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입니다, 본부장님.”
윤서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가방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둔 프랑스 L&P 명품 브랜드 유통망 MOU 초안 파일의 묵직한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어젯밤 성북동 저택에서 태무가 입술을 맞추며 흘렸던 그 은밀한 속마음의 여운이 아직 뇌리에 맴돌았지만, 지금은 사적인 감정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앞의 적은 턱밑까지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강승준 상무가 아주 작정을 했군요. 가짜 결혼 의혹으로 안 되니, 이제는 아예 기획실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심산입니다.”
태무가 서류를 우그러뜨리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매는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웠다.
“이사회 멤버들을 이미 포섭해 둔 모양이더군. 한 시간 뒤에 청문회가 시작됩니다. 오 비서, 준비는 되었습니까?”
윤서는 주머니 속 볼펜을 꺼내 길게 똑딱였다.
*똑딱.*
스프링이 튕기는 경쾌한 마찰음이 본부장실의 무거운 공기를 깨뜨렸다. 그녀의 포커페이스 뒤로 사나운 투지가 끓어올랐다.
“물론입니다. 누구 머리가 진짜 깨지는지, 이사회 임원들 면상 앞에서 아주 처절하게 확인시켜 드리죠. 가시죠, 본부장님.”
***
MJ 그룹 본사 15층 대회의실.
육중한 마호가니 원탁을 둘러싼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사외이사를 포함한 십여 명의 이사진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고, 그 중심에는 강승준 상무가 승전보를 미리 받아 든 장수처럼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오, 우리 일 잘하는 사촌 동생이랑 그 영리한 사모님이자 오 비서님이 같이 오셨네? 부부 동반으로 청문회 자리에 서다니, 그림 참 눈물겹네.”
승준이 특유의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살을 맞대고 비벼대는 가죽 장갑 같은 소리가 회의실에 불쾌하게 울려 퍼졌다.
태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상석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서는 그의 한 걸음 뒤, 완벽하게 각 잡힌 비서의 자세로 섰다.
“강태무 본부장.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승준의 파벌인 한 사외이사가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TF 기획실이 프랑스 L&P 브랜드와의 독점 계약을 명목으로 송금한 45억 원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지적이 있네. 주거래 은행 에스크로 계좌에는 잔액이 비어 있고, 메인 서버의 관련 결산 원장은 완벽히 포맷되어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하던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기다렸다는 듯 승준이 끼어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뱀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 서버 관리 권한, 오윤서 비서가 독점하고 있죠? 기획실의 모든 기밀 자금을 주무르는 오 비서가 본부장의 묵인하에 원장을 은폐하고 폐기 처분했다는 결론 외엔 상식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서 오윤서 비서의 즉각적인 대기발령 및 무기한 직무 정지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사진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몇몇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차도현 비서실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태무의 눈치를 살폈다. 상황은 일촉즉발, 윤서의 커리어가 통째로 날아갈 위기였다.
윤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소리가 날카롭게 청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강승준 상무님.”
윤서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떨림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맑아서 서늘할 지경이었다.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도 그렇게 허술하게 극본을 쓰진 않습니다. 결산 원장이 은폐되고 폐기되었다고요? 어디서 그런 귀여운 판타지 소설을 읽고 오셨는지 출처가 궁금하군요.”
“뭐라구? 오 비서, 지금 이 엄숙한 이사회 자리에서 무슨 무례한 태도인가!”
승준이 책상을 탁 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윤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USB 메모리가 아니었다. 눈부신 플래티넘과 사파이어로 세공된, 정교하기 그지없는 링크 단추였다.
태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그것은 1화에서 그가 윤서에게 신뢰의 담보라며 건넸던, TF 기획실의 마스터 키카드 역할을 하는 커프스링크 단추였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상무님?”
윤서가 단추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건 단순한 장신구가 아닙니다. MJ 그룹의 차세대 보안 프로토콜과 연동된, 전 세계에 단 두 개뿐인 물리적 하드웨어 보안 키(HSM)입니다. 메인 서버가 해킹당하거나 물리적으로 파괴되더라도, 이 마스터 키를 직접 단말에 연결하면 분산형 블록체인에 실시간으로 백업되던 무결결산 원장이 즉각 복구되도록 설계되어 있죠.”
그녀는 주저 없이 이사회실 중앙의 메인 제어 단말로 걸어갔다. 승준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딸깍.*
윤서가 커프스링크의 숨겨진 커넥터를 단말 포트에 매끄럽게 밀어 넣었다.
스크린 위로 푸른빛의 로딩 바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이내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에 복잡한 숫자와 거래 해시(Hash) 값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Master Authorization: Oh Yoon-Seo / Kang Tae-Mu` `Status: Uncorrupted Blockchain Ledger Restored`
화면 가득 떠오른 것은 완벽무결한 TF 기획실의 진짜 재무 원장이었다.
“보시다시피 프랑스 L&P 사의 에스크로 계좌에 송금된 45억 원은 프랑스 중앙은행의 보증하에 완벽하게 묶여 있습니다. 다음 주 바이어 방한 시 최종 서명과 함께 안전하게 집행될 예정이죠. 횡령은커녕 단 1원짜리 한 장도 오차가 없습니다.”
윤서가 뒤를 돌아 승준을 정조준했다. 그녀의 두 눈이 차갑고 날카롭게 비수를 꽂았다.
