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화면 위로 쏟아지는 백색광이 윤서의 눈동자 안에서 잘게 흔들렸다. 단독보도를 알리는 붉은색 타이틀 밑으로, 낯익은 필체와 도장이 찍힌 계약서 서류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100억 원이라는 구체적인 액수와 '대외적 부부 역할 수행'이라는 조항이 모자이크도 없이 박제되어 있었다. 대기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윤서의 코앞에서 거만한 미소를 짓던 태무의 얼굴등 가죽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오 비서, 이게 무슨……."
태무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윤서의 손가락이 화면을 거칠게 아래로 쓸어내렸다.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실시간 댓글의 숫자가 수천 개 단위로 치솟았다.
- 와, 대기업 본부장이 결혼도 계약으로 하네? 완전 대국민 사기극이잖아. - 100억짜리 비서라니, 신데렐라가 아니라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였네. MJ 그룹 주식 다 판다 진짜. - 어쩐지 너무 완벽하다 했어. 다 대본이었구먼.
댓글창은 이미 분노와 조롱으로 뒤덮인 아수라장이었다. 윤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굳어지는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100억은커녕, 평생 쌓아온 커리어마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윤서의 엄지손가락이 재킷 주머니 속 볼펜의 머리를 빠르게 똑딱였다.
똑딱, 똑딱, 똑딱.
규칙적인 마찰음이 밀폐된 대기실 안에 울려 퍼졌다. 뇌세포들이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태무의 눈동자가 윤서의 볼펜으로 향했다가, 이내 그녀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본부장님, 지금 당장 차 실장님 부르세요. 그리고 홍보팀에 엠바고 걸 수 있는 매체들 리스트 전부 확보하라고 지시하십시오."
"오 비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 합의서 원본 파일은 성북동 우리 저택 서재 금고와 내 개인 클라우드에만 보관되어 있었어. 보안이 뚫렸다는 뜻이야."
태무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당혹감보다 분노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완벽주의자가 자신의 보안 영역이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이빨을 사리물고 있었다.
"아닙니다. 보안이 뚫린 게 아니라, 애초에 그들이 집 안에서 구한 겁니다."
윤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매달렸다.
"무슨 소리지?"
"성북동 저택 거실, 기억나십니까? 본부장님이 기어코 들여놓아야겠다며 고집부리셨던 그 이탈리아산 대리석 조각상 말입니다."
"그게 왜?"
"그 조각상 밑바닥에, 강승준 상무의 첩자가 심어둔 초소형 도청 장치가 있었습니다. 입주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제가 청소하다가 발견했죠."
태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청기? 그걸 알고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당장 치웠어야 할 거 아냐!"
"치우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윤서는 볼펜 똑딱이질을 멈추고 태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도청기가 살아 있어야 저들이 안심하고 덫을 밟을 테니까요. 저는 그 도청기 앞에서 아주 주기적으로, 아주 그럴싸한 '가짜 일상'과 조작된 계약 관련 대화를 흘려 드렸습니다. 강승준 상무가 신나서 받아 적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윤서의 눈빛이 잔혹할 정도로 투명하게 빛났다.
"지금 저 기사에 올라온 합의문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 조항 중간중간에 교묘하게 가짜 조항들이 섞여 있습니다. '계약 만료 후 MJ 그룹 지분 일부를 오윤서에게 무상 증여한다'는 조항 같은 것 말입니다. 이건 진짜 계약서에 없는 내용입니다. 오직 제가 그 도청기 앞에서 일부러 흘렸던 가짜 시나리오에만 존재하던 조항이죠."
태무는 그제야 윤서의 의도를 파악한 듯 헛바웃음을 터뜨렸다.
"오 비서…… 너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군. 그러니까 저들이 터뜨린 게 진짜가 아니라, 네가 던져준 미끼를 가공한 조작본이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건가?"
"정확하십니다. 날조된 증거는 증거로서의 효력을 잃죠. 오히려 불법 도청과 해킹, 그리고 사문서위조라는 역풍을 직격타로 맞게 될 겁니다. 강승준 상무가 제 발로 지옥 불에 뛰어든 셈이죠."
