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띠리리리링!*

귓가를 찢을 듯한 경보음이 성북동 대저택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거실 벽면에 매립된 홈 패널 스크린이 시뻘건 빛을 뿜어내며 깜빡였다. 패널 속 카메라 화면에는 빗방울이 번지는 어둠을 뚫고, 검은색 세단을 등진 노신사가 보였다. MJ 그룹의 절대 권력자이자 강태무의 조부, 강만식 회장이었다.

그가 짚고 있는 흑단나무 지팡이가 화면 안에서 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회장님이십니다.”

윤서의 목소리에서 방금 전까지 감돌던 묘한 열기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태무의 품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흐트러진 셔츠 깃을 바로잡는 손길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내일 아침에 오신다더니, 기습 감사를 이런 식으로 하실 줄이야.”

태무가 혀를 차며 재킷을 걸쳤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살짝 돋아 있었다. 완벽주의로 똘똘 뭉친 그조차도 조부의 예측 불허한 행보에는 이가 갈리는 모양이었다.

“본부장님, 넋 놓고 계실 시간 없습니다. 3층 침실로 올라가서 침대 시트부터 구겨놓으세요. 베개는 두 개 다 꺼내놓으시고요.”

윤서의 지시가 군대 지휘관처럼 떨어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재킷 주머니 속 볼펜을 찾아 빠르게 똑딱였다. *똑딱, 똑딱.* 위기 상황일수록 뇌세포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그녀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리고 욕실에 칫솔 두 개 꽂아두는 거 잊지 마십시오. 남성용 스킨 옆에 제 화장품 몇 개 던져놓으시고요.”

“오 비서, 지휘관 체질이군.”

“100억짜리 계약을 날려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서 움직이세요!”

태무가 이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윤서는 서재로 발걸음을 돌렸다. 서재 책상 위에는 태무가 퇴근길에 챙겨왔던 중요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중 윤서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은 짙은 파란색 가죽 파일이었다.

‘프랑스 명품 명가 L&P 브랜드 유통망 MOU 초안.’

윤서의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사내 망에서는 철저히 암호화되어 비서실 조차 접근할 수 없었던 극비 문서였다. 이 문서만 확보한다면, 1년 뒤 그녀가 태무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패션 브랜드를 런칭할 때 엄청난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아니, 활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성공을 보증하는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파일은 태무가 개인용으로 사용하는 지문 인식 서랍장 안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잠금장치가 작동하기 직전이었다.

“본부장님! 기획실 마스터 키카드 좀 던져주십시오!”

윤서가 이층을 향해 외쳤다. 계단 위에서 태무가 소리쳤다.

“내 재킷 오른쪽 소매에 채워둔 커프스링크가 마스터 키카드야! 그거 빼서 쓰면 돼!”

윤서는 서재 문턱을 넘어 다급히 거실 소파 위에 던져진 그의 재킷으로 달려갔다. 은빛으로 빛나는 커프스링크를 손에 쥐는 순간, 이층에서 내려오던 태무가 그녀의 손목을 다급히 낚아챘다.

두 사람의 피부가 직접 맞닿았다.

그 찰나, 윤서의 머릿속으로 태무의 날것 그대로의 속마음이 천둥처럼 내리쳤다.

[오 비서가 내 손목을 잡았다. 손이 참 따뜻하네. 아니, 지금 비상상황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내 옷이라도 벗겨주려는 건가?]

‘이 미친 인간이 지금 이 와중에 무슨 헛소리를!’

윤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 초능력의 대가는 가혹했다. 3초. 머릿속으로 속마음이 들려온 순간부터 정확히 3초 이내에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육성으로 뱉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을 터였다.

3. 2. 1.

“옷 벗기려는 게 아니라 서랍 열려고 잡은 겁니다!”

윤서가 빽 소리를 질렀다.

태무는 둥그렇게 뜬 눈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특유의 거만한 귀여움이 서린 오해의 미소가 번졌다.

“서랍이라니? 아, 내 은밀한 서랍을 열고 싶었다고? 역시 내 일에 가장 적극적인 아내답군. 오 비서의 진취적인 태도, 아주 마음에 들어.”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발!”

