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약(丹藥)은 붉었다. 붉다 못해 검푸른 혈색을 띠고 있었으며,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대기를 일그러뜨리는 기이한 열기를 뿜어냈다.
벽향객주(碧香客酒)의 깊은 뒤뜰,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독방 안에서 혁련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과거의 비린내 나는 피안개와 의형제들의 가증스러운 배신을 뒤로하고 이 궁벽한 산골짜기 요리사로 은거한 지 수년이었다. 강호의 모든 은원과 부질없는 명리를 잊고자 했으나, 운명은 그를 고요 속에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우연히 구해준 천년의 영물이 남기고 간 존재, 천일선단(天日仙丹)이 지금 그의 손바닥 위에서 맥박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혁련무는 단약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꿀꺽, 목울대를 넘어가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찰나가 지나자마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해일이 치솟았다.
"……윽!"
낮은 신음이 백발의 무인, 혁련무의 입술 사이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왔다.
단전이 펄펄 끓는 용융(鎔融)의 도가니로 변했다. 들이켠 선약의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장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파아앗!
암전된 방 안에서 기이한 붉은 광채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혁련무의 살갗 위로 혈관을 따라 붉은빛의 글씨들이 돋아났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우주의 근원적인 인과(因果)를 기록하는 천계의 언어, 바로 '천계의 인과 장부'가 그의 육신을 도화지 삼아 스스로를 각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슴팍에서 시작된 붉은 문장들은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뺨을 가로질렀고, 이내 양팔과 다리, 전신의 기경팔맥을 덮어 나갔다. 허공에 붉은 먹 향기가 진동했다.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혁련무의 뇌리에는 수만 권에 달하는 거대한 장부가 한 장씩 무자비하게 펼쳐지는 광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천지의 흐름이 보였다. 바람의 궤적, 대지의 미세한 진동, 그리고 방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의 낙하 궤도까지 모든 우주의 에너지가 한눈에 간파되었다. 상대의 무공을 단박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전무후무한 신선들의 지혜가 그의 영혼에 강제로 주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권능의 이면에는 벼랑 끝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었다.
- 어찌하여 나를 배신하였느냐! - 내 평생을 바쳐 쌓은 공력을 이리 탈취하다니, 천벌을 면치 못하리라! - 가문이 멸망하는 것을 보며 눈을 감는 이 한을 누가 풀어줄 것인가!
귀를 찢는 듯한 비명과 통곡이 혁련무의 고막을 넘어 영혼의 밑바닥까지 뒤흔들었다. 천일선단에 깃든 기운은 순수한 영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등선의 경지에 오르고자 했으나 끝내 좌절하고, 혹은 동료에게 배신당해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던 고대 선인들의 미해결된 원념(怨念)이자 부채였다.
그들이 죽어 가며 느꼈던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심장이 뽑혀 나가는 듯한 배신의 절망감이 혁련무의 신경망을 타고 그대로 전이되었다.
"아아악……!"
혁련무는 바닥을 구르며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신에서 핏방울이 땀처럼 배어 나와 흰 무복을 붉게 적셨다. 기경팔맥을 가득 채운 선단의 진기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저주, 심마의 범박(凡縛)이 시작된 것이다. 인과의 그물망이 그의 영혼을 옭아매고 뼈마디를 부수려 들었다.
마음을 닫고 타인과의 인연을 거부해 온 혁련무의 냉소적인 심성은 이 범박을 더욱 단단하게 죄는 촉매가 되었다. 고립을 자처하는 그의 영혼은 선인들의 슬픔과 동조하지 못한 채 거부 반응을 일으켰고, 그 결과 체내의 기는 미친 듯이 역류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단전이 파열되어 온몸의 혈도가 먼지처럼 사라질 판국이었다.
정수리에서 피어오르는 백색의 수증기가 붉은 혈무로 변해 가던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낡은 목조 여닫이문이 조용히 열렸다.
"혁련 공자?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어머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객주의 점소이, 설아란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따뜻한 숭늉이 담긴 대접을 들고 오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발작하는 혁련무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접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고, 따뜻한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공자! 정신 차리세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아란은 망설임 없이 바닥으로 뛰어들었다. 혁련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보통 사람이 다가가기만 해도 살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전신에 돋아난 붉은 글씨들이 기괴하게 일렁이며 주변의 공기를 왜곡시키고 있었다.
