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웅웅웅웅!

대지 밑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비린 쇠 냄새가 맑고 향긋한 풀잎 내음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발밑에서 시작된 기괴한 진동에 은빛 고원의 부드러운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레오나르드 로웰이 지팡이로 내리친 땅속 깊은 곳,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가문의 금기이자 탐욕의 결정체인 ‘정령 소멸 한계 포집기’가 시뻘건 안개를 뿜어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엘리시아!"

카일런이 묵직한 대검을 고쳐 잡으며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단단한 어깨 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마나의 장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그의 몸에서는 언제나처럼 한겨울의 혹한을 단숨에 녹여버릴 듯한 기이하고도 포근한 모닥불 같은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자신의 품알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서늘하면서도 가죽의 질감이 부드러운 가문의 기밀 밀서였다. 지난날 지하 광산에서 생포했던 로웰 가문의 첩자가 소지하고 있던, ‘정령 한계 수집기’의 상세한 설계도와 파괴 규칙이 담긴 비급 문서였다.

"공녀님, 저 붉은 마수가 대지의 숨통을 옥죄고 있습니다.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카일런의 낮은 목소리에는 영지민들을 지키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와 엘리시아를 향한 깊은 염려가 몽글몽글하게 섞여 있었다. 주변의 가녀린 들개들과 은빛 고원의 작은 산새들이 날갯짓을 다급하게 하며 세계수 가치 위로 피난처를 찾아 날아올랐다.

"아니요, 카일런. 피할 필요 없어요."

엘리시아는 바스락거리는 양장 밀서를 펼쳐 들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붉은 잉크로 정밀하게 그려진 기하학적인 마법 회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가문의 마법사들이 정령의 숨결을 강제로 옥죄기 위해 고안해 낸 역겨운 탐욕의 지도였지만, 그 안에는 창조한 자들의 오만이 낳은 치명적인 결함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이 장치는 정령의 마나를 무한정 빨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하지만 조율되지 않은 순수한 태초의 파장을 한꺼번에 들이마시면, 내부의 역정화 회로가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하게 되어 있죠."

엘리시아의 자줏빛 눈동자가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듯 맑게 빛났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대지를 지키기 위해 잔뜩 화가 난 바람의 태초 정령, 보레아스 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대기 중의 구름을 솜사탕처럼 하얗게 뭉치고 있었다. 보레아스는 엘리시아의 시선이 닿자, 마치 사랑스러운 아이가 응석을 부리듯 그녀의 뺨가에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 꽃향기가 나는 미풍을 실어 보냈다.

"보레아스,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 들린다, 나의 작은 조율사여. 저 추악한 쇳덩이가 우리의 조화로운 정원을 더럽히려 하는구나. 당장 저것을 갈기갈기 찢어 발겨 대지의 거름으로 삼아주랴?

보레아스의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귓가에 맑은 유리종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정령들은 인간의 사소한 기만에도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지만, 자신들과 진정으로 등가교환의 법칙을 나누는 엘리시아에게만큼은 한없이 너그럽고 보드라운 민들레 씨앗 같은 호의를 베풀었다.

"찢어버릴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저들의 탐욕스러운 아가리에 우리가 가진 가장 순수하고 풍요로운 생명의 숨결을 가득 채워주는 거예요."

엘리시아는 품속에서 또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일리리아의 버려진 정원에서 처음 발견했던, 금이 가고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푸른 씨앗이었다. 한때는 죽은 듯이 고요해 아무런 온기도 느끼지 못했던 그 작은 씨앗이, 이제는 엘리시아의 따뜻한 손바닥 위에서 쿵, 웅, 하고 살아 있는 어린 새의 심장처럼 세차게 맥박질하고 있었다.

카일런이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다가와 자신의 커다란 손을 엘리시아의 손 위에 겹쳐 얹었다.

그 순간,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뜨거운 온기, 고대 화룡의 축복이자 불의 수호자로서 지닌 태초의 불씨가 엘리시아의 차가운 정령 동화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차갑게 얼어붙어가던 엘리시아의 손끝이 카일런의 살결이 닿자마자 봄날의 햇살을 받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며 발그레한 생기를 되찾았다.

"제 마나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이 땅과 당신을 지키는 일이라면 기꺼이 온몸을 불사르겠습니다."

카일런의 진솔한 눈빛이 엘리시아의 마음에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을 선사했다. 그의 뜨겁고 혹한을 타지 않는 강력한 마나가 푸른 씨앗에 전해지자, 씨앗의 표면에 가 있던 미세한 금 사이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사파이어빛 광채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카일런. 이제 시작해요."

엘리시아가 두 손을 모아 쥐고 정령의 언어를 노래하듯 읊조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청아한 음색은 타락한 마나로 물들어가던 국경의 차가운 공기를 단숨에 정화하는 신비로운 파동이 되어 퍼져나갔다.

