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래, 오늘 밤 당장 움직여!"

방화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강승준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날카롭게 긁히고 있었다. 이사회의 참패로 멘탈이 나간 게 분명했다.

"프랑스 L&P 바이어들 오늘 저녁 인천공항 도착하는 대로 납치하듯 중간에 가로채! 강태무 그 새끼 얼굴도 못 보게 만들고, 강원도 우리 쪽 리조트로 밀어 넣어버려. 계약만 우리가 가로채면 이사회고 뭐고 판도는 단숨에 뒤집히니까!"

윤서는 비상구 문고리를 잡은 손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똑딱.*

손가락 사이에서 은색 모나미 볼펜이 경쾌한 마찰음을 냈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사촌 형이라는 인간이 잔머리를 굴리는 수준이 딱 초등학교 전교 회장 선거만도 못했다. 바이어를 납치해서 강원도 리조트에 감금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지금이 무슨 90년대 야인시대 방영 플랫폼도 아니고.

윤서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화면에는 4화에서 회사 내부 망을 탈탈 털어 백업해 두었던 파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L&P 그룹 아시아 유통망 확보 MOU 초안'.

강태무가 결재판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80%쯤 미완성 상태인 기획서였다. 프랑스 바이어들의 까다로운 세관 기준과 관세 혜택 조항이 빠져 있어 사실상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서류. 하지만 윤서의 손을 거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차 실장님, 접니다."

윤서는 비상구를 빠져나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 법인 리무진 대기시켜 주세요. 인천공항으로 갑니다. 예, 본부장님께는 '사모님이 직접 영접하러 가셨다'고 전해 주시고요."

"예? 오 비서님, 갑자기 공항은 왜……."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았거든요. 똥개한테 명품 사료를 뺏길 수는 없잖아요?"

전화를 끊은 윤서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승준이 파놓은 함정의 입구를 통째로 들어 올려 그의 머리 위에 덮어씌워 줄 차례였다.

***

두 시간 뒤,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B게이트 앞.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덩치 큰 사내들이 초조한 얼굴로 게이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강승준이 보낸 해결사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L&P Jean Leroy'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어머, 오빠들. 여기서 뭐 하셔?"

가죽 재킷에 킬힐을 매치한 윤서가 슬그머니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내 하나가 흠칫 놀라며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누구십니까?"

"아, 저요? MJ 그룹 TF 기획실의 오윤서 비서이자, 강태무 본부장 와이프인데요. 그쪽 사장님이 보낸 강원도 리조트 셔틀버스는 저기 저 서편 주차장 구석에 예쁘게 처박아 뒀으니까 퇴근하셔도 돼요."

"무슨 소릴……!"

사내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다가서려던 찰나,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렸다.

은발을 단정하게 넘긴 노신사와 까다로운 눈빛의 프랑스 수행원들이 걸어 나왔다. L&P 그룹의 수장, 장 르로이 회장이었다.

강승준의 부하들이 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윤서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녀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르로이 회장의 앞을 막아서며, 완벽한 파리지앵 발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Je vous salue chaleureusement, Monsieur Leroy. Bienvenue en Corée." (따뜻하게 환영합니다, 르로이 회장님.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르로이 회장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뜻밖의 유창한 불어와 격식 있는 태도에 노신사의 얼굴에 흥미로운 미소가 번졌다.

"오, 아름다운 숙녀분이 마중을 나와 주셨군요. 강태무 본부장의 대리인입니까?"

"대리인이자, 그의 평생 파트너죠. 가짜 안내원들의 조잡한 에스코트 대신, 최고급 리무진과 완벽한 비즈니스 제안을 준비했습니다. 가실까요?"

윤서는 가볍게 손짓했다. 게이트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최고급 롤스로이스 리무진의 문이 열렸다. 강승준의 부하들은 멀찌감치 서서 통화 버튼만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들의 무식한 납치 작전은 시작되기도 전에 고상하게 분쇄되었다.

리무진 가죽 시트에 깊숙이 묻힌 르로이 회장은 윤서가 건넨 태블릿 PC를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윤서가 공항으로 오는 차 안에서 최종 완성한 'MOU 수정 조안'이 띄워져 있었다.

"이건…… 기존에 강 본부장이 보내왔던 초안과는 궤가 완전히 다르군요."

르로이 회장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우리가 가장 우려했던 아시아 시장의 독점 관세 장벽 문제를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게다가 보세창고 무료 개방 및 유통망 다각화 조항이라니. 이건 단순한 비서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요?"

"회장님, 비서의 사전적 정의는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지만, MJ의 비서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을 뜻합니다."

