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일리리아 국경 산맥 끄트머리에 시커먼 마나 폭정을 뿜어내는 가주 레오나르드의 본진 마법 포탑들이 마침내 그 흉포한 위세를 드러냈다. 먹구름처럼 밀려드는 탁한 어둠 속에서, 쇠사슬이 긁히는 듯한 불쾌한 소음이 고원의 은빛 침묵을 잘게 조각내며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아이야, 가문의 고결한 은혜를 저버리고 이 척박한 무덤으로 도망쳐 온 대가가 고작 이것이냐."

검은 마차 위에서 레오나르도가 뿜어내는 거친 마나는 마치 메마른 가시나무 가지가 살을 긁는 것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그 앙상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흐를 때마다, 영지 가장자리에 아기자기하게 피어나던 은빛 눈꽃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나 엘리시아의 곁에는 든든한 대지처럼 서 있는 카일런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녀님. 제 몸이 바스러지더라도 이 검은 장벽이 공녀님의 발끝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카일런의 목소리는 신선하고 바삭한 아침 공기처럼 청량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가 엘리시아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기이할 정도로 뜨겁고 달콤한 온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라 그녀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체온이 아니었다. 혹한이 몰아치는 북부 고원에서도 단 한 번도 차갑게 식은 적 없던 그의 마나, 고대 불의 수호자이자 화룡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결한 태초의 불씨였다. 그 따스한 온기가 엘리시아의 얼어붙어가던 손가락 끝을 보드라운 솜사탕처럼 녹여 주었고, 정령의 잠이라는 가혹한 대가로 차갑게 식어가던 그녀의 심장을 새콤달콤한 생기로 다시 콩닥거리게 만들었다. 카일런의 뜨거운 마나가 엘리시아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며 정령 동화율의 부작용을 완벽하게 억제해 주는 순간이었다.

엘리시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일리리아의 오염된 정원에서 발견했던, 금이 가고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 씨앗이 들어 있었다. 차디찬 얼음 껍질에 갇혀 긴 세월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작은 생명체였다.

"보레아스, 준비해줘."

엘리시아가 맑고 고결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에메랄드빛 바람의 태초 정령 보레아스가 화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그녀의 어깨 위로 쪼르르 내려앉았다. 보레아스는 레오나르도의 시커먼 포탑을 향해 작은 뺨을 부풀리며 쉭쉭 소리를 냈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기만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령의 서릿발 같은 분노가 달콤한 민트 향 바람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지저분하고 끈적한 구름은 마음에 안 들어, 엘리! 당장 날려버릴래!"

"응, 조금만 기다려줘.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엘리시아는 품속에서 꺼낸 푸른 씨앗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차갑고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씨앗의 표면은, 엘리시아의 정화된 마나와 카일런이 나누어준 화룡의 뜨거운 온기가 닿자마자 기적처럼 반응하기 시작했다.

바삭바삭한 얼음 껍질이 달콤한 설탕 시럽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그 틈새로 눈이 부시도록 맑고 영롱한 백은빛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씨앗은 마치 아기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듯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잎사귀를 꼬무락거리며 펼쳤다. 씨앗에 깃들어 있던 태초의 성스러운 영혼이 마침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이건…… 성스러운 세계수의 씨앗이군요."

카일런이 숨을 삼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에 은빛으로 넘실거리는 씨앗의 온화한 빛이 은은하게 반사되었다.

"맞아요, 카일런. 가문이 오염시키고 버려두었던 이 땅의 심장에, 이제 진짜 주인을 돌려주어야 할 시간이에요."

엘리시아는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일리리아 성채의 중심, 우윳빛으로 맑게 소용돌이치는 천공 샘을 향해 걸어갔다. 보레아스와 바람의 정령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축하하듯 보드라운 솜털 같은 바람을 일으켜 치맛자락을 가볍게 띄워 주었다.