오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엘리시아의 손바닥 안에서 맥박 치던 푸른 씨앗이 마침내 눈부신 빛의 기둥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단순히 싹을 틔우는 수준이 아니었다. 씨앗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자마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굵직한 우윳빛 줄기를 뻗어 올리며, 은빛 수액을 가득 머금은 거대한 세계수로 폭증개화하기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

단 몇 초 만에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하게 자라난 세계수의 가지마다 보석처럼 투명하고 맑은 푸른 잎사귀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은빛 고원 일리리아의 대지가 100% 완벽하게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공기 중을 떠돌던 검붉은 타락의 마나 찌꺼기들이 세계수가 뿜어내는 싱그러운 수채화 같은 정화의 파동에 쓸려 눈 녹듯 사라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저 나무가 가문의 마나를 거부하고 있어!"

국경 저편에서 마차 난간을 붙잡고 있던 줄리아 로웰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레오나르도가 심혈을 기울여 작동시킨 '정령 소멸 한계 포집기'는 정령들의 비명 대신, 세계수가 뿜어내는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순수한 생명의 마나와 보레아스가 몰고 온 초고농도의 바람 마나를 한꺼번에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웅웅웅! 콰과과광!

"크헉! 장치가…… 장치가 제어되지 않는다!"

로웰 가문의 마법사들이 소리치며 포탑 제어 장치에서 손을 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엘리시아가 지시한 대로, 포집기의 내부 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초고농도의 깨끗한 대지정령 마나로 가득 차 과부하 상태에 도달했다. 붉은 마력 핵이 터질 듯이 팽창하더니, 이내 푸른빛의 정화 마나와 충돌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지하에 매설되어 있던 포집 장치들이 연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그러나 그 폭발의 불꽃은 일리리아의 대지를 해치지 않았다. 엘리시아의 역정화 유도로 인해, 폭발하는 모든 마력의 역류 에너지는 오직 그것을 매설하고 조종하던 시전자들에게로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아아악! 내 마나가! 내 마나 회로가……!"

레오나르도 로웰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놓쳤다.

포집기에서 역류한 시커먼 마나의 사슬들이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그가 일평생 동안 무고한 정령들을 착취해 강제로 쌓아 올렸던 자비 없는 조율 마나를 가차 없이 불태워버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 안에서 마나가 급격히 소멸하며, 가문의 상징이던 화려한 마법의 기운이 썩은 동아줄처럼 끊어져 나갔다.

"아, 아버지! 마법이…… 마법이 안 통헤요! 아버님의 마나 홀이 닫히고 있어요!"

줄리아가 사색이 되어 레오나르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미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하얗게 새어버렸고, 팽팽하던 피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글쪼글하게 주름져 늙어버렸다. 평생을 오만하게 군림하던 위대한 공작가의 가주가, 단 한순간에 마법을 전혀 부릴 수 없는 초라하고 무능력한 노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가문이 엘리시아를 핍박하고 정령들을 도구로 삼기 위해 가져왔던 가장 사악한 무기가, 결국 자신들의 목숨줄과 평생 모아온 모든 권력의 지위를 가루로 만들어버린 완벽한 단죄의 순간이었다.

"말도 안 돼…… 저 계집애가 감히 아버지를……!"

줄리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때, 포집기가 파괴되면서 국경 산맥의 암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덩이들과 포탑의 불타는 기둥 잔해들이 엘리시아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쏟아져 내렸다.

"위험합니다!"

카일런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한 손으로 엘리시아의 가냘픈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대검을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스아아아아!

카일런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고대 화룡의 뜨겁고 붉은 불꽃이 장막을 형성하며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와 잔존하는 붉은 마력 결계를 단숨에 가르고 길을 열었다.

콰앙! 콰과광!

거대한 바위들이 카일런이 만든 온기의 결계에 닿자마자 모래 먼지가 되어 사방으로 부드럽게 흩어졌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품은 차가운 북부의 바람 속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아늑한 요람 같았다. 고원의 살가운 흙내음과 카일런의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체온이 그녀의 감각을 가득 채웠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공녀님?"

카일런이 고개를 숙여 엘리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거칠지만 다정한 손가락이 엘리시아의 뺨에 묻은 은빛 먼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엘리시아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요, 카일런. 전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은빛 고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세계수의 잎사귀처럼 싱그럽고 단단했다.

이제 국경을 위협하던 가문의 군대는 붕괴했고, 대지는 완벽한 정령의 축복 아래 은빛의 풍요로움을 되찾았다. 공작가의 탐욕스러운 깃발은 불타는 잔해 속에서 볼품없이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단죄의 여운이 대지에 내려앉기도 전, 무너진 마차의 잔해 속에서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하하…… 하하하핫! 이대로 끝낼 것 같아? 네년이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줄리아 로웰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품속에서 검붉은 빛을 내뿜는 정체불명의 마법 구체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가문의 비전 중에서도 가장 금기시되는, 시전자의 생명력과 주변의 모든 마나를 강제로 융합해 폭발시키는 고대 자폭 장치 마법 구체였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너도 가질 수 없어! 이 더러운 벌레들과 함께 전부 지옥으로 가버려, 엘리시아!"

줄리아가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자폭 장치에 자신의 남은 생명 마나를 거침없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구체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붉고 치명적인 균열을 뻗어 나갔다. 은빛 고원의 평화가 다시 한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멸의 위기 속에 휩싸이려는 순간이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