장대의 무장 자객 조장들이 어둠을 뚫고 난입한다.
목조 문짝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흩날리는 파편들이 매서운 풍압을 몰고 왔다. 부서진 나뭇조각 하나가 설아란의 뺨을 스치기 직전, 혁련무가 소매를 가볍게 휘둘렀다. 웅혼한 내력이 장막처럼 펼쳐지며 흩날리던 파편들을 일시에 바닥으로 침묵시켰다. 자욱한 먼지 구덩이 너머로 검은 무복을 입은 자들의 살기등등한 안광이 번뜩였다.
"천일선단의 기운이 이곳에서 멈추었다. 감히 맹의 소유를 가로챈 도적이 누구인가 했더니, 일개 시골 객주의 주방데기였단 말이냐."
선두에 선 자가 차가운 쇠소리를 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붉은 사장대의 표식이 어둠 속에서 핏빛으로 일렁였다.
혁련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가슴속 단전에서 방금 전 타통된 사십팔 처 대혈을 타고 끓어오르는 기운은 태산보다 무거웠으나, 동시에 뇌리를 찌르는 기이한 감각이 뇌수를 헤집었다. 천계의 인과 장부가 그의 영혼에 각인되며 보낸 첫 번째 경고였다. 머릿속이 뿌연 안개로 가득 차며, 과거 어느 이름 없는 선인이 천계의 법도를 어기고 안개 무공을 연마하다가 온몸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던 비극적인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숨이 턱 막히고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환각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것이…… 장부의 채무인가.'
타인의 비극을 고스란히 제 육신으로 받아내는 대가. 마음을 닫고 세상을 거부하려 할수록 가슴골을 파고드는 심마의 쐐기가 더욱 깊숙이 박혀 들었다. 혁련무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물러서라, 아란."
"하지만 공자, 몸이 아직……!"
"귀찮게 굴지 말고 뒤로 가 있어라."
혁련무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그의 시선은 설아란의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비스듬히 비껴 서 있었다.
자객 조장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좌우에 늘어선 네 명의 자객이 일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검날이 어둠 속에서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혁련무의 전신 대혈을 겨누어 왔다. 사장대 특유의 살상 검진인 사혼참검(司魂斬劍)이었다.
그러나 혁련무의 개화된 안목에는 그들의 유려한 합격술이 조잡한 낙서처럼 비쳤다. 우주의 흐름을 읽는 장부의 힘이 자객들의 초식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틈새를 붉은 실선처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혁련무의 신형이 흐트러졌다. 아니, 흐트러진 것처럼 보였다.
스스스슥.
그의 신형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객주 내부가 푸른 안개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장부에서 전수된 선인의 비급, 운무미종보(雲霧迷踪步)였다. 실체가 없는 연기처럼 번지는 그의 움직임에 자객들의 검날은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어디를 보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냐."
목소리는 자객들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 이 자가 언제……!"
경악한 자객이 황급히 검을 뒤로 휘둘렀으나 이미 늦었다. 혁련무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오직 보법의 기류만으로 그들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렸다. 자객들은 제풀에 겨워 서로의 검날에 부딪쳐 피를 뿜거나, 객주의 단단한 돌기둥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단 한 번의 직접적인 타격도 없이 사장대의 정예 무인 넷이 바닥을 뒹굴며 신음했다.
자객 조장의 안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그는 가문의 존망을 걸고 기연을 회수하라는 맹의 엄명을 받은 자였다. 여기서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차 없는 숙청뿐이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무림맹의 권위를 우습게 보지 마라!"
조장이 포효하며 대지 점토를 부수듯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참마도가 검은 마기를 뿜어내며 혁련무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객주의 들보가 들썩이고 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공할 위력이었다.
혁련무는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객주 한구석에 놓인 낡은 목조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그의 태도는 강호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무림맹의 권위를 통째로 비웃는 일종의 조롱이었다.
"무림맹이 언제부터 사냥개의 목줄을 이리 느슨하게 풀었는지 모르겠군."
참마도의 칼날이 코앞까지 박두한 찰나, 혁련무가 천천히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키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조장의 거대한 참마도 날이 혁련무의 엄지발가락 끝에 정확히 맞닿았다.
어마어마한 내력이 실린 참마도였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발가락은커녕 다리 전체가 고기다짐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혁련무의 발가락 끝에 응집된 천일선단의 웅혼한 진기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태산의 벽과 같았다.
콰어어억!
이빨이 시릴 정도의 쇠붙이 마찰음이 일더니, 조장의 참마도 중심부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조장의 눈동자가 공포로 팽창했다.
철그렁!
거대한 참마도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천하를 호령한다는 사장대 조장의 병기가 한낱 은거고수의 발가락 하나에 가차 없이 동강 난 것이다. 조장은 그 반동으로 수십 걸음을 뒤로 밀려나며 붉은 선혈을 허공에 뿌렸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살점이 찢겨나가 뼈가 드러나 있었다.
"이것이 맹이 자랑하는 무공의 전부인가? 가소롭군."
