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로웰 가문의 용병대……."

엘리시아는 여전히 서늘한 온기가 가시지 않은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카일런의 넓고 든든한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아침 햇살을 듬뿍 머금은 벽난로처럼 뜨끈하고 보드라운 온기가 그녀의 여린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뺨에 닿는 그의 단단한 가죽 갑옷의 감촉은 낯설었지만, 그 틈새로 흘러나오는 온도만큼은 시린 겨울날 마시는 따뜻한 우유처럼 달콤하고 포근했다.

그녀의 어깨너머에서 투명한 민트빛 날개를 파르르 떨던 바람의 태초 정령 보레아스가 낮게 웅얼거렸다. 보레아스의 맑고 서늘한 숨결이 엘리시아의 귓가를 스치며, 마치 눅눅하게 썩어가는 여름날의 안개 같은 불쾌한 마나의 냄새가 저 아래 지하에서 풍겨오고 있음을 속삭였다.

카일런은 엘리시아의 이마에 닿았던 제 볼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그녀의 작은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 속에는 굳건한 바위 같은 결의와 함께,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애틋함이 일렁이고 있었다.

"엘리시아, 그대 몸에 아직 서리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그대는 당장 성채의 따뜻한 온실로 돌아가 쉬어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가죽처럼 낮고 묵직했으나, 그 안에는 물러설 수 없는 완강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동그랗고 맑은 눈망울이 흔들림 없이 카일런의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요, 카일런. 그들은 제 정령의 기운을 쫓아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거예요. 제가 가야만 그 비열한 덫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정화할 수 있어요. 제 몸은 괜찮아요. 당신의 온기가 이렇게 잘 지켜주고 있는걸요."

말을 마친 엘리시아가 카일런의 커다란 손등 위에 자신의 작은 손을 가만히 얹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기이할 정도로 뜨겁고 혹한을 전혀 타지 않는 카일런만의 마나가 그녀의 얼어붙은 심장 밑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신비로운 열기에 반응하듯, 엘리시아의 품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금이 가고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 씨앗이 아주 미약하지만 온화한 진동을 일으켰다.

카일런은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직감한 듯,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느리게 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알겠다. 하지만 내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네, 약속할게요."

엘리시아가 새하얀 솜사탕처럼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굴 벽 틈새의 하얀 털을 가진 아기 박쥐들이 안심했다는 듯 쪼르르 기어 나와 날개를 파닥였다.

그들은 곧바로 은빛 고원의 심장부이자, 일리리아 영지의 젖줄이 될 마나 광산 지하 공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지 순찰 기마대원들이 횃불을 밝히며 그들의 앞과 뒤를 삼엄하게 호위했다. 눅눅하고 서늘한 동굴의 공기가 피부를 스쳤지만, 카일런이 엘리시아의 손을 꽉 쥔 채 한시도 놓지 않았기에 서릿발 같은 냉기는 감히 그녀의 몸을 침범하지 못했다.

광산 깊은 곳으로 들어설수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뚝, 뚝. 차가운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흐를 때마다 엘리시아의 눈앞에 흐릿한 마나의 실선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보통의 마법사들이라면 그저 어둡고 축축한 공동으로만 보였겠지만, 영혼의 조율관인 엘리시아의 시야에는 오염된 사악한 마나가 내뿜는 탁하고 눅눅한 잿빛 안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저기예요."

엘리시아가 작은 손가락으로 거대한 종유석 뒤편의 짙은 어둠을 가리켰다.

"저 돌기둥 뒤의 그림자 속에 세 명, 그리고 그 위쪽 바위 틈새에 두 명이 숨어 있어요. 숨소리를 죽이고 있지만, 그들의 마나에서 썩은 낙엽 같은 고약한 냄새가 나요."

카일런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뒤를 따르던 순찰 기마대원들에게 손짓으로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기사들은 소리 없이 검을 뽑아 들고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침입자들이다! 생포해라!"

카일런의 엄숙한 호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바람의 태초 정령 보레아스가 엘리시아의 부름을 받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 대신, 맑고 투명한 민트빛 바람이 광산 내부를 휘몰아쳤다. 보레아스가 일으킨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바람의 장벽이 첩자들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고, 눈부신 달콤한 흙먼지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윽! 이, 이게 무슨 바람이……!"

"기습이다! 대비해라!"

첩자들이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시야가 가로막힌 그들은 갈팡질팡하다가 기마대원들의 단단한 방패와 바람의 밧줄에 묶여 차례차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거칠고 날카로운 쇳소리 대신,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가문의 비열한 선발대를 머리와 무력의 결합으로 완벽하게 제압한 순간이었다.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첩자들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들의 손목에 새겨진 가시 돋친 장미 문양은 숨길 수 없었다. 로웰 공작가의 비밀 용병들이 확실했다.

"더러운 쥐새끼들이 감히 일