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뢰(天雷)의 위력을 몸 전체로 완전히 흡수하자, 혁련무의 두 안광이 장부의 한의 연기로 빨갛게 터져나가며 주화입마에 직면한다. 뇌락(雷落)의 잔재가 전신의 기혈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잔혹한 고통이 골수를 타고 흘렀다. 단전은 이미 끓어오르는 용암의 도가니와 다름없었고, 백회혈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천계의 기운은 갈 곳을 잃은 채 폭주하는 맹수처럼 광란했다. 핏물이 안구의 모세혈관을 뚫고 흘러내려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귓가에는 우레 같은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으며, 가슴팍에서 요동치는 인과의 장부는 그 무거운 채무의 무게를 들이밀며 그의 영혼을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사방은 무너진 벽향객주의 잔해로 가득했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찌르고, 무너진 들보 아래로 붉은 피가 번져 나갔다. 이독(貽毒)에 중독되어 쓰러진 위지량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헐떡이고 있었다. 천수결(天水決)의 역천 구절이 머릿속에서 도돌이표처럼 맴돌았으나, 이미 제어력을 잃은 진기는 몸 안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검이 되어 날뛰었다.
그 순간, 혁련무의 눈앞에 지옥의 정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장부에 새겨진 선인들의 원념이자,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도사린 가장 끔찍한 기억의 환상이었다. 검붉은 핏빛 영혼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과거, 사선을 함께 넘나들며 생사를 맹세했던 의형제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고골(枯骨)의 형상으로 변해 일제히 울부짖었다.
“네가 우리를 배신했다, 혁련무!” “홀로 은거하여 평온을 누리다니, 가당치 않다. 이 피의 빚을 어찌 갚을 셈이냐!”
환청이 뇌리를 난도질했다. 환각 속에서 쏟아지는 검붉은 창검의 비가 그의 가슴을 꿰뚫는 듯한 통증이 실재했다. 이성을 상실한 혁련무의 입에서 야수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닥쳐라! 내 어찌 너희를……!”
허공을 향해 혁련무의 주먹이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자멸적인 무공이었다. 천뢰의 광포한 기운과 장부의 마기가 융합된 검붉은 안개 진기가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대지가 움푹 패였고, 휘두르는 손끝에서 뿜어진 격돌의 파장이 허공을 찢었다. 허공을 향해 쏟아내는 독문 무공은 그 어떤 적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생명력과 기혈을 불태워 소멸을 자초하는 광란의 난무에 불과했다. 주변의 잔해들이 그 가공할 진풍(震風)에 밀려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쿠구구구구!
객주의 목조 지지 기둥들이 비명 같은 파열음을 내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때, 미쳐 날뛰는 시야의 한구석으로 붕괴하는 기둥의 밑바닥이 들어왔다. 그을린 목재의 단면 아래로 시커멓게 썩어 들어간 흑황색의 흔적이 선명했다.
‘흑황분(黑黃粉).’
인과의 장부가 그의 뇌리에 강렬한 정보를 새겨 넣었다. 이 객주가 천뢰 한 방에 이토록 허무하게 지반부터 무너져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갈운태의 부하가 은밀히 객주의 가장 깊은 목조 지지 기둥 밑바닥에 특수한 흑황 가루를 침투시켜 두었던 것이다. 기문방어막의 원천적 지반을 안에서부터 갉아먹어 무너뜨린 간계. 그 뒤안길의 행적이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순간, 혁련무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은거처가 이미 오래전부터 적들의 손아귀에서 유린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뼈저린 무력감을 느꼈다.
그 무력감은 다시금 심마의 불길을 지폈다.
“으아아아악!”
전신이 검붉은 안개에 휩싸여 타들어 가던 그때, 하늘에서 황금빛 소용돌이를 그리며 떠오르던 설아란의 신형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천계의 안광이 그녀를 제물로 삼으려던 찰나, 그녀의 가슴팍에 걸려 있던 파손된 옥패가 극렬한 백색의 광채를 토해내며 천계의 인력을 강제로 차단한 덕분이었다.
