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승전의 환성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엘리시아의 작은 심장 고동 소리가 멈추며, 피부 전체가 차디찬 서리로 가차 없이 뒤덮이며 눈을 감았다.

"공녀님! 엘리시아!"

카일런의 다급한 외침이 싱그러운 은빛 고원의 바람 속으로 안타깝게 흩어졌다. 방금 전까지 푸른빛과 우윳빛의 영롱한 광역을 뿜어내며 찬란하게 정화되었던 고원 크리스탈 광맥의 화사한 광채가, 엘리시아의 꺼져가는 생명력과 함께 애처롭게 흔들렸다. 보드라운 은발 사이로 돋아난 투명한 얼음 결정들이 그녀의 가냘픈 이마를 하얗게 뒤덮었고, 보들보들한 뺨은 이미 온기를 잃고 차가운 대리석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정령의 위대한 힘을 조율한 혹독한 대가였다. 영혼의 동화율이 한계를 넘어 치솟을 때마다 찾아오는 지독한 정령의 잠이, 가냘픈 아기 공녀의 영혼을 깊고 푸른 가사 상태의 심연으로 사정없이 끌어내리고 있었다.

카일런은 주저하지 않고 엘리시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억센 팔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보드라운 깃털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아 올렸다.

"비켜라! 신전으로 간다!"

그의 목소리는 거친 천둥처럼 울렸지만, 눈빛만은 얇은 유리잔을 쥐어 든 아이처럼 극도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품에 안긴 아기가 너무나 가벼워서, 그리고 차가워서 그의 가슴이 예리한 얼음 가시로 찔린 듯 아려왔다. 카일런의 단단한 가슴팍에 기대어진 엘리시아의 작은 머리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고, 오직 품속에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금이 가고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 씨앗'만이 그녀의 미약한 영혼의 끈을 대변하듯 고요한 빛을 미세하게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의 태초 정령 보레아스가 걱정스러운 듯 향긋한 바람을 웅웅거리며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맑고 투명한 바람의 입자들이 엘리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으나, 정령의 힘으로는 차갑게 얼어붙어 가는 동화율의 저주를 풀 수 없었다. 오히려 정령의 마나가 닿을 때마다 서리는 더욱 단단하고 두껍게 굳어질 뿐이었다.

"더는 정령의 마나를 가까이하지 마라! 지금 공녀님께 필요한 건 정령의 힘이 아니다!"

카일런은 보레아스를 향해 소리치며, 성채 안쪽에 자리한 오래되고 고요한 신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눈밭마다 붉고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차가운 눈송이들을 순식간에 몽글몽글한 물방울로 바꾸어 놓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카일런은 엘리시아를 감싸 쥔 팔에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신전의 육중한 돌문을 어깨로 밀치고 들어서자, 오래된 대리석 제단 위로 은은하고 화사한 오후의 햇살이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카일런은 떨리는 손으로 엘리시아를 제단 앞의 푹신하고 포근한 양털 양탄자 위에 눕혔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완전한 빙결 상태에 접어들어, 보드라운 옷자락 끝마저 서슬 퍼런 얼음 가시로 단단하게 변해 있었다.

"엘리시아…… 제발, 제발 눈을 떠 주십시오."

카일런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어붙은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커다란 손길이 닿자마자 찌르르한 한기가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으나, 그는 손을 놓기는커녕 더욱 굳건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고인 절박한 눈물이 송골송골 맺히다가, 이내 엘리시아의 하얗게 질린 뺨 위로 툭 떨어졌다.

그 눈물방울은 따뜻했다. 아주 오래전, 따스한 모닥불 가에서 나누었던 소박한 대화의 온기처럼, 그리고 힘겨운 개척의 길을 묵묵히 동행하며 쌓아 올린 달콤하고 정갈한 신뢰의 두께만큼 뜨거웠다.

'나를 지켜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만의 따뜻하고 자유로운 보금자리를 함께 만들자고, 그렇게 보드라운 목소리로 약속해 주지 않았던가.'

카일런의 가슴 속에서 정체 모를 거대한 요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리리아의 매서운 혹한 속에서도 그가 결코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었던, 뜨겁다 못해 화사하게 타오르는 기이한 마나의 원천이었다. 고대 불의 수호자이자 고결한 화룡의 축복을 이어받은 혈통의 숨겨진 불씨가, 엘리시아를 향한 그의 애절하고 절박한 감정과 맞물려 마침내 거대한 화산처럼 폭발해 버린 것이다.