시간이 없었다. 윤서는 태무의 손길을 뿌리치고 서재로 달려가 서랍장의 센서에 커프스링크를 갖다 댔다. *띠리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서랍이 열렸다. 윤서는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L&P MOU 초안의 전 페이지를 초고속으로 스캔했다. 그리고 개인 암호화 클라우드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송 완료.’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순간, 현관문 너머에서 도어록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탁.*

마침내 호랑이가 굴속으로 발을 디뎠다.

***

“밤중에 아주 부부끼리 난리가 났구나.”

지팡이를 짚은 강만식 회장이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로 비서들이 고개를 숙인 채 대기했다. 강 회장의 날카로운 안광이 거실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태무의 넥타이,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플 머그잔을 보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할아버지, 연락도 없이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태무가 자연스럽게 윤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가락이 윤서의 옆구리를 꾹 누르는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윤서는 내색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현숙한 아내의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갑작스러운 방문에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차라도 한 잔 내어올까요?”

“차는 무슨 차. 내 눈을 속이려 들지 마라.”

강 회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쾅쾅 쳤다.

“승준이가 사방에 소문을 내고 다니더군. 너희 둘이 겉으로만 결혼한 척 쇼를 하는 거라고. 내 주식을 넘겨받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냐며 매일같이 내 귀를 괴롭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강 회장의 시선이 윤서의 배 쪽으로 향했다.

“결혼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 정말로 한 침대를 쓰는 부부가 맞기는 한 게냐?”

공기가 얼어붙었다. 대기업 회장의 압박은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었다. 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100억의 계약도, 윤서의 독립 자금도 전부 공중분해 될 터였다.

태무가 침을 삼키더니, 굳은 결심을 한 듯 윤서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할아버지, 승준 형의 질투 섞인 모함에 놀아나지 마십시오. 저희가 얼마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말로는 누구나 소설을 쓰지.”

“그럼 제 행동으로 보여드리죠.”

그 순간, 태무가 고개를 숙였다.

윤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차갑고도 부드러운 입술이 윤서의 뺨에 깊게 내려앉았다. 단순한 시늉이 아니었다. 살짝 젖은 그의 입술이 윤서의 볼 피부를 지그시 누르며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쿵, 쿵, 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스킨십의 면적이 넓어질수록, 태무의 머릿속 속마음이 확성기를 댄 것처럼 윤서의 뇌리에 직격했다.

[정말 진짜면 얼마나 좋을까. 연기가 아니라, 진짜 내 아내라면. 오윤서, 너한테 어울리는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 매일 밤 이렇게 너를 안고 입 맞출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윤서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단순한 집착인 줄 알았는데,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감정의 무게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무자비한 3초의 카운트다운은 가슴 통증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호흡이 가빠졌다. 이 진실의 고백을 뱉지 않으면 정말로 길바닥에 쓰러질 판이었다.

윤서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았지만, 입술은 이미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3. 2. 1.

“뽀뽀했으니까 돈 더 줘야지 사기꾼아!”

윤서의 목소리가 거실 전체를 쨍하게 울렸다.

태무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볼에 닿았던 그의 입술이 떨어지며,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 망했다.’

윤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필터링 없는 고백이라지만, 회장님 앞에서 남편을 ‘사기꾼’이라 부르고 뽀뽀의 대가로 ‘돈’을 요구하다니. 계약 파기는 물론이고 당장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대형 사고였다.

정적이 흘렀다. 강 회장의 비서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강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1초, 2초, 3초.

갑자기 강 회장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핫하하하!”

강 회장이 지팡이를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저택 유리창을 흔들었다.

“돈을 더 달라니! 사기꾼이라니! 아이고, 내 평생 이렇게 속이 시원한 소리는 처음 듣는구나!”

윤서와 태무는 동시에 멍한 표정으로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태무 이 놈, 내 너를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꽉 막힌 샌님으로 키운 줄 알았더니, 아내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는구나! 뽀뽀 한 번 하는 데도 돈을 뜯길 만큼 매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냐!”

강 회장이 눈물까지 훔치며 윤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역시 내 안목이 맞았어. 요즘 세상에 가식적으로 ‘사랑해요, 여보’ 하는 것들은 다 가짜야. 이렇게 서로 밑천 다 보여주고 지갑 털어가며 티격태격 싸우는 게 진짜 부부지! 우리 가문 놈들이 대대로 마누라한테 쩔쩔매는 유전자가 있는데, 태무 너도 예외는 아니었구나!”

