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콰앙-!*

본부장실의 묵직한 목제 문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문턱을 넘어선 구두굽 소리가 요란했다. 플래시 불빛이 수십 발의 은탄환처럼 어두워지던 사무실 안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어이, 사촌 동생! 비서랑 단둘이 방에서 아주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네?"

강승준 상무가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로 카메라를 든 기자 서넛이 하이에나처럼 들이닥쳤다. 렌즈의 붉은 녹화 등이 윤서의 시야를 어지럽게 헤집었다. 승준은 특유의 버릇대로 두 손을 가볍게 비벼대며 뱀처럼 혀를 찼다.

"강태무 본부장님이 비서와 가짜 결혼을 모의한다는 찌라시가 돌아서 확인하러 왔는데,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이거 아주 대기업 후계자 구도를 뒤흔들 메가톤급 스캔들인데 말이야."

카메라 셔터 소리가 쉴 새 없이 고막을 때렸다. 윤서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감히 내 100억 앞길에 똥물을 뿌려?'

지금 여기서 흔들리면 끝장이다.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사생활 폭로로 후계 구도에서 탈락하고, 윤서 본인의 100억 독립 자금도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수년간 강태무 밑에서 온갖 개고생을 하며 버틴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윤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정장을 가볍게 털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강태무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피부 접촉에 태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와 동시에 윤서의 귓가에 웅장한 오케스트라처럼 그의 생생한 속마음이 울려 퍼졌다.

*'헉, 오 비서가 먼저 내 손을 잡았어? 심장이 터져서 죽을 것 같다. 손가락이 왜 이렇게 부드럽고 가늘지? 평생 이 손 안 놓고 싶다……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태무! 정신 차려!'*

겉으로는 세상 냉혹한 군주처럼 서 있던 남자의 머릿속은 이미 핑크빛 폭죽이 터지는 축제 한마당이었다. 윤서는 이 어이없는 갭 차이에 이마를 짚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초뿐이었다. 3초 안에 진짜 속마음을 뱉지 않으면 심장이 쪼그라들어 죽는다.

가슴팍이 뻐근하게 조여오기 시작하자, 윤서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주 단단해서 딱 제 취향이네요."

태무의 동공이 단숨에 확장되었다.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순간 멈칫했다. 윤서는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특유의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희 다음 달에 결혼합니다."

태무의 손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윤서는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가짜 결혼이라니요, 강 상무님? 저희가 얼마나 뜨겁게 연애 중인지 직접 보여드려야 믿으시겠습니까?"

"뭐, 뭐라고? 결혼? 다음 달에?"

승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당당한 답변에 기자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윤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승준을 압박했다.

"그나저나 비서실 보안을 뚫고 무단으로 기자들을 대동해 본부장실을 습격하시다니요. MJ 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타사 스파이의 소행인 줄 알았습니다, 상무님. 내일 아침 헤드라인은 '강 상무의 사촌 동생 결혼 축하 기습'이 아니라 '경영권 양도를 노린 무단 주거 침입 및 업무 방해'로 장식하고 싶으신 건 아니시지요?"

"이, 이 비서년이 지금 누구 앞이라고……!"

승준이 삿대질을 하며 서류 가방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오 비서, 네가 감히 나한테 협박을 해? 강태무, 너 언제부터 이런 근본 없는 비서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거야? 이거 다 보여주기식 쇼잖아!"

승준이 흥분해 윤서의 어깨를 밀치려 한 발짝 다가선 순간이었다.

태무의 안색이 순식간에 저승사자처럼 변했다. 그는 윤서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채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단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윤서의 코끝에 태무 특유의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과 뜨거운 체온이 훅 끼쳤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는 순간, 윤서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의 속마음이 뇌리에 직격했다.

*'감히 누가 내 아내를 건드려, 승준 저 자식을 완전히 묻어버리겠다. 내 여자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릴 거야. 그나저나 오 비서 허리가 왜 이렇게 얇아? 품에 쏙 들어오잖아. 평생 이렇게 안고 있고 싶다.'*

분노와 음흉함이 기묘하게 뒤섞인 태무의 속마음에 윤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지며 목구멍까지 무언가가 밀려 올라왔다. 3초. 빌어먹을 3초의 독기 필터링이 시작되었다.