"당신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내 목숨을 다해서라도, 내 영혼을 태워서라도 당신을 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꺼내올 것입니다."

카일런이 엘리시아를 품에 안고 영혼의 깊은 절규를 토해내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눈이 시리도록 화사하고 찬란한 금빛과 붉은빛의 마나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파괴적인 불꽃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새싹을 틔워내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포근한 봄날의 햇살을 닮은 온기였다.

화사한 붉은 마나의 줄기들이 신전 내부를 가득 채우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쌓여 있던 서리들을 순식간에 향긋한 봄이슬로 바꾸어 놓았다. 카일런의 가슴팍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대 불꽃의 온기가 엘리시아의 얼어붙은 몸을 누에고치처럼 둥글고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찌르르, 쩍-!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절망적이었던 정령의 잠이, 카일런의 고결한 불꽃 마나가 지닌 압도적인 열량 앞에서 마침내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엘리시아의 온몸을 꽁꽁 묶고 있던 푸른 서리들이 투명한 유리 파편처럼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아……."

카일런의 떨리는 눈동자 속으로, 엘리시아의 보드라운 피부 위로 천천히 붉은 생기가 돌아오는 기적 같은 장면이 담겼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손끝이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온기를 되찾았고, 멈추어 있던 작은 심장이 다시 한번 콩닥콩닥하며 활기찬 고동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엘리시아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조율관의 힘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카일런의 고대 불꽃 마나가 그녀의 영하 동화율을 완벽하게 상쇄하고 정화해 주자, 그동안 그녀의 여린 육체를 압박하던 마나의 한도가 완전히 깨어지며 무제한적인 새로운 한계점이 해제된 것이다.

그녀의 품속에 있던 '금이 가고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 씨앗' 역시 카일런의 따스한 마나를 듬뿍 머금고는, 마치 봄을 맞이한 꽃망울처럼 말랑말랑하게 맥박 치며 영롱한 초록빛을 은은하게 뿜어냈다. 차갑게 얼어붙어 흐름이 막혀 있던 마나의 통로가, 이제는 마치 달콤하고 향긋한 꿀물이 흐르듯 부드럽고 풍요롭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안정이 찾아왔다.

엘리시아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보드라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맑고 투명한 자줏빛 눈동자가 카일런의 붉게 충혈된 눈과 마주쳤다.

"카…… 일런……?"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조금 잠겨 있었으나, 그 어떤 달콤한 열매보다도 향긋하고 따스했다.

카일런은 대답 대신 그녀를 더욱 깊이 품에 안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안도감으로 가볍게 떨렸고, 뜨거운 눈물방울이 엘리시아의 보드라운 뺨을 적셨다. 엘리시아는 제 뺨에 닿는 그의 눈물이 기분 좋게 따스하다고 생각하며, 작은 손을 들어 그의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울지 마세요, 카일런. 저 여기 있어요. 아주 따뜻해요."

그녀의 말랑말랑한 손길이 닿자, 카일런은 비로소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을 풀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고 단단한 신뢰가 서로의 영혼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신전 밖에서 이 기적적인 순간을 지켜보던 작은 새들이 짹짹거리며 화사한 노랫소리를 지저귀었고, 정령 보레아스 역시 기쁨의 웅웅거림을 흘리며 성채 주변을 맑고 깨끗한 바람으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달콤하고 평화로운 안도감은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기괴하고 거친 진동이 신전의 단단한 돌벽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보드라운 햇살이 비치던 신전의 창밖으로, 순식간에 탁하고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가로막았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일리리아 국경 산맥의 하얀 눈 사면 끄트머리에, 기분 나쁜 검붉은 마나를 뿜어내는 거대한 철제 구조물들이 우뚝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가문에서 정령들을 강제로 포획하고 쥐어짜기 위해 제작한 금단 유물, '정령 한계 수집기'의 본체와 그것을 보조하는 마법 포탑들이었다.

그 포탑들 위로 가주 레오나르도 로웰의 오만하고 차가운 실루엣이 비쳤고, 그가 내뿜는 사악하고 거친 마력이 일리리아의 맑은 정화막을 거칠게 찢어발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시아의 자줏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품속에서 확보해 둔 첩자의 밀서와 설계도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 사악한 포탑들의 심장부에는, 마나가 역류하면 단숨에 폭발해 버리는 치명적인 설계 결함이 숨겨져 있었다.

