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정말 확실한 겁니까?"
어둠이 내린 연회장 뒤편, 비상구의 눅눅한 공기 사이로 강승준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며 나왔다. 기둥 뒤에 바짝 붙은 윤서는 힐을 신은 발끝에 힘을 주며 숨을 죽였다. 주머니 속 볼펜을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럼요. 피부에 붙이기만 하면 30분 이내로 미열과 함께 가벼운 몽롱함을 유발하는 특수 약물 패치입니다. 겉보기에는 일반 수분 패치나 화장품 패치처럼 보여서 절대 의심받지 않습니다. 검출도 안 되고요."
상대방의 음산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윤서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강승준이 건네받은 화장품형 패치는 강태무를 대외적으로 망가뜨리기 위한 비열한 무기였다. 이사회와 바이어 계약에서 연거푸 참패한 승준이 이제는 비즈니스가 아닌 물리적이고 추잡한 음모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윤서는 어둠 속에서 승준의 실루엣이 멀어지는 것을 스캔하듯 눈에 담았다.
'패치 하나로 태무 씨를 무너뜨리시겠다? 대가리가 꽃밭이거나, 아니면 우리 본부장님 체력을 너무 얕보셨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지.'
윤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승준의 비열한 수작은 여기서 끝이 아닐 터였다.
***
사흘 뒤.
MJ 그룹 TF 기획실이 사활을 걸고 준비한 '글로벌 친환경 패션·뷰티 브랜드 런칭 쇼' 당일 아침이 밝았다. 행사장 대기실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사방에서 무대 스태프들이 뛰어다녔고, 행거에 걸린 실크 드레스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윤서는 완벽하게 다려진 슬랙스 슈트 차림으로 태무의 프레젠테이션 대본을 태블릿으로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그때, 대기실 한구석에서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던 10년 지기 찐친이자 마케팅 담당 한소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야, 오윤서비서님. 얼굴에 '나 지금 예민보스 대마왕이다'라고 쓰여 있거든? 릴랙스 좀 하시지? 에스프레소 투 샷이라도 들이부어 줄까?"
"소희야, 지금 커피가 문제냐. 강승준이 사흘 전 연회장에서 정체불명의 패치를 받아 간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오늘 무대 위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윤서가 태블릿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이자, 소희가 질색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참나, 대기업 상무씩이나 처먹고 하는 짓은 무슨 90년대 삼류 드라마 악당이냐? 거의 생화학 테러리스트 수준이네. 근데 태무 본부장님은 알아?"
"알면 가만히 계시겠어? 직접 승준의 목덜미를 잡고 짤짤 흔들겠지. 대외적 프레임 지키려면 조용히 판을 짜서 밟아버려야 해."
윤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동시에 머릿속 한편에서 불길한 경고음이 울렸다. 성북동 저택 거실 스탠드 밑에 숨겨져 있던 초소형 도청기. 승준의 첩자가 심어둔 그 도청기를 윤서는 아직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정보의 함정으로 쓰기 위해 놔두었지만, 그 도청기를 통해 승준이 태무의 또 다른 치명적인 약점을 캐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태무의 약점.
그것은 바로 극심한 '벌독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였다. 아주 미량의 벌독 성분만 몸에 닿거나 흡입해도 기도가 부어올라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알레르기. 이는 태무의 극비 의료 정보로, 오직 비서실의 윤서와 차 실장 정도만 공유하고 있는 일급비밀이었다.
"어머, 본부장님! 오늘 메인 컵셉이 '야생화와 허브'잖아요. 무대 오르기 전에 목을 축이실 특별 웰컴 드링크를 준비했습니다."
대기실 문이 열리며 낯선 보조 스태프 한 명이 은반지 위에 황금빛 탄산음료가 담긴 크리스탈 잔을 들고 들어왔다.
순간 윤서의 촉이 찌릿하게 반응했다.
스태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뒤편 복도 모퉁이에서 손을 비비며 교활하게 웃고 있는 강승준의 실루엣이 유리에 비쳤다.