평범한 이라면 두려움에 질려 도망쳤을 터였다. 그러나 설아란은 달랐다. 타인의 상처와 미열을 귀신같이 읽어내는 그녀의 섬세하고 따뜻한 영혼은, 지금 혁련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단순한 신체적 발작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것은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억눌린 원망이 만들어 낸 지독한 불길이었다.
"다가오지…… 마라……! 죽는다……!"
혁련무가 피를 토하며 거칠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타인을 향한 거부감과 동시에, 자신 때문에 그녀가 다칠지 모른다는 가느다란 염려가 섞여 있었다.
설아란은 그의 매몰찬 경고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서 하얗고 깨끗한 수건을 꺼내 곁에 엎질러진 차가운 물에 적셨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다가가 혁련무의 이마 위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모서리가 살짝 깨진 이색적인 형상의 옥패가 짤랑거리며 흔들렸다. 그 파손된 옥패에서 미세하고도 청아한 공명이 흘러나왔으나, 고통에 울부짖는 방 안의 소음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다.
쉬이익!
물이 닿는 순간, 뜨거운 가마솥에 찬물을 부은 듯 자욱한 김이 피어올랐다. 설아란은 뜨거운 열기에 손끝이 붉게 익어 가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럽고 단호한 손길로 혁련무의 다친 이마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제가 여기 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과 같았다.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를 가두었던 냉혹한 무인의 가슴속으로, 한 줄기 따스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설아란의 손길이 닿자마자, 혁련무의 기경팔맥을 사슬처럼 죄어오던 심마의 범박이 연기처럼 스러지기 시작했다. 전신을 태울 듯 타오르던 고열이 급격히 내려앉았고, 살갗 위에 돋아났던 붉은 천계의 글씨들이 피부 밑으로 깊숙이 침잠했다.
선인들의 비명은 점차 잦아들어 아득한 메아리가 되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온전히 정제된 천일선단의 진기였다.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 세속적인 인연의 수용만이 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선인의 영혼 계율'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거부하던 마음의 빗장이 아주 미세하게 열리자, 장부의 채무는 거대한 축복으로 전환되었다.
우우웅!
혁련무의 단전이 세차게 진동했다.
체내에 쌓여 있던 해묵은 찌꺼기들이 모공을 통해 검은 진액의 형태로 배출되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스스로 맞춰지며 더 단단하고 유연한 골격으로 재구성되었고, 막혀 있던 전신의 사십팔 처 대혈이 일시에 타통(打通)되었다.
환골탈태(換骨脫胎).
기연을 삼키고도 심마에 빠져 자멸하던 강호의 어리석은 고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혼의 계약과 인과의 수용을 통해 이루어낸 완벽한 성취였다. 그의 내공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웅혼해졌으며, 우주의 흐름을 읽는 안목은 더욱 예리해졌다.
혁련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찰나의 순간 동안 푸른 안개가 스쳐 지나갔다.
"공자…… 이제 좀 괜찮으신 건가요?"
설아란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 끝은 열기로 인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혁련무는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낯선 감정을 억누르며, 차가운 눈빛을 복구하려 애썼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으나, 시선은 그녀의 붉어진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츤데레 같은 그의 성정은 고마움을 고맙다 말하지 못하고 은근한 짜증으로 포장했다. 그는 품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내 바닥에 툭 던져 놓았다.
"바르도록 해라. 흉터가 남으면 객주 손님들이 상한 음식을 판다고 오해할 테니까."
"치,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요."
설아란은 생글생글 웃으며 약병을 집어 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없던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객주의 앞마당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불길한 살기가 들이닥쳤다.
콰아아앙!
객주의 견고한 목조 출입문이 거대한 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휘날렸다.
"이곳이 틀림없다. 천일선단의 기운이 방금 이 근처에서 강하게 진동했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자들은 검은 무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무림맹의 상징과 함께, 기연을 추적하고 회수하는 악명 높은 비밀 부대, '사장대(司掌隊)'의 표식이 붉게 새겨져 있었다.
살기를 뿜어내며 난입한 자객 조장들이 혁련무의 독방을 향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서늘한 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