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태무가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태무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비서실 전용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더니, 제어반의 마스터키를 꽂아 돌렸다. 철컥,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잠기는 쇳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거칠게 때렸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윤서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과 그의 넓은 가슴팍 사이에 갇힌 윤서의 시야에 태무의 잘생긴 얼굴이 가득 찼다.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본부장님, 지나치게 가깝습니다만.”

윤서는 애써 요동치는 심장을 감추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거리감이 문제입니까? 할아버님이 성북동으로 들이닥치기 직전입니다. 비상사태라고요.”

태무의 목소리가 낮게 르릉거렸다. 평소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주의자치고는 제법 다급함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윤서는 한쪽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품에서 은색 볼펜을 꺼내 가볍게 똑딱였다. *딸깍, 딸깍.* 일정한 리듬이 그녀의 차분함을 대변했다.

“그러니까 비서로서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말씀드리자면, 이건 연기 조절의 영역입니다. 당황해서 허둥대는 순간 강승준 상무의 꿀단지에 자진해서 기어 들어가는 꼴이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연기 조절?”

“네. 갑작스러운 동거 역시 비즈니스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오늘 밤 당장 성북동 저택으로 입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일단 이 팔부터 치워 주시죠. 옷 구겨집니다.”

태무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그의 귀끝이 다시금 붉게 물드는 것을 윤서는 놓치지 않았다. 백만 불짜리 슈트를 입고서도 비서의 팩트 폭격 앞에서 쩔쩔매는 대기업 본부장이라니, 누구에게 보여줘도 믿지 않을 광경이었다.

“……차 실장에게 연락해서 필요한 짐은 즉시 성북동으로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오 비서의 오피스텔에 들를 시간은 없으니, 필요한 생필품은 저택에 구비된 것을 쓰도록 하죠.”

“좋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시죠, 본부장님. 아니, 여보?”

윤서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뱉은 호칭에 태무의 발걸음이 크게 휘청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 전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귀끝이 터질 것처럼 빨개진 채였다.

* * *

검은색 세단이 어둠이 짙게 깔린 성북동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성북동 99-X번지. 울창한 아름드리나무들과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저택은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하고 차가웠다. MJ 그룹의 영빈관으로 쓰이기도 했던 이곳은, 오직 파파라치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매입된 쇼윈도 부부의 사택이었다.

차도현 비서실장은 이미 임무를 완수하고 떠난 뒤였다. 저택 내부의 조명은 은은하게 켜져 있었고, 윤서의 짐 가방 두 개가 거실 한복판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방은 두 개를 쓰도록 하죠. 대외적으로는 한 침대를 쓰는 것으로 꾸미되, 실제 취침은 각자의 방에서 하는 겁니다.”

태무가 거실 넓은 소파에 재킷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합리적인 제안이네요. 마침 저도 본부장님의 잠버릇까지 케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윤서는 가방을 끌고 2층 서재 옆에 위치한 두 번째 침실로 향했다.

방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화이트와 그레이 톤의 모던한 인테리어는 아늑함보다는 모델하우스 같은 서늘함을 풍겼다. 윤서는 옷장을 열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걸이에 셔츠를 걸던 중, 소매 끝에 매달린 은색 커프스링크 단추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1화에서 태무가 ‘신뢰의 담보’라며 건넸던, TF 기획실 마스터 키카드가 내장된 커프스링크였다.

윤서는 손끝으로 차가운 금속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미완성인 프랑스 명품 브랜드 유통망 MOU 초안을 완성하고, 강승준의 음모를 박살 내기 위해 반드시 쥐고 있어야 할 비밀 무기. 그녀는 단추를 조심스럽게 화장대 보석함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자, 이제 부부 행세를 위한 세팅을 시작해 볼까.”

윤서는 방을 나와 저택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신혼집이었다. 액자 속 두 사람의 합성 웨딩 사진이 어색하게 빛나고 있었고, 커플 머그잔이 싱크대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윤서의 직업적 예민함이 발동한 것은 서재 구석 벽면을 지나갈 때였다.

서재 책상 아래,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벽면 콘센트 주위의 벽지가 아주 미세하게 일어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도배 불량이라기엔 칼자국이 너무 정교했다.

윤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품에서 은색 볼펜을 가볍게 똑딱이며 콘센트 덮개 틈새로 볼펜 끝을 밀어 넣었다.

*툭.*

약간의 힘을 주자 콘센트 플라스틱 커버가 쉽게 벌어졌다. 그 어두운 틈새 안쪽에서, 아주 작은 초록색 네온 불빛이 0.5초 간격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초소형 무선 도청 장치였다.

윤서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이 저택은 회장님의 지시로 관리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다. 그리고 그 관리인들 중 일부는 분명 강승준 상무의 돈을 받아먹은 첩자일 터였다.

