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뭡니까?"
강태무의 목소리는 한겨울 시베리아 벌판의 칼바람보다 더 건조했다.
오윤서는 입꼬리를 자로 잰 듯 정확히 15도 들어 올리며 비즈니스용 미소를 유지했다. 자그마치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마한, MJ 그룹 비서실의 인간문화재급 포커페이스였다. 그녀는 책상 위에 정갈하게 놓인 봉투를 손끝으로 가볍게 밀었다.
"사직서입니다, 본부장님. 만 3년 동안 MJ 그룹 TF 기획실에서 제 영혼과 척추 기립근을 갈아 넣었으니, 이제 제 뼈와 살을 돌려받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직서?"
태무는 책상 위에 놓인 하얗고 빳빳한 종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잘생긴 미간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깎아지른 듯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은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 조각상처럼 완벽했지만, 그 아래 풍기는 아우라는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를 서류 더미로 파묻어 버릴 기세였다.
"오 비서, 지금 장난합니까? 다음 주부터 프랑스 명품 브랜드와의 MOU 체결을 위한 핵심 TF가 가동됩니다. 이 시점에 비서실장이 자리를 비우겠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장난이라니요. 제 인생에서 가장 진지한 순간입니다."
윤서는 재킷 주머니에서 애용하는 메탈 바디의 볼펜을 꺼내 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볼펜 뒷부분을 빠르게 똑딱였다.
*똑딱, 똑딱.*
그녀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나오는 고유의 시그널이었다.
"지난 3년간 제 평균 수면 시간은 4시간이었습니다. 본부장님의 완벽주의 성격을 맞추느라 제 위장은 이미 만성 염증으로 도배가 됐고요. 빌리 아일리시의 우울한 노래가 제 인생 테마곡처럼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다. 이제는 남의 뒤치다꺼리가 아니라, 제 브랜드를 런칭해서 제 인생의 주도권을 잡고 싶습니다."
"독립이라."
태무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피식 웃었다. 그 오만한 태도에 윤서의 눈썹이 움찔했다.
"오 비서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모릅니까? 패션 업계는 오 비서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인 곳이 아닙니다. 당장 브랜드 하나 런칭하는 데 들어가는 기회비용과 유통망 확보 자금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입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적금이면 작은 팝업 스토어 정도는……."
"겨우 팝업 스토어 하나 열자고 내 밑을 나가겠다?"
태무가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대치하는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더 큰 판을 깔아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윤서는 볼펜을 똑딱이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큰 판이라니요?"
태무는 서랍에서 가죽 커버로 제본된 서류 한 부를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겉면에 금박으로 새겨진 글자가 윤서의 시야에 들어왔다.
[상호 합의에 따른 쇼윈도 부부 계약서]
눈을 의심했다. 윤서는 서류와 태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본부장님, 이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나와 1년간 가짜 부부 역할을 수행해 주면 됩니다."
태무의 목소리는 비즈니스 제안을 할 때처럼 지극히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할아버님께서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라는 명목으로 올해 안으로 결혼할 것을 강요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강승준 상무가 내 사생활을 꼬투리 잡아 언론에 흔들어대고 있는 것도 알고 있겠지. 나에겐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그리고 내 치부를 절대 발설하지 않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그 적임자가 바로 오윤서 비서, 당신이고."
윤서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계약 결혼이라니요. 지금이 무슨 90년대 신파 드라마도 아니고……."
"계약금은 세후 100억입니다."
순간, 윤서의 머릿속에서 경쾌한 캐시 레지스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팅-!*
100억. 세후 100억이라니.
평생을 비서로 일하며 상사의 온갖 히스테리를 받아내도 절대 만져볼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 돈이면 프랑스 유수의 유통망을 뚫는 것은 물론, 청담동 한복판에 빌딩을 세워 자신만의 메인 플래그십 스토어를 화려하게 오픈할 수 있었다. 남의 잔치를 빛내주는 조연이 아니라, 완벽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격상할 수 있는 마법의 열쇠였다.
태무는 흔들리는 윤서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셔츠 소매 끝에 달린 은빛 커프스링크 단추를 떼어내 윤서의 앞에 놓았다.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MJ 그룹 TF 기획실의 모든 기밀 구역과 메인 서버를 통제할 수 있는 초정밀 마스터 키카드가 내장된 물건이었다.
"이건 내 신뢰의 담보입니다. 이 커프스링크와 함께 100억 원의 자금을 보장하지. 1년만 내 아내로 대외적인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면, 계약이 종료되는 즉시 오 비서가 원하는 브랜드의 글로벌 런칭 자금을 전액 지원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텐데."
윤서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가혹한 연봉 노예 비서로 평생을 사느냐, 아니면 1년 동안 계약 부부라는 연극을 완벽히 수행하고 100억짜리 황금 열쇠를 쥐고 독립하느냐.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윤서는 테이블 위의 펜을 쥐었다.
"좋습니다. 계약 조항은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이행하겠습니다. 사적 감정 금지, 대외적 부부 역할 완벽 수행. 맞죠?"