윤서는 아주 여유롭게 싱긋 웃었다. 4화에서 백업해 두었던 미완성 파일을 철저히 분석하고, L&P의 최근 3년간 재무제표와 아시아 진출 실패 요인을 샅샅이 대입해 수정한 결과물이었다.

"저희 남편, 그러니까 강태무 본부장은 최고만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그 최고를 실현하는 게 바로 저 오윤서고요. 이 조건이라면 L&P는 리스크 제로로 한국 시장을 먹어 삼킬 수 있습니다."

르로이 회장은 턱을 쓰다듬었다.

"놀랍군. 강태무 본부장이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는지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이런 보물을 옆에 두기 위해서였군."

보물이라니. 100억짜리 고용 관계일 뿐인데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윤서는 속으로 혀를 낼름 찼다. 어쨌든 첫 단추는 완벽하게 꿰어졌다.

***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그랜드 볼룸.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로 클래식한 현악 4중주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프랑스 바이어들과 MJ 그룹 임원들이 모인 비즈니스 디너쇼는 이미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오 비서."

뒤늦게 행사장으로 들어선 강태무가 윤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비넥타이에 클래식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멀리서 봐도 독보적으로 눈부셨다. 마치 그리스 조각상에 슈트를 입혀 놓은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공항에서 강승준의 쥐새끼들을 털어버렸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대처였습니다."

"칭찬은 넣어두시죠, 본부장님. 보너스 통장에 숫자로 찍어주시는 게 제 영혼을 더 울리니까요."

"돈 이야기는 나중에 밤의 무대에서 단둘이 속삭이도록 하고."

태무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윤서의 허리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차가운 이성을 자랑하던 남자가 결혼 계약 이후로 틈만 나면 스킨십의 기회를 노리는 집착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연회장의 중앙 무대에서 마이크 소리가 울렸다. 정장을 빼입은 사회자가 르로이 회장의 제안을 전달했다.

"오늘 이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L&P의 장 르로이 회장님께서 특별히 우리 강태무 본부장 부부의 왈츠 시연을 요청하셨습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아름다운 파트너십을 보여주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윤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왈츠라니? 비서 교육 과정에 사교댄스가 있긴 했지만, 실제 연회장에서 춰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강태무와 밀착해서 춤을 춘다는 것은 시한폭탄을 가슴에 품고 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오 비서, 겁쟁이처럼 굴 겁니까?"

태무가 한쪽 손을 우아하게 내밀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도전적이었다.

"겁쟁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그겁니다, 본부장님."

윤서는 이를 악물고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척.*

손바닥과 손바닥이 완전히 밀착되는 순간,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묵직한 울림이 윤서의 귓가를 때렸다.

'접촉 심음'이 시작된 것이다.

*쿵, 쿵, 쿵.*

태무의 심장 소리가 윤서의 고막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목소리가 한 치의 필터도 없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눈부시다. 오늘 오 비서는 미치도록 눈부셔. 이 조명도, 이 음악도 다 가짜 같고 오직 내 품에 안긴 너만 진짜 같아. 이 춤이 영원히 안 끝났으면 좋겠어. 그냥 계약이고 뭐고 다 찢어발기고 널 진짜 내 아내로…….']

'잠깐, 타임! 타임!'

윤서의 뇌리에 비상이 걸렸다. 태무의 손길이 허리를 감싸 안고,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다.

1초.

태무의 뜨거운 숨결이 뺨에 닿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계약 관계의 상사를 넘어선, 붉게 타오르는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2초.

가슴이 터질 것처럼 조여들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며 심장이 주먹으로 쥐어짜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진실의 반향' 페널티가 시작된 것이다. 3초 이내에 진짜 속마음을 육성으로 뱉지 않으면 여기서 심장마비로 실려 갈 판이었다.

3초.

"당신 가슴이 너무 단단해서 내가 압사당할 것 같아, 이 터질 듯한 연하남 장작 같은 자식아!"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선율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윤서의 묵직한 팩트 폭격이 연회장 전체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마이크 근처도 아니었건만, 윤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클래식 음악조차 뚫고 주변 사람들의 귀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순간, 왈츠를 추던 두 사람의 스텝이 꼬였다.

태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귀끝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었다.

"오, 오 비서……? 지금 뭐라고……."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윤서는 이마를 짚고 그대로 혀를 깨물고 싶었다.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페널티 때문이라지만 연하남 장작이라니!

하지만 태무의 머릿속은 이미 핑크빛 망상의 폭주 기관차가 되어 달리는 중이었다.

['장작……? 내가 그렇게 단단하고 남성미 넘치게 느껴졌단 말인가? 압사당할 것 같다니, 내 품이 그렇게 치명적이었던 건가? 역시 오 비서는 나한테 완전히 안달이 나 있었어. 일부러 튕기는 척하면서 내 가슴 근육을 탐하고 있었던 거야!']