참으려 해보았지만 가슴을 찌르는 극심한 통증에 결국 윤서의 입술이 강제로 열렸다. 본부장과 기자들, 그리고 씩씩대고 서 있는 강승준의 면전에서 윤서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허리 잡은 손이 너무 섹시하니까 떨어지세요, 미친놈아!"

사무실 안이 순간 얼어붙었다.

기자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강승준은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태무의 하얗던 귀끝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심장이 옷자락 너머로 윤서의 등에 닿아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었다.

태무의 머릿속이 다시 한번 비명으로 가득 찼다.

*'섹시하다고……?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 건 좀 섭섭하지만 섹시하다니까 봐준다! 오 비서, 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를 유혹하는 건가? 정말 무서운 여자군.'*

윤서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빠르게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그녀는 헛기침을 가볍게 두어 번 했다.

"……라고, 저희가 평소에 이렇게 장난스럽게 애칭을 부르며 연애합니다. 본부장님이 너무 섹시해서 제가 가끔 미치거든요.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데, 상무님이 무례하게 구시니 저도 모르게 흥분했네요."

윤서가 태무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생긋 웃었다. 기자들의 눈빛은 이미 의심에서 '세기의 사랑을 목격한 목격자'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와, 본부장님 평소엔 얼음 조각 같으시더니 사생활은 아주 핫하시네." "애칭이 '미친놈'이라니, 이거 완전 요즘 트렌디한 힙합 커플 느낌인데?"

기자들이 수군거리며 카메라를 슬그머니 내렸다. 윤서는 쐐기를 박듯 태무의 셔츠 깃을 다정하게 정리해 주며 승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오늘 찍으신 사진들은 저희 청첩장용 메인 컷으로 예쁘게 보정해서 쓰겠습니다. 독점 한정 보도자료는 내일 오전 비서실을 통해 정식 배포할 예정이니, 무단 침입 피의자로 서에 가셔서 조사받기 전에 조심히 퇴장해 주시죠."

승준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는 씩씩거리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너희…… 두고 봐! 강태무, 오윤서! 이 사기극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반드시 꼬리를 잡아낼 테니까!"

승준은 억지로 뱉어낸 비명을 뒤로한 채, 기자들을 이끌고 쫓기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요란했던 카메라 셔터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윤서는 꼿꼿이 선 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

윤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이 풀린 어깨를 내렸다. 잡고 있던 태무의 손을 매정하게 놓아버리고, 헝클어진 재킷 깃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상황은 대충 수습되었으니 전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내일 뵙죠, 본부장님."

윤서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뒤를 돌았다. 이 기괴한 하루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자판기 커피나 한 잔 때리며 한소희에게 전화를 걸 생각뿐이었다. 비서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였다.

뒤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빠르게 따라붙더니, 윤서의 어깨 너머로 긴 팔이 뻗어 나왔다.

*띠리릭-*

태무가 비서실 벽면에 있는 마스터 컨트롤 패널을 거칠게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려다 말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굳게 잠겼다.

"어……?"

윤서가 당황해 돌아보기도 전에, 태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그대로 차가운 대리석 벽면으로 몰아붙였다.

쿵, 하고 벽에 등을 부딪친 윤서의 귓가로 그의 거친 숨소리가 쏟아졌다. 태무의 눈동자가 평소의 이성적인 빛을 잃고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큰 몸집이 윤서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오 비서."

태무가 고개를 숙여 윤서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이 다가왔다. 그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입니까?"

"방금 그 말, 무슨 뜻입니까?"