‘설치한 지 얼마 안 됐어. 배터리 상태를 보니 아주 생생하군.’

보통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당장 도청기를 뜯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윤서는 평범한 비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볼펜 끝으로 도청기를 조심스럽게 다시 안쪽으로 밀어 넣고, 콘센트 커버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었다.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강승준 상무님, 쥐새끼처럼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취미가 있으셨군요.’

적의 패를 미리 안다는 것은, 그 패를 이용해 판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도청기는 조만간 강승준의 목을 죄어버릴 완벽한 역정보의 덫이 될 것이다. 당장 제거하기보다, 놈에게 우리가 ‘달콤하고 멍청한 신혼부부’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도구로 쓰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며 태무가 걸어 들어왔다.

“오 비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윤서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태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 앞바라기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윤서는 눈짓으로 책상 아래 콘센트 방향을 가리킨 뒤, 소리가 나지 않게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도. 청. 기.’

태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그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콘센트를 뜯어내려 하자, 윤서는 그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아 만류했다. 도청기 너머로 들려올 소리가 자연스러운 신혼의 소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도청기를 향해 우리가 완벽한 부부라는 ‘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윤서는 태무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그대로 품에 안겼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태무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윤서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턱을 기대고, 도청기가 있는 방향을 향해 목소리 톤을 한 옥타브 높였다. 아주 달콤하고 콧소리가 섞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혼 아내의 목소리로.

“자기야, 오늘 너무 고생 많았지? 이렇게 넓은 집에서 우리 둘만 있으니까 꼭 꿈꾸는 것 같아.”

윤서의 손이 태무의 등 부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태무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평생 매일 퇴근하고 이 향기만 맡고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군.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오윤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갑자기 안겨 오는 거지? 이건 반칙이잖아. 사람 미치게 만들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어라?’

윤서의 뇌리가 정지했다.

태무의 원초적이고 뜨거운 속마음이 귓가를 때리자마자, 그녀의 가슴 안쪽에서부터 지독한 통증이 뻐근하게 치밀어 올랐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지독한 압박감.

초능력의 페널티였다.

속마음을 들은 지 정확히 3초 이내에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육성으로 고백해야만 하는 지독한 제약. 만약 이 진실을 뱉지 않으면 그녀는 이 자리에서 호흡 곤란으로 쓰러질 판이었다.

머릿속 시계가 가차 없이 흘러갔다. *3, 2, 1.*

윤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태무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필터링 없는 본심을 와락 내질렀다.

“당신 품이 너무 넓어서 숨넘어가겠으니까 좀 살살 안아요!”

서재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도청기를 의식해 다정한 연기 톤으로 시작했던 외침은, 마지막 순간에 지독하게 솔직하고 앙칼진 비명으로 변해 있었다.

태무는 윤서의 엉뚱한 자백에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 묘한 오해의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윤서의 외침을 ‘사랑에 겨운 플러팅’으로 완벽하게 왜곡해 해석하고 있었다.

“……살살 안아달라고?”

태무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고 밀도 높게 가라앉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윤서의 가느다란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 손길에 실린 힘이 신기할 정도로 부드럽게 조율되어 있었다.

“그럼,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오 비서.”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귀밑샘을 자극했다. 윤서는 미칠 것 같은 심장박동을 느끼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남자는 완벽주의 본부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왜 이렇게 사람을 안달 나게 만드는 엉뚱한 집착남으로 변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팍에 닿은 손끝을 통해 그의 속마음이 다시 한 번 흘러들어왔다.

[더 꽉 안고 싶지만, 숨막힌다니까 참아야겠지. 귀여워 죽겠네, 정말.]

윤서는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도청기를 속이려다 도리어 제 발등을 찍은 꼴이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태무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이제…… 연기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습니다, 본부장님.”

“연기라니요. 나는 꽤 진지하게 임하고 있습니다만.”

태무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윤서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두 사람 사이의 텐션이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띠리리리링!*

정적을 깨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가까운 대문 경보음이 저택 전체를 울렸다.

동시에 거실 벽면에 설치된 홈 패널 스크린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이며 외부 카메라 화면이 띄워졌다. 화면 속에는 MJ 그룹의 지배자이자, 태무의 완고한 조부인 강 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회장님이십니다.”

윤서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싹 가셨다.

예상했던 내일 아침이 아니었다. 강 회장은 오늘 밤 두 사람이 정말로 한집에 들어왔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기습 방문을 감행한 것이었다.

“당장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태무가 서둘러 재킷을 걸치며 말했다. 윤서 역시 흩어진 옷가지를 정리하고 포커페이스를 장착했다.

과연 이 차가운 대저택에서, 두 사람은 강 회장의 날카로운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 완벽한 부부 연기를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도청기의 존재와 회장님의 급습이라는 이중의 덫 속에서, 쇼윈도 부부의 진짜 첫날밤이 잔인하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