"결국, 직접 오셨군요. 아버지."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손을 꼭 쥐며,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국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가문과의 마지막 결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카일런의 단단한 손길은 한겨울 벽난로가 전해주는 잘 말린 참나무 장작의 온화하고 포근한 열기처럼 무척이나 다정했다. 엘리시아는 품속에서 조금 구겨졌지만 은은하고 향긋한 라벤더 향기가 묻어나는 두꺼운 양가죽 종이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것은 가문의 은밀한 움직임을 감시하던 첩자의 품에서 확보했던, 정령 한계 수집기의 상세한 내부 설계도였다.

"이 기괴하고 사악한 기계는 오직 탐욕스러운 흡수만을 위해 설계되었어요."

엘리시아의 보드랍고 나직한 목소리가 투명한 유리 구슬이 굴러가듯 맑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끝으로 도면 중앙에 그려진, 부드러운 양가죽 위에 칠해진 마나 순환로를 가리켰다.

"상대의 힘을 강제로 빼앗아 제어하는 데만 치중하느라, 역방향으로 흘러들어오는 순수한 마나를 걸러내는 완충 장치가 전혀 없지요."

그것은 가문의 잔인한 가주가 저지른 가장 크고 치명적인 설계 결함이었다. 조율관의 맑고 영롱한 마나와 보레아스의 싱그러운 바람이 한꺼번에 역류하여 침투한다면, 저 오만한 철제 괴물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와장창 부서져 내릴 터였다.

마치 먹구름의 위협을 감지한 듯, 정원 구석에 숨어 있던 솜털처럼 보드라운 하얀 들쥐들이 초롱초롱한 눈방울을 깜빡이며 엘리시아의 발끝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카일런은 굳건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엘리시아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어깨 위로 자신의 도톰하고 포근한 가죽 망토를 다정하게 덮어주었다. 망토에서는 향기로운 솔잎 향과 기분 좋은 흙내음이 은은하게 풍겨와, 엘리시아의 마음에 새콤달콤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공녀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면, 저와 일리리아의 기사들이 그 앞을 가로막는 검은 장벽을 모두 부수어 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신선하고 바삭한 아침 공기처럼 청량하면서도, 대지의 바위처럼 든든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고대 불꽃의 고결하고 따스한 마나가 엘리시아의 작은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매서운 북풍 속에서도 그녀가 단 한 줌의 서리조차 느끼지 않도록 따스한 방벽이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성채의 견고한 돌계단을 내려가, 은빛 고원의 입구를 지키는 아기자기하고 튼튼한 나무 방벽으로 향했다. 방벽 너머의 풍경은 마치 투명하고 아름다운 수채화 도화지 위에 시커먼 먹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이끄는 대규모 전사대는 싱그럽고 여린 풀밭을 짓밟으며 앙상한 가시나무처럼 몰려왔다.

"어리석은 아이야, 가문의 고결한 은혜를 저버리고 이 척박한 무덤으로 도망쳐 온 대가가 고작 이것이냐."

칠흑 같은 검은 마차 위에서, 레오나르도가 들고 있는 기괴한 지팡이가 웅웅거리며 붉고 탁한 안개를 뿜어냈다. 그의 목소리가 대기를 타고 흐를 때마다, 아기자기하게 피어나던 눈꽃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품속에서 기분 좋게 콩닥거리는 푸르고 싱그러운 씨앗의 움직임을 느끼며, 자줏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제게 은혜를 베푼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가주 님."

엘리시아가 조율관의 맑고 고결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보레아스가 높이 솟구치며 에메랄드빛 찬란한 바람의 소용돌이를 화사하게 일으켰다.

그 순간, 가주의 사악한 미소와 함께 검은 수집기가 우윳빛과 푸른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던 고원 크리스탈 광맥을 조준했다. 포탑의 끝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마나 폭풍이, 향긋했던 일리리아의 하늘을 완전히 뒤덮으며 대지를 흔들었다.

"모든 동력을 개방해라! 저 하찮은 광맥과 정령들의 숨결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여 가문의 봉인석으로 삼을 것이다!"

광맥이 통째로 뽑혀 나갈 듯한 위기 속에서,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든든하고 뜨거운 팔을 붙잡은 채 역류의 조율을 시작해야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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