“오히려 저희가 원장을 복구하면서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어젯밤 11시 42분, 메인 서버에 무단 접속해 원장 데이터의 열람 권한을 임의로 차단하고 포맷을 위장한 침입 IP가 존재하더군요. 그 IP의 물리적 주소를 추적해 보니…….”
윤서가 빔프로젝터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며 하나의 주소지가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MJ 본사 17층 상무실 부속 데스크 PC]
“놀랍게도 강승준 상무님의 집무실 내부 IP였습니다.”
순간 이사회장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해졌다.
승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부르르 떨렸다. 양손을 비벼대던 그의 교활한 습관은 온데간데없고,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자, 사외이사님들.”
윤서가 볼펜을 주머니에 꽂으며 쐐기를 박았다.
“진짜 감사를 받아야 할 사기꾼이자 회사 시스템을 교란한 범죄자가 누구인지, 이제 눈이 제대로 침침하지 않으시다면 아주 명확하게 보이실 텐데요?”
그것은 완벽한 3비트의 반격이었다. 질문으로 판을 흔들고, 눈앞의 실물 증거로 증명했으며, 상대의 심장에 비수를 찔러 아가리를 봉쇄해 버린 완벽한 일갈.
이사진은 승준을 향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승준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태무가 윤서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훤칠한 그림자가 윤서를 포근하게 덮었다.
“역시 내 비서답군. 완벽한 일 처리였습니다, 오 비서.”
태무가 신뢰와 안도가 가득 담긴 손길로 윤서의 어깨를 꽉 쥐었다. 탄탄하고 따뜻한 손바닥의 온기가 그녀의 어깨뼈를 타고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윤서의 머릿속으로 그의 원초적이고 생생한 목소리가 해일처럼 밀려들어 왔다.
*(이 여자는 대체 내게 내려온 여신인가? 이 완벽하고 눈부신 생명체를 어떻게 내 품에서 놔줄 수 있겠어. 절대 못 놔. 평생 내 비서로, 내 진짜 아내로 내 곁에 가둬둘 거야. 사랑스러워 미치겠네. 당장이라도 이사회고 뭐고 다 내쫓고 품에 안아버리고 싶다.)*
윤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 여신?! 평생 진짜 아내로 가둬둔다고?!’
머릿속이 순식간에 핑크빛 폭탄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사치였다. 심장을 옥죄는 익숙하고도 지독한 통증이 가슴 통증과 함께 밀려왔다.
*3.* (안 돼, 참아야 해. 여기 이사회장이야!)
*2.*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1.* 더 이상 참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대한 반향의 힘이 그녀의 목구멍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필터링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진심의 폭격이, 엄숙한 이사회장 한복판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여신 소리 들었더니 엉덩이가 들썩여 손 떼라고 이 감수성 풍부한 본부장아!”
“……?”
대회의실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 섰다.
차도현 실장은 들고 있던 만년필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패배감에 젖어 있던 강승준마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사외이사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태무의 손이 윤서의 어깨 위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태무의 뇌 회로는 이 기괴한 상황을 또다시 자신만의 우주적인 착각으로 재해석해 냈다.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내 칭찬에 설렜다는 뜻인가? 게다가 이 엄숙한 이사회장에서 나를 향해 대담하게 질투와 애정을 표현하다니…… 역시 보통 고단수가 아니군.’
태무는 붉어진 얼굴을 짐짓 큼큼거리며 가다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오 비서…… 아무리 내 마음에 동요했다고 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내 마음에 대한 답을 조금만 아껴 주지. 다른 이목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윤서는 자신의 이마를 짚고 그대로 바닥으로 꺼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 황당한 핑크빛 기류는 이사들에게는 완벽한 부부의 ‘찐한 애정 행각’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사외이사 한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하하, 거 참…… 본부장 부부의 금슬이 아주 남다른 모양이군. 보기 좋습니다.”
“흠, 그렇군. 횡령 의혹은 완전히 허위사실로 밝혀졌으니, 이번 청문회는 없던 일로 하고 강승준 상무의 시스템 무단 접속 건에 대해 추후 징계위원회를 소집하는 방향으로 정리합시다.”
“찬성합니다.”
이사회는 그렇게 강승준의 완패와 태무·윤서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
회의실을 빠져나오는 윤서의 발걸음은 유독 빨랐다. 쪽팔림과 민망함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라 터지기 일보 직직이었다.
“오 비서, 같이 가요. 그렇게 빨리 걸으면 넘어집니다.”
태무가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붙었지만, 윤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복도를 질주했다.
비상구 계단 근처에 이르렀을 때야 윤서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방화문 너머에서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승준이었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비상문 틈새로 귀를 기울였다.
“그래, 오늘 밤 당장 움직여!”
승준이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프랑스 L&P 바이어들 오늘 저녁 인천공항 도착하는 대로 납치하듯 중간에 가로채! 강태무 그 새끼 얼굴도 못 보게 만들고, 강원도 우리 쪽 리조트로 밀어 넣어버려. 계약만 우리가 가로채면 이사회고 뭐고 판도는 단숨에 뒤집히니까!”
윤서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승준의 패악질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 주에 온다던 프랑스 바이어들이 오늘 밤 극비리에 입국한다는 사실을 미리 빼돌린 것이 분명했다.
주머니 속의 볼펜을 쥔 윤서의 손가락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똑딱.*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승준의 비열한 음모가, 오히려 그를 완벽하게 파멸시킬 덫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