태무가 고개를 숙여 윤서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이 다가왔다. 그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윤서의 척추를 타고 찌르르한 전류가 흘렀다. 어깨를 거칠게 움켜쥔 그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온기가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숨결이 닿은 귓가가 화끈거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것 같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의 손길을 타고 들어온 날것 그대로의 심음(心音)이 머릿속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미친놈이라니. 내가 미친놈인가? 하지만 섹시하다고 했다. 내 몸을 보고 흥분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광고를 한 건 오 비서 본인이야. 설마 평소에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심장이 왜 이렇게 뛰지? 제발 내 심장 소리가 오 비서한테 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들키면 본부장으로서의 권위가…….'*

겉으로는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 놓고, 속으로는 제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안달복달하는 꼴이라니. 윤서는 실소마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가슴뼈 깊은 곳에서부터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3초. 뇌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진실이 목구멍을 타고 거칠게 솟구쳤다. 윤서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당신 심장 소리가 지금 내 등에 사운드바 튼 것처럼 둥둥 울리는데 무슨 내숭이에요! 가슴은 또 왜 이렇게 쓸데없이 단단해서 사람 긴장하게 만듭니까? 100억 아니었으면 진작에 유도 기술로 엎어치기 했을 테니까 당장 손 떼요!"

비서실 복도에 윤서의 쩌렁쩌렁한 진심이 메아리쳤다.

태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움켜쥐고 있던 윤서의 어깨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벽을 짚은 채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잘생긴 미간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그의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모양새가 되었다.

"엎어치기라니, 과격하군. 하지만 내 가슴이 단단해서 긴장했다는 건 인정하는 겁니까?"

"비즈니스 파트너의 급작스러운 피지컬 공격에 신체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것뿐입니다. 에스파의 'Supernova'도 아니고 왜 혼자 쇠맛 나는 아우라를 풍기며 사람을 압박하십니까?"

윤서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정색하며 팩트를 날렸다.

"쇠맛이라니. 꽤 독특한 감상평이군. 하지만 당신 얼굴이 지금 내 셔츠보다 빨갛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오 비서?"

태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명이 붉은 탓입니다. 본부장님 귀끝이 지금 잘 익은 아오리 사과처럼 변한 것에 비하면 제 얼굴은 아주 평온한 수준이죠."

"이건…… 더워서 그런 겁니다. 비서실 에어컨 필터 청소를 언제 한 거지?"

태무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완벽주의 본부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소심하게 쩔쩔매는 꼴이 꽤 귀여웠다면, 그건 윤서가 미친 게 분명했다.

윤서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무의 가슴팍을 밀쳐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아무튼 상황은 대충 정리되었으니, 오늘 밤은 이만……."

그때였다.

태무의 양복 안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음이 울렸다. 태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차도현 비서실장'이었다.

"차 실장, 무슨 일입니까."

태무가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는 차도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흘러나왔다.

[본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방금 강승준 상무가 회장님 자택으로 직접 찾아갔습니다. 본부장님이 비서와 가짜 결혼을 꾸미고 언론 플레이를 하려 했다고 찌라시 사진들을 전부 밀고했습니다!]

윤서의 척추가 순식간에 빳빳하게 굳었다.

"승준 형이 할아버님께 직접?"

태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예! 회장님이 지금 노발대발하셔서 혈압약까지 드셨답니다. 그러고는 당장 오늘 밤 안으로 두 사람 성북동 저택에 짐 풀고 입주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만약 내일 아침에 직접 방문해서 두 분이 한 살림 차린 게 확인되지 않으면, 당장 경영권 승계 후보에서 탈락시키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내일 아침이라고?"

태무가 비서실 벽면의 디지털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은 오후 10시 45분. 회장님이 들이닥치기까지 남은 시간은 채 10시간도 되지 않았다.

[회장님이 성북동 저택 사택 관리인들에게 이미 지시를 내려놓으셨습니다. 두 분이 오늘 밤 안으로 들어오는지 실시간으로 보고받으시겠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고요해진 복도에서 윤서와 태무의 시선이 공중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쇼윈도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오늘 밤 당장 한 침대를 써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윤서의 머릿속에 '성북동 대저택 동거'라는 단어가 붉은색 경고등처럼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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