혁련무의 서늘한 음성이 무너진 객주 내부에 무겁게 내리앉았다.
그러나 승리의 통쾌함도 잠시, 부서져 나간 참마도의 예리한 쇳조각 중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뒤편에 서 있던 설아란을 향해 날아갔다.
"아란!"
혁련무가 손을 뻗으려 했으나, 순간적으로 심장을 조여 드는 장부의 대가가 발목을 잡았다. 아까 전 사용한 운무미종보의 반동으로 전신의 혈도가 얼어붙는 듯한 빙한의 고통이 그를 덮친 탓이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쇳조각이 설아란의 가슴팍을 꿰뚫기 직전,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절반쯤 파손되어 빛을 잃었던 낡은 옥패가 스스로 반응했다.
웅-!
쇳조각이 옥패의 표면에 닿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음 대신 은은한 종소리가 객주 안을 채웠다. 옥패의 깨진 단면에서 미약하지만 지극히 순수한 주황색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날아들던 쇳조각을 가루로 만들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시에 혁련무의 단전 속에 잠들어 있던 천계의 인과 장부가 광포하게 요동쳤다. 장부의 책장들이 제멋대로 넘어가며 황금빛 글씨들이 뇌리에 박혀 들었다.
[ 무상(無常)의 인연이 공명한다. ] [ 잃어버린 선인의 유산이 맥박치니, 장부의 제약이 일시적으로 완화된다. ]
그것은 과거 등선했던 위대한 선인이 남긴 무상신공(無上神功)의 잔재였다. 설아란이 지닌 낡은 옥패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천계의 기운과 공명하는 신비로운 매개체임을 장부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명의 충격은 혁련무에게 또 다른 과부하를 가져왔다. 웅혼한 내력이 혈도를 역류하며 그의 전신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부동(不動)의 지체 상태. 심마의 범박이 그의 혼백을 옭아매며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선사했다.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자객 조장이 품에서 독이 발려진 비수를 꺼내 들며 최후의 발악을 감행했다.
"죽어라, 역적 놈!"
조장의 신형이 굳어 버린 혁련무의 가슴을 향해 살을 에는 기세로 쏘아져 들어왔다.
혁련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력을 억지로 끌어올리려 할수록 심마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대로라면 주화입마에 빠져 온몸의 혈도가 터져 죽을 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길이 혁련무의 굳어버린 오른손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설아란이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르르 떨면서도, 결코 혁련무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혁련무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했다.
"공자, 혼자가 아니에요. 제발…… 자신을 가두지 마세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혁련무의 손등을 타고 빠르게 타고 올라왔다.
스르릉.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온기가 닿는 순간, 전신을 옭아매던 한빙의 심마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장부에 기록된 선인들의 원념이 설아란의 순수한 연민과 접촉하며 일시적으로 정화된 것이다. 얼어붙었던 혈도가 봄눈 녹듯 풀리며 웅혼한 내공이 다시 한번 전신을 세차게 회전했다.
지체 상태가 해결된 혁련무의 눈에 신광이 번뜩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조장의 비수를 향해 왼손을 가볍게 뻗었다.
툭.
바람을 가르는 듯한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조장의 손목을 정확히 격타했다.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수가 바닥에 떨어졌고, 혁련무의 묵직한 장풍이 조장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콰앙!
조장의 신형이 객주 벽면을 뚫고 마당 한구석으로 날아가 처참하게 처박혔다. 그는 구토하듯 검붉은 피를 쏟아내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밤공기가 다시 고요해졌다. 부서진 객주 내부에는 거친 호흡 소리와 은은한 옥패의 향취만이 감돌았다.
혁련무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설아란은 여전히 그의 손가락을 꼭 쥔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여전히 그의 심장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손을 빼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손이 참 쓸데없이 따뜻하군. 덕분에 살았다는 말은 기대하지 마라."
"후후, 기대도 안 했어요. 그저 공자가 무사하시면 그걸로 족해요."
설아란은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옷자락을 정돈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에 걸린 옥패는 방금 전의 공명으로 인해 아주 미세한 주황색 실금이 가 있었다.
혁련무는 쓰러진 자객 조장을 향해 걸어갔다. 생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조장의 상태를 살피던 혁련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장의 품속에서 핏자국으로 얼룩진 가죽 주머니가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펼친 혁련무의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머니 안에서 나온 것은 무림맹 사장대의 비밀 보장령(保障令)이었다. 그러나 그 위에 적힌 글귀와 붉은 낙인은, 혁련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위지 가문(尉遲家門)의 가주 위지백과 그 혈육의 목숨을 보장하는 대가로, 천일선단 회수를 명함. 불이행 시 멸문(滅門). ]
서찰의 하단에는 거친 핏자국과 함께, 누군가 절박하게 손톱으로 눌러 쓴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위지량(尉遲亮).'
가문을 구하기 위해 무림맹의 사냥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처절한 업보의 이름이었다.
혁련무의 손아귀에서 서찰이 구겨졌다. 새로운 인과의 사슬이 그의 목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