윤서는 거침없이 휴대폰을 들어 10년 지기 찐친이자 미래의 사업 파트너인 한소희에게 전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세 번도 울리기 전에 소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수신기를 뚫고 나왔다.
- 야! 오윤서! 너 인터넷 봤어? 기사 터졌잖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너 100억 날아가는 거야? 내 CMO 자리도 날아가는 거냐고!
"소희야, 진정해. 자판기 커피 한 잔 때리면서 내 말 잘 들어."
윤서는 차분하고 명료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 당장 내가 메일로 보내주는 음성 파일 두 개를 네가 아는 가장 영향력 있는 IT 전문 기자랑 연예부 기자들한테 뿌려. 하나는 성북동 저택에서 수거한 도청기에서 송신된 신호 주파수 분석표고, 다른 하나는 강승준의 비서가 우리 집 담벼락 밑에서 신호를 수신하던 현장 파파라치 영상이야. 내가 차 실장님 통해서 미리 따둔 거니까."
- 대박…… 너 진짜 미친년이구나? 그걸 다 준비해 두고 있었다고?
"준비성 없는 비서는 살아남지 못해. 어서 움직여. 10분 뒤에 태무 씨랑 나, 생방송 해명 연단에 올라갈 거니까. 타이밍 맞춰서 터뜨려야 효과가 극대화돼."
- 오케이, 접수 완료! 강승준 그 자식, 오늘로 아주 매장해 버리자고!
전화를 끊은 윤서는 태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셨습니까, 본부장님? 이제 쇼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태무는 넥타이를 거칠게 고쳐 매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한 대가가 얼마나 처절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지."
***
MJ 그룹 본사 지하 1층 대강당.
기습적으로 마련된 기자회견장 안은 수백 명의 취재진이 내뿜는 열기와 카메라 플래시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강승준 상무가 기획한 폭로 기사 덕분에, 언론은 이미 태무와 윤서를 '대국민 사기극의 주연'으로 낙인찍은 상태였다.
단상 뒤편에서 대기하던 윤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이 정도의 압박감은 척수까지 저리게 만들었다.
그때, 큼지막하고 따뜻한 손이 윤서의 차가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태무의 손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윤서의 손을 꽉 쥐며 손가락을 조여 깎지를 꼈다.
두 사람의 피부가 밀착되는 순간, 윤서의 머릿속으로 지독할 정도로 선명하고 묵직한 태무의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 상황이 와도 널 지킬 거야. 여론 따위 다 가라앉히고 오직 너만 높이 띄울 거야. 네가 꿈꾸는 브랜드, 네가 원하는 독립, 내가 전부 지켜줄 테니까 내 뒤에 서 있어, 윤서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만한 본부장 가면에 가려져 있던, 가슴이 시릴 정도로 뜨겁고 단단한 그의 진심이 귓전을 때렸다.
하지만 감동할 시간은 단 3초뿐이었다.
초능력의 무자비한 페널티가 윤서의 목구멍을 옥죄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빠오고,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뱉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고통. 마이크는 이미 켜져 있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연단 앞으로 걸어 나가 마이크 바로 앞에 서 있었다.
3. 2. 1.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마이크를 움켜잡고, 터져 나오는 숨결과 함께 육성을 내뱉었다.
"거기서 나 지킨다고 쓸데없이 폼 잡지 마, 나도 너 생각에 미지근한 침실에서 매일 기절하니까!"
콰아아앙-!
강당 안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에 증발했다.
수백 명의 기자들이 들고 있던 노트북 자판 위의 손가락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메라 셔터 소리마저 뚝 끊겼다.
윤서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태무 역시 예상치 못한 고백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귀끝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생방송 중이었다. 전국으로 송출되는 화면 위로 윤서의 눈물 젖은 진심 어린 팩트 폭격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오윤서 비서님?"
한 기자가 멍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물었다.
윤서는 재빨리 포커페이스를 되찾으며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그녀의 완벽한 임기응변 능력이 빛을 발할 차례였다.
"방금 들으신 대로입니다. 저희는 계약 관계가 아닙니다. 매일 밤 서로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뜨거운 연인일 뿐입니다."