먼지 자욱한 바닥으로 떨어진 설아란은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광기에 휩싸여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는 혁련무였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혁련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기는 닿는 모든 생명체를 태워 죽일 듯한 극렬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 안개 진기에 스치기만 해도 살결이 타들어 가고 뼈가 녹아내릴 기세였다. 그러나 설아란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파멸의 영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치이이익!
그녀의 고운 옷자락이 진기에 닿아 타들어 가고, 하얀 살결에 붉은 화상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극심한 고통에 신음이 샐 법도 하건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직 혁련무를 향한 깊은 연민과 단호함만이 서려 있었다.
“무 고수님……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혁련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온기를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의 이성은 이미 심마의 심연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설아란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와, 타오르는 진기의 장막을 뚫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작고 가냘픈 손이 혁련무의 피투성이가 된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혁련무의 안광이 경악으로 흔들리는 그 찰나의 순간, 설아란은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강하게 밀착했다.
화(火)와 빙(氷)의 충돌이었다. 혁련무의 체내에서 날뛰던 광포한 열기가 그녀의 입술을 통해 흘러들었고, 동시에 설아란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극음(極陰)의 청량한 기운이 혁련무의 식도를 타고 단전으로 역류했다.
우웅웅웅!
그 순간, 설아란의 목에 걸려 있던 파손된 옥패가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과거 등선했던 선인이 남긴 고고한 무공, 무상신공(無相神功)의 공명 유산이었다. 반쪽짜리 옥패에서 흘러나온 백색의 신성한 기운이 혁련무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설아란의 살신정화(殺身淨化)를 통한 영적 접촉과 옥패의 공명이 시작되자, 혁련무의 단전 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던 천뢰의 전류가 순식간에 진정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가시 같던 기운들이 둥글게 다듬어지며, 장부의 붉은 원념을 씻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의 벌을 스스로의 명과 바꾸어 전치할 때…….’
백서진이 전했던 천수결의 역천 구절이 비로소 그의 뇌리에서 올바른 궤적을 찾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동귀어진의 초식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매개로 하되, 천계의 이물질인 뇌전을 무공의 그릇으로 온전히 받아들여, 오직 상대의 마성(魔性)만을 찾아가 타격하게 만드는 고도의 전치(轉置) 비법이었다.
가장 위험한 폭주의 임계점에서, 타인을 구하고자 하는 설아란의 헌신과 온기가 그의 닫힌 마음을 마침내 두드려 깨웠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던 냉소의 벽이 허물어지고, 오직 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이타적인 갈망이 그의 영혼을 채웠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혁련무의 의식이 끝없는 허공을 지나 우주의 근원에 닿았다. 천계의 인과 장부가 황금빛으로 빛나며 채무의 사슬을 스스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의 위기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의 단전에 머물던 천뢰의 전류는 완벽하게 정제된 무상(無相)의 진기로 화했다.
태허경(太虛境).
무인들이 평생을 갈구해도 닿지 못하는 초월의 경지가, 오직 타인을 향한 지극한 연민과 구원의 마음을 통해 혁련무의 전신에 개현된 것이다. 그의 두 눈에서 붉은 피의 광기가 걷히고, 맑고 깊은 태허의 안광이 서리쳤다.
“훌륭하구나. 실로 눈물겨운 광경이로다.”
환상 너머, 붕괴된 객주의 잔해 위로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았다. 검은 도포를 번뜩이며, 한 사내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벽향객주의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갈운태였다.
그의 주위로 사천 혈도인들의 잔당들이 기괴한 마기를 뿜어내며 호위하고 있었다. 갈운태의 눈동자는 기연의 정수를 향한 탐욕과 집착으로 번들거렸다.
“천지인(天地人)의 기운이 한곳에 모여 이토록 기묘한 과실을 맺을 줄이야. 혁련무, 네놈이 삼킨 천일선단과 천계의 장부, 그리고 그 계율의 열매까지 모조리 내 것이 될 운명이었구나.”