착각의 늪이 태평양 수준이었다. 태무는 터져 나오는 광대를 주체하지 못하고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윤서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당겼다.

"오 비서, 그렇게 내 몸에 매료되었다면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습니까. 굳이 이렇게 자극적인 단어로 내 심장을 들었다 놓을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본부장님, 제발 그 영광스러운 망상의 나래를 접어 두시는 게……."

"쉿, 르로이 회장이 보고 있습니다. 부부의 금슬을 마저 보여주지."

태무는 윤서를 가볍게 턴(Turn) 시키며 완벽한 마무리 동작을 선보였다. 음악이 끝나자 연회장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특히 장 르로이 회장은 기립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Magnifique! (훌륭합니다!) 아주 정열적이고 솔직한 부부군요! 한국의 젊은 리더들이 이토록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다니, MJ 그룹의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

"회장님! 이 계약은 무효입니다!"

연회장의 웅성거림을 헤치고, 땀 범벅이 된 강승준이 헐떡이며 나타났다. 그의 옷차림은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바이어를 빼돌리려다 실패하고 뒤늦게 쫓아온 몰골이었다.

"강태무 본부장의 기획안은 허울뿐입니다! 저희 기획실에서 준비한 강원도 연계 레저 브랜드 기획안이 훨씬 더……."

"Monsieur Kang."

르로이 회장이 차갑게 승준의 말을 잘랐다. 그의 얼굴에서 방금 전의 온화한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이 보낸 무례한 해결사들 때문에 우리 수행원들이 공항에서 큰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비즈니스를 납치와 협박으로 시작하려는 자와는 대화 섞을 가치도 없지요."

"그,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단지 회장님을 더 편안하게 모시려고……."

"게다가."

르로이 회장은 윤서가 건넸던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오윤서 비서가 보여준 이 완벽한 MOU 수정안을 보니, 당신들의 조잡한 레저 기획안은 초등학생의 낙서처럼 느껴지는군요. 나는 오직 오윤서 비서의 독보적인 전문성과 파트너십만을 신뢰합니다."

르로이 회장은 승준을 완전히 무시한 채, 윤서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오 비서님, L&P 그룹은 오직 당신이 기획하고 이끄는 TF 브랜드에만 거액의 원자재 독점 공급권을 정식으로 허락하겠습니다. 강 본부장은 아주 훌륭한 아내를 두셨군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되도록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윤서는 승준을 향해 아주 우아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승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손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깨무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패한 패잔병의 전형이었다. 이사회에서의 횡령 의혹 무산에 이어, 이번 글로벌 브랜드 원자재 독점 계약까지 윤서의 손에 완벽하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단순한 비서로 치부받던 윤서가 MJ 그룹의 핵심 비즈니스를 홀로 견인하는 주역으로 격상하는 순간이었다.

윤서는 승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직 우리 성북동 저택 거실에 심어둔 도청기는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그걸로 널 어떻게 요리해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걸.'

***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 가고 있었다.

윤서는 피로가 몰려오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식장 밖 복도를 걸었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차갑게 울렸다.

태무는 회장님을 배웅하러 가고, 차 실장과 소희는 먼저 정리를 시작한 터라 주변은 고요했다.

그때, 저 멀리 비상구 근처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낮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이게 정말 확실한 겁니까?"

강승준의 목소리였다. 잔뜩 가라앉고 쉰 목소리에서 기괴한 집착이 묻어났다.

"그럼요. 피부에 붙이기만 하면 30분 이내로 미열과 함께 가벼운 몽롱함을 유발하는 특수 약물 패치입니다. 겉보기에는 일반 수분 패치나 화장품 패치처럼 보여서 절대 의심받지 않습니다. 검출도 안 되고요."

상대방의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극도로 은밀하고 음산했다.

"강태무 그 새끼가 이번 신제품 런칭 쇼에서 실수를 연발하게 만들면 돼. 언론사 카메라가 수십 대는 돌 테니까, 거기서 헛소리를 지르거나 쓰러지기만 해도 MJ 후계 구도는 끝장이야."

"좋아……."

스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승준이 정체불명의 화장품형 약물 패치를 건네받아 양복 안주머니 깊숙이 숨기는 실루엣이 윤서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윤서의 숨결이 차갑게 굳어졌다.

강승준의 악행은 단순히 비즈니스 가로채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태무의 신체와 정신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치명적인 범죄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볼펜을 쥔 윤서의 손가락끝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폭풍의 전야 같은 고요함 속에서, 새로운 음모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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