윤서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오늘 유출되었다고 주장하는 '계약서'는 명백한 날조이자 조작입니다. 저희의 사생활을 침해하기 위해 누군가 불법적으로 도청하고 해킹하여 짜깁기한 가짜 문서에 불과합니다. 그 증거를 지금 공개하겠습니다."
윤서가 손짓하자, 대강당 대형 스크린 위로 소희가 배포한 자료들이 일제히 떠올랐다.
성북동 저택 거실에 설치되어 있던 초소형 도청 장치의 정밀 사진, 그리고 강승준 상무의 비서가 해당 도청 장치로부터 신호를 수신하는 위치가 추적된 GPS 데이터와 현장 채증 영상이 차례로 화면을 채웠다.
기자석에서 거대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청이라니? 대기업 상무가 사촌 동생의 신혼집을 도청했다는 겁니까?"
"이건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조직적인 범죄 아닙니까!"
순식간에 여론의 방향타가 180도 꺾였다. '쇼윈도 부부'라는 의혹은 온데간데없고, '불법 도청의 피해자가 된 세기의 사랑꾼 부부'라는 극적인 프레임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 실시간 댓글창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 대박, 마이크 켜진 줄 모르고 본심 튀어나온 거 봐ㅋㅋㅋ "미지근한 침실에서 매일 기절하니까"라니, 멘트 미쳤다 진짜 찐사랑이네! - 강승준 저 쓰레기 새끼, 남의 신혼집 도청해서 가짜 계약서나 만들고 앉아있었냐? 소름 돋는다. - 강태무 눈빛 봐라, 자기 여자 지키겠다고 손 꼭 잡고 있는 거 개설렌다ㅠㅠㅠ 태무윤서 평생 가자!
***
같은 시각, MJ 그룹 본사 3층 이사회 회의실.
강승준은 대형 모니터로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을 보며 미친 사람처럼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교활하게 웃던 입꼬리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오윤서 저 비서 년이 어떻게 알고……!"
승준이 다급하게 자신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던 그 순간, 이사회 회의실의 무거운 목조 문이 거칠게 열렸다.
두꺼운 가죽 상의를 입은 경찰 특수수사본부 수사관 대여섯 명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주주들과 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강승준 상무님 되십니까."
선두에 선 팀장이 공무원증을 꺼내 보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및 정보통신망법 위반, 그리고 사문서위조 및 행사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봐요!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나 MJ 그룹 상무 강승준이야! 이거 놔!"
승준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건장한 수사관들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양팔이 뒤로 꺾였다. 차가운 수갑이 그의 손목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이사회장에 모인 주주들의 싸늘한 시선이 승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의 후계 구도는 물론, MJ 그룹에서의 생명은 오늘로 완전히 끝이 났다. 영구 퇴출이었다.
***
늦은 밤, 성북동 저택의 거실.
낮 동안의 폭풍 같은 소동이 지나간 자리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윤서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따뜻한 차를 들이켰다. 한소희에게서 '주가 폭등 중, 우리 브랜드 런칭 투자 문의 폭주!'라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을 넘어, 완벽한 승리를 거둔 하루였다.
그때, 서재에서 나온 태무가 윤서의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은색 리본이 묶인, 두껍고 무거운 양질의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아주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이었다.
"오 비서."
태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윤서를 불렀다.
"아니, 이제는 진짜 오윤서 씨라고 불러야겠군."
태무가 테이블 위에 그 두꺼운 서류 뭉치를 올려놓았다. 서류의 첫 페이지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MJ 패션 브랜드 'YS' 독점 런칭 및 지분 51% 양도 계약서]
그리고 그 밑에는 또 하나의 서류가 겹쳐져 있었다.
[종신 부부 공동 서약서]
윤서가 눈을 크게 뜨고 태무를 바라보자, 태무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윤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소유욕과 집착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100억짜리 가짜 결혼은 오늘로 끝내지. 이제 진짜 결혼을 시작할 차례야. 오윤서, 내 완벽한 아내가 되어 주겠어?"
은색 리본이 조용히 흔들리는 가운데, 태무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윤서의 턱밑까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