저 멀리 국경 방벽 너머에서는 레오나르도가 이끄는 전사대의 마법 포탑들이 웅웅거리며 대지를 진동시키고 있었지만, 일리리아의 기사들은 카일런의 지휘 아래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견고한 대형을 유지했다. 그들의 검 끝에는 카일런의 붉고 고결한 불꽃 마나가 깃들어, 검은 안개를 밀어내며 향긋한 솔잎 향을 풍겼다.

천공 샘의 물가에 다다른 엘리시아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투명하고 맑은 우윳빛 샘물은 마치 갓 짜낸 신선한 우유처럼 부드러운 질감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모아, 완전히 정화되어 눈부신 은빛으로 빛나는 푸른 씨앗을 샘물의 가장 깊은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일리리아의 대지여, 오랫동안 차가운 어둠 속에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제 따뜻한 집으로 돌아와 줘."

엘리시아의 진심 어린 약속이 대기에 닿는 순간, 등가교환의 법칙을 수호하는 정령들의 고결한 룰이 발동했다. 인간의 기만이 아닌, 순수한 애정과 헌신으로 가득 찬 조율관의 손길에 천공 샘이 거대한 우윳빛 빛의 기둥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콰아아앙!

은은하면서도 웅장한 진동이 고원 전체를 감싸 안았다. 샘물의 한가운데에서부터 시작된 은빛의 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단 몇 초 만에 하늘을 찌를 듯이 거대한 백은의 정령 세계수로 발아하기 시작했다.

파스텔톤의 분홍빛과 하늘빛 잎사귀들이 몽글몽글한 구름처럼 피어났고, 단단하고 매끄러운 백은빛 가지들은 마치 거대한 수호자의 팔처럼 뻗어 나가 일리리아 전체를 감싸 안는 난공불락의 고위 정령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것은 단순히 방어벽에 그치지 않았다. 세계수가 뻗어낸 백은빛 뿌리들이 오염되어 굳어 있던 흙 속을 부드럽게 파고들며 정화의 파동을 일으켰다. 시커멓게 썩어 가던 땅이 순식간에 수분을 가득 머금은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흙으로 변해 갔다.

스으으읍, 파아아아.

마치 대지가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척박했던 고원 곳곳에서 향긋한 풀꽃들이 화사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달콤한 무화과 향과 새콤한 야생 베리 향이 실린 보드라운 바람이 불어와, 레오나르도가 뿌려대던 시커먼 마나의 악취를 단숨에 씻어내 버렸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열린 황금빛 열매들은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싱그럽고 달콤한 과즙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일리리아 영지의 정화율이 마침내 100%에 도달하며, 대지가 지닌 무한한 생명력이 복리로 폭발하는 기적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성채 주변에 모여 있던 영지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말랑말랑한 흙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땅이…… 땅이 살아났다! 차가운 서리가 아니라, 정말로 따뜻한 봄 흙이야!"

"공녀님께서 우리에게 진짜 낙원을 주셨어!"

영지민들의 눈에서 흘러내린 기쁨의 눈물이 흙바닥에 떨어지자, 그 자리에서 아기자기한 노란 민들레들이 피어나 방긋 웃음을 지었다. 조그만 다람쥐와 겨울새들이 세계수의 가지 사이를 조잘거리며 날아다녔고, 은빛 고원은 순식간에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따스하고 평화로운 성지로 탈바꿈했다.

이 놀라운 광경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들이 있었다. 제국 황실에서 파견된 사절단이었다. 그들은 원래 일리리아를 버려진 유배지이자 무가치한 불모지로 여겨, 공작가의 침공을 묵인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백은의 세계수와, 그 아래에서 정령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엘리시아를 본 순간 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절단의 단장인 노백작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눈에 비친 엘리시아는 더 이상 가문에서 도망친 병약한 셋째 딸이 아니었다. 자연의 신성을 온몸에 두르고, 태초의 정령 보레아스를 어깨에 얹은 채 대지를 다스리는 위대한 지배자였다.