윤서는 잽싸게 상황을 파악하고 꼬리를 흔들었다.

“회장님, 이 사람이 겉으로는 아주 대단한 본부장인 척해도, 집에서는 제 눈치 보느라 바쁘답니다. 오늘도 제 마음에 들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몰라요.”

“오 비서, 아니 이제 윤서 아가씨라고 불러야겠군. 아주 당차고 마음에 들어. 가식 없는 그 성격이 우리 가문에 딱 필요했던 거야.”

강 회장이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비서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를 꺼내 강 회장에게 건넸다. 강 회장은 그 상자를 윤서의 손에 쥐여주었다.

“열어보아라.”

윤서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박아 넣은 듯, 영롱하고 짙은 초록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에메랄드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보석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이건 태무 조모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반지다. 시가로 치면 최소 10억은 가볍게 넘는 물건이지. MJ 가문의 진짜 안주인에게만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란다.”

‘10억……!’

윤서의 머릿속 계산기가 미친 듯이 두드려졌다. 100억의 10%에 해당하는 가치가 지금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이걸 제게 주시는 겁니까?”

“그래. 너희 둘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이 할애비가 주는 선물이다. 윤서 너는 이 반지를 가질 자격이 충분해. 태무 이 자식이 또 돈으로 쩨쩨하게 굴면 언제든 나한테 이르거라. 내가 이 녀석 주식을 다 압수해서 네 앞으로 돌려줄 테니.”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평생 보물처럼 아끼겠습니다.”

윤서는 세상에서 가장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딱 맞춘 것처럼 손가락에 감겨오는 차가운 보석의 감촉이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희열을 안겨주었다. 프랑스 L&P MOU 초안에 이어 10억 상당의 에메랄드 반지까지.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밤이었다.

강 회장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비서들을 대동하고 저택을 나섰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윤서와 태무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 비서.”

태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귀끝이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까 그... ‘사기꾼’이라는 발언은 꽤 창의적인 플러팅이었습니다. 덕분에 할아버님이 완벽하게 속으셨지만.”

“플러팅이 아니라 제 생존 본능이었습니다, 본부장님. 그리고 이 반지는 제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계약 조건에 ‘선물 수령 시 반환’이라는 조항은 없었으니까요.”

윤서가 손가락을 쫙 펴며 에메랄드 반지를 자랑하듯 흔들었다.

“가져요. 오 비서가 오늘 밤 해낸 역할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소하니까.”

태무가 피식 웃으며 서재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제 볼을 어루만졌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정말 진짜면 얼마나 좋을까’라던 그의 속마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윤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주머니 속 볼펜을 다시 똑딱였다.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목표는 오직 완벽한 독립과 100억이었다.

***

다음 날 아침.

MJ 그룹 본사 18층 본부장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윤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하게 다려진 오피스 룩을 입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포커페이스로 본부장실 문을 열었다. 태무의 책상 위에 모닝커피와 일일 보고서를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태무의 책상 정중앙에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은박 인장이 찍힌 붉은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윤서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어 들어 내부 서류를 꺼냈다. 서류의 헤드라인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갔다.

[TF 기획실 자금 횡령 규명 청문회 소집 통지서]

발신인은 MJ 그룹 상무 강승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강태무 본부장이 이끄는 TF 기획실이 프랑스 L&P 브랜드 유통망 확보 과정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횡령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당일 오후 긴급 이사회를 소집한다는 청문회 통지서였다.

그때, 본부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태무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 비서, 책상 위에 있는 거 읽었습니까?”

윤서는 서류를 태무에게 건네며, 주머니 속 볼펜을 꺼내 길게 똑딱였다.

*똑딱.*

“강승준 상무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요. 가짜 결혼 폭로가 막히자, 이제는 아예 TF 기획실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작정입니다.”

태무가 서류를 구겨 쥐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사회 멤버들을 이미 포섭해 둔 모양이더군. 한 시간 뒤에 청문회가 시작됩니다. 오 비서, 준비는 되었습니까?”

윤서는 가방 속에 안전하게 백업해 둔 L&P MOU 초안 파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끼워진 10억짜리 에메랄드 반지를 매만졌다.

“물론입니다, 본부장님.”

윤서의 두 눈이 고양잇과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누가 진짜 사기꾼인지, 이사회 임원들 앞에서 아주 처절하게 확인시켜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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