"합리적인 선택이군요."
윤서는 거침없이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다. 계약서에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해방감과 승리감이 전신을 감쌌다. 늘 명령만 내리던 본부장 강태무를 상대로 100억 원짜리 딜을 성사시켰다는 도파민이 폭발했다. 이제 갑과 을의 관계는 미묘하게 뒤틀렸다.
"계약 성립입니다, 오윤서 씨."
태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윤서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윤서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윤서의 손가락을 감싸 안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치리릿-!*
마치 고압 전류가 척추를 타고 뇌하수체까지 다이렉트로 내리꽂히는 듯한 강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윤서의 시야가 하얗게 번쩍이더니, 이내 귓가에 웅장한 스테레오 사운드처럼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넌 내 곁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
분명 강태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윤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뭐지? 방금 이 목소리는?'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뇌 깊숙한 곳에서, 강태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사적인 비밀이 날것 그대로 흘러들어온 느낌이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윤서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머릿속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1년 계약? 웃기지 마. 내 비서로도, 내 아내로도 내 눈앞에 평생 묶어둘 거니까. 100억이 아니라 1,000억을 줘서라도 절대 안 보내.]
소름이 돋았다.
완벽하고 이성적인 줄만 알았던 강태무의 내면은 소심하고 엉뚱한 집착으로 가득 찬 혼돈의 카오스였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태무는 그녀의 손을 꽉 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뜨거운 불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여들었다.
'윽, 이게 왜 이러지?'
뇌리에 경고음이 울렸다.
*남의 속마음을 들은 대가로, 3초 이내에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육성으로 상대에게 고백해야 한다. 참으려 하면 심장 마비 수준의 통증이 따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규칙이 본능적으로 뇌리에 박혔다. 윤서는 입술을 짓깨물며 비명을 참으려 했다.
일개 비서가 본부장에게 그런 본심을 뱉어버린다면 계약이고 뭐고 당장 파탄 날 것이 뻔했다. 100억이 날아가 버린단 말이다.
"흡……!"
하지만 참으려 할수록 폐부의 산소가 순식간에 고갈되는 듯한 극심한 호흡 곤란이 찾아왔다.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1초, 2초…….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선 뱉어야 했다.
윤서는 결국 필터링을 완전히 상실한 채, 목청껏 본심을 내질렀다.
"100억 계약금 때문에 참는 거지 이 사악한 일중독자 놈아! 돈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사표 던지고 네 대가리에 서류 패스를 날렸을 거라고!"
"……."
순식간에 본부장실 안이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태무의 손이 굳었다.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확장되었다.
윤서는 제 입을 두 손으로 홱 틀어막았다. 미쳤다. 방금 내 입으로 무슨 소리를 지른 거지? 사악한 일중독자? 대가리에 서류 패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윤서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태무의 반응은 윤서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갔다.
태무는 굳어 있던 얼굴을 서서히 풀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 기묘한 흥분과 안달이 서려 있었다.
"호오…… 100억 때문에 참는다?"
태무가 한 걸음 다가왔다. 윤서는 저도 모르게 뒤로 침을 삼켰다.
"돈 때문에 억지로 참으면서 내 곁에 있겠다니. 내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그런 도발적인 멘트를 던지는 겁니까, 오 비서?"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솔직해서 마음에 드는군요. 날 사악한 일중독자라고 부른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꽤 신선한 플러팅 방식이군."
'플러팅이 아니라 진짜 욕한 건데 이 도끼병 말기 환자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윤서는 억지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또 손을 잡았다간 무슨 본심이 튀어나올지 몰라 몸을 잔뜩 움츠렸다.
어쨌든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태무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윤서의 거친 팩트 폭격에 더 깊이 매료된 눈치였다. 을에서 갑으로, 주도권이 완전히 윤서의 손으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계약은 체결되었으니, 내일부터 바로 성북동 저택으로 짐을 옮기도록 하세요. 대외적인 쇼윈도 부부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태무가 만족스러운 듯 커프스링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윤서는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가방을 챙겼다. 말도 안 되는 초능력과 페널티를 얻었지만, 100억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그럼 전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내일 뵙죠, 본부장님."
윤서가 뒤를 돌아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공간을 벗어난다는 안도감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려던 찰나였다.
*쿵-!*
문을 채 열기도 전에, 본부장실의 중후한 목제 문이 밖에서 세차게 걷어차이며 열렸다.
"어이, 사촌 동생! 비서랑 단둘이 방에서 아주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네?"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등장한 남자는 강태무의 사촌 형이자 MJ 그룹의 상무, 강승준이었다. 그의 뒤에는 플래시를 연신 터트려대는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승준은 특유의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비벼댔다.
"강태무 본부장님이 비서와 가짜 결혼을 모의한다는 찌라시가 돌아서 확인하러 왔는데,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카메라의 붉은 녹화 불빛들이 윤서와 태무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눈이 멀 것 같은 플래시 세례 속에서, 윤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