"이, 이것은…… 신화 속에서나 전해지던 세계수의 부활이 아닌가! 정령들의 언어를 조율하고 대지를 구원한 진정한 기적이다!"

노백작은 더 이상 레오나르드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는 엘리시아의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제국 사절단 전원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제국 황실을 대신하여 선포합니다. 이곳 은빛 고원 일리리아는 더 이상 버려진 유배지가 아닙니다. 태초의 세계수와 정령들의 축복을 받는 신성한 영토이며, 엘리시아 공녀님은 이 대지의 유일하고 존엄한 '은빛 정령 왕녀'이십니다! 그 어떤 가문도, 그 어떤 권력도 이 성스러운 영토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그 선포가 대기에 울려 퍼지는 순간, 카일런이 엘리시아의 옆에 서서 검을 땅에 꽂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뜨거운 마나가 그녀의 발밑을 따스하게 데워 주었다.

"일리리아의 모든 기사와 영지민들은, 우리의 유일한 군주이신 은빛 정령 왕녀 엘리시아 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왕녀 님을 위하여! 일리리아를 위하여!"

수천 명의 영지민과 기사들이 외치는 함성이 백은의 세계수 잎사귀들을 기분 좋게 흔들었다. 바람의 정령들이 은방울 소리 같은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하늘을 수놓았다.

반면, 국경 너머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레오나르도의 얼굴은 썩은 낙엽처럼 검푸르게 죽어갔다. 가문이 쓸모없다며 쓰레기처럼 버려둔 북부의 땅이, 자신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정령의 성지로 완벽하게 부활한 것도 모자라 제국 황실로부터 완전한 독립령이자 성지로 공인받은 것이다.

자신이 휘두르려던 마법 포탑의 시커먼 마나는 세계수가 뿜어내는 은빛 정화의 장벽에 가로막혀 감히 국경선조차 넘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엘리시아를 다시 잡아 가두고 마나를 착취하려던 그의 흉계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는 통쾌한 순간이었다.

"크으윽……! 주권이라고? 고작 저 계집아이 따위가 왕녀라고?!"

레오나르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질투와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의 가슴팍이 거칠게 들썩였다. 줄리아 역시 옆에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엘리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요! 저 계집애가 가문의 힘을 훔쳐 간 게 분명해요! 당장 저 나무를 베어버려야 해요!"

"닥쳐라, 줄리아!"

레오나르도가 앙상한 손으로 마차의 난간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독기가 가득 차올랐다. 세상의 인정과 제국의 선언 따위는 그의 탐욕을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빼앗고 싶은 보물이 더 거대해졌을 뿐이었다.

"감히 내 것을 훔쳐 가고도 온전할 줄 알았더냐. 제국이 너를 지켜줄 것 같으냐!"

레오나르도가 지팡이를 대지에 강하게 내리쳤다. 그 순간, 국경 산맥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고원의 향긋한 흙내음을 단숨에 지워버리는 가혹하고 비린 쇠 냄새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일리리아의 아름다운 대지 밑바닥에서 기괴한 진동이 울렸다. 엘리시아는 품속에 있던 정령 한계 수집기의 설계도를 떠올리며 자줏빛 눈동자를 크게 떴다. 레오나르드가 지하에 은밀하게 매설해 두었던 가문의 금기이자 극악무도한 병기, '정령 소멸 한계 포집기'가 붉은빛을 뿜으며 강제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정령의 숨결을 찢어 발겨라! 일리리아의 대지가 머금은 모든 양분을 모조리 빨아들여 가문의 봉인석으로 만들 것이다! 대지가 말라죽든, 정령들이 소멸하든 상관없다!"

레오나르드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세계수의 은빛 방벽 밑바닥에서부터 시커먼 마나의 이빨들이 솟구쳐 오르며 맑고 투명하던 대지를 검붉게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겨우 되찾은 일리리아의 봄이, 다시 한번 참혹한 소멸의 위기 앞에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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