갈운태는 혁련무가 이룩한 태허경의 경지를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폭주 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가련한 패자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마성 어린 도가 검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대지를 잠식해 들어왔다.
혁련무는 조용히 설아란을 자신의 등 뒤로 안착시켰다. 그의 전신에서는 더 이상 광포한 기운이 풍기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무공도 익히지 않은 범인처럼,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한 기운만이 감돌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만물이 무(無)로 돌아가는 태허의 경지였다.
“갈운태.”
혁련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네놈이 탐하는 장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하하! 감당이라니? 이 세상의 모든 인과를 말살하고 불사의 육체를 얻을 힘이다! 그것을 눈앞에 두고 감당을 논하다니, 역시 초야의 요리사 놈다운 발상이로군!”
갈운태가 도를 치켜들었다. 그의 도 끝에서 뿜어진 거대한 검은 마치가 폭풍처럼 혁련무를 향해 쇄도했다. 사천 혈도인들의 마성 무기들이 일제히 공명하며 대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혁련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가볍게 휘저었다.
스으윽.
그것은 초식이라 부를 수도 없는 지극히 단순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손끝이 닿는 순간, 갈운태가 펼쳐놓은 마성과 독무가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분해되기 시작했다. 백서진의 전치 비법과 태허경의 무상진기가 결합된 결과였다.
파지직! 파직!
혁련무의 체내에 정제되어 있던 천계의 뇌전이 그의 손끝을 타고 역류했다. 갈운태의 마성 무기에만 전류를 타격시키는 비장수가 마침내 발현된 것이다. 허공을 가르던 검은 마치가 황금빛 뇌전에 휩싸여 순식간에 소멸했다.
“무, 무슨……?!”
갈운태의 안광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뇌전의 줄기는 갈운태의 마기를 타고 역류하여, 그를 호위하던 사천 혈도인들의 가슴팍을 정확히 관통했다.
쾅! 쾅! 쾅!
단 한 번의 일격이었다. 어떠한 살기도, 어떠한 거창한 초식의 명칭도 없었다. 오직 하늘의 벌을 전치시킨 무상의 뇌격만이 사천 혈도인들을 단숨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갈운태가 자랑하던 마장 기문이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격상 반격이었다. 기연의 가치를 조롱하며 세상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적들을 향한, 천계와 인간의 인과가 내린 준엄한 심판이었다.
갈운태는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그의 검은 도포가 뇌전에 타들어 가 갈가리 찢어졌다. 도를 잡은 손이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만 끝내자, 갈운태.”
혁련무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손끝에 다시 한번 황금빛 뇌전이 응축되며, 갈운태의 숨통을 끊어놓을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갈운태의 마장 기문의 핵심을 파괴하기 위해 그의 신형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바로 그 위급한 수세의 찰나였다.
갈운태의 입꼬리가 해괴하게 뒤틀렸다. 비참하게 밀려나던 그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주술의 빛이 서렸다.
“내가 순순히 죽어줄 것 같더냐!”
갈운태가 품 속에서 붉은 부적을 꺼내 들어 찢어발겼다.
스산한 혈무(血霧)가 대지에서 솟구치더니, 혁련무가 아닌 그의 등 뒤에 쓰러져 있던 설아란을 향해 뻗어 나갔다. 설아란의 몸을 정화하느라 기력이 쇠한 옥패는 미처 그 기습적인 주술을 막아내지 못했다.
“아앗!”
설아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붉은 혈무의 사슬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올렸다.
혁련무의 신형이 급격히 방향을 틀었으나, 이미 갈운태는 도약하고 있었다. 주술의 인력에 이끌려 설아란의 가냘픈 신형이 갈운태의 손아귀를 향해 허공으로 낚아채여 올라갔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간다! 네놈이 가진 천계의 장부를 내 앞에 바치지 않는 한, 이 년의 살점은 매일 한 점씩 떨어져 나갈 것이다!”
갈운태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먹구름 낀 하늘을 울렸다. 설아란을 거머쥔 갈운태가 어둠 속으로 도약하여 사라지려는 찰나, 혁련무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거대한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