윤서는 본능적으로 음료가 담긴 잔으로 시선을 던졌다. 겉보기에는 상큼한 옐로 컬러의 탄산음료였지만, 코끝을 스치는 인공적인 아카시아 향 뒤로 미세하게 톡 쏘는 독특한 비린내가 풍겼다.
'벌독 추출물(멜리틴)...!'
윤서의 뇌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승준은 약물 패치뿐만 아니라, 태무를 확실하게 요단강 건너게 만들 치명적인 액상 벌독 음료를 준비한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전 세계 바이어들이 보는 가운데 태무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게 만들려는 극악무도한 음모였다.
"본부장님, 한 모금 마시고 올라가시죠. 긴장 풀기에 딱 좋습니다."
스태프가 태무에게 잔을 내밀었다. 태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크리스탈 잔바닥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안 돼!"
윤서의 몸이 이성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어머, 본부장님!"
윤서는 일부러 대리석 바닥에 굽이 걸린 척 다리를 꼬며 태무의 품 안으로 요란하게 쓰러지듯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녀의 날카로운 손끝이 태무가 잡으려던 크리스탈 잔을 사정없이 쳐냈다.
쨍그랑!!!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크리스탈 잔이 바닥에 처참하게 박살 났다. 황금빛 탄산음료가 사방으로 튀며 대리석 바닥을 볼품없이 적셨다. 웰컴 드링크의 달콤하면서도 기괴한 향이 공기 중으로 확 퍼져 나갔다.
대기실 안의 모든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오 비서?"
태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그의 완벽한 슈트 소맷자락과 손등에 음료 방울들이 튀어 있었다.
윤서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품에서 고급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태무의 단단한 손등과 손목을 움켜잡고 거칠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제가 그만 발이 꼬여서...!"
피부와 피부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찌릿한 전류와 함께, 윤서의 머릿속으로 태무의 가장 날것의 목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오윤서...! 왜 이렇게 덤벙대지? 아니, 방금 내 손을 잡은 건가? 손끝이 왜 이렇게 뜨거워. 설마 나 대신 저 음료를 마시려고 했던 건가? 저 필사적인 표정, 나를 지키려는 여전사 같잖아. 나 대신 위험을 자처하다니... 다칠까 봐 두려워. 오윤서 없는 내 삶은 이제 상상만 해도 지옥이야. 제발 다치지 마, 내 완벽한 아내여...]
태무의 심음 속에는 전율에 가까운 집착과 소심한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윤서에게는 태무의 절절한 속마음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3, 2, 1' 빨간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심장을 사정없이 옥죄어 오는 극심한 통증. 숨이 턱 막히며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강제 고백의 페널티가 그녀의 뇌를 장악했다.
말해야 한다. 내 진짜 속마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여기서 심장마비로 쓰러질 판이었다.
윤서는 질끈 눈을 감고, 대기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내가 대신 아플까 봐 걱정한 거야 이 눈물겨운 사랑꾼아! 사랑스럽긴 한데 나도 네 건강 챙기느라 수명 단축된다고! 이 지독한 완벽주의자야, 칠칠치 못하게 아무거나 마시지 좀 마!"
순간, 대기실은 도서관보다 더 고요해졌다.
차도현 실장은 들고 있던 결재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쉬었고, 한소희는 자판기 커피를 뿜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태무는 멍한 얼굴로 제 손등을 닦아주는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귀끝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오, 오 비서... 방금 뭐라고..."
"아니, 제 말은!"
윤서는 속마음의 페널티가 사라지자마자 팩트 폭격 모드로 전환했다. 그녀는 주머니 속 볼펜을 꺼내 들고 사정없이 '똑딱, 똑딱'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진 탄산음료를 가리켰다.
"이 음료 성분 분석표 확실합니까? 아카시아 허브 추출물이라고 속여서 천연 멜리틴 성분을 섞어 넣은 거 모를 줄 알았어요? 우리 본부장님 벌독 아나필락시스 심한 거 MJ 가문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떤 파충류 같은 지능을 가진 인간이 이걸 기획한 거죠?"
윤서의 시선이 대기실 문틈 너머로 도망치려던 강승준을 정밀 타격하듯 꽂혔다.
"강승준 상무님!"
윤서의 앙칼진 목소리에 승준이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멈췄다.
"어머, 상무님. 거기서 뭐 하세요? 사촌 동생 무대 올라가기 전에 벌독 음료 마시고 쓰러지는 꼴을 맨 앞줄에서 직관하시려고 팝콘이라도 준비하셨나 봐요?"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오 비서, 미쳤어?!"
승준이 삿대질을 하며 바르르 떨었지만, 이미 대기실 안의 모든 스태프와 경호원들의 시선은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윤서는 우아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아닌지는 이 음료 성분을 식약처에 정식 의뢰해 보면 알겠죠. 그리고 방금 이 음료를 가져온 스태프분, 상무님 개인 비서실에서 급하게 단기 알바로 꽂아 넣은 인력인 거 저희 비서실 데이터베이스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차 실장님, 맞죠?"
옆에 서 있던 차도현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태블릿을 치켜세우며 안경을 지켜올렸다.
"정확합니다. 해당 스태프는 3일 전 강승준 상무님 개인 법인 카드로 급여가 선지급된 이력이 확인되었습니다. 경찰 조사 시 아주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되겠군요."
"이, 이것들이 짜고 나를 모함해?!"
승준의 얼굴이 흙빛을 넘어 썩은 동태눈처럼 변해갔다. 손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깨무는 그의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윤서는 승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상무님, 비즈니스로 안 되니까 이제는 생화학 테러를 하십니까? 지능이 딱 파충류 수준이라 그런지, 하시는 수작도 참 원시적이고 눈물겹네요.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시면, 그 도청기 너머로 무슨 소리가 흘러나갈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승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도청기의 존재를 윤서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머리를 한 대 얻맞은 표정이었다. 승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대기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대기실 안에 통쾌한 정적이 감돌았다.
소희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고, 스태프들은 수군거리며 승준의 비열함에 혀를 내둘렀다. 윤서는 비서로서의 철두철미한 지식과 대담함으로 태무의 목숨을 구함과 동시에, 적을 완벽하게 격하시켜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
"오 비서."
태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윤서를 불렀다.
그의 눈빛은 아까 전 윤서가 내뱉은 "내가 대신 아플까 봐 걱정한 거야 이 눈물겨운 사랑꾼아!"라는 대사에 완벽히 꽂혀 있는 듯했다.
"방금 그 고백... 꽤 구체적이더군. 나 대신 아플까 봐 걱정을 했다니. 역시 오 비서는 나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된 건가?"
태무가 특유의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윤서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속으로는 쩔쩔매면서 겉으로는 완벽한 척 폼을 잡는 그의 엉뚱한 매력에 윤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본부장님, 착각은 자유지만 오해는 금물입니다. 저는 비서로서 계약 당사자의 신변을 보호했을 뿐입니다. 100억 받기 전에 계약자가 사망하면 곤란하니까요."
"흥, 핑계는 늘 완벽하군. 하지만 방금 내 손을 잡았을 때의 떨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태무가 제 손등을 매만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순간이었다.
대기실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정장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내 하나가 태무의 개인 소지품이 놓인 테이블 근처를 아주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윤서의 날카로운 눈길이 그의 깃카라에 달린 배지를 포착했다. 강승준의 라인인 기획 2팀의 대리였다.
'저 인간이 왜 여기에...?'
불길한 예감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올라왔다.
그 찰나, 윤서의 재킷 주머니 속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연이어 울리는 알림음에 윤서는 침을 삼키며 화면을 켰다. 포털 사이트와 SNS의 실시간 검색어 창이 붉은색 경고등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단독] MJ 그룹 후계자 강태무 본부장, 결혼은 100억짜리 연극? '쇼윈도 부부 계약서' 이면 합의문 원본 사진 유출!
기사 링크를 누르자마자 나타난 화면에는, 윤서와 태무가 성북동 저택 서재에서 서명했던 '100억 규모 쇼윈도 부부 계약서'의 이면 합의문 원본 파일 사진이 흐림 처리 하나 없이 선명하게 업로드되어 있었다.
윤서의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윤서의 떨리는 목소리에 태무의 미간이 차갑게 굳어졌다. 쇼윈도 계약의 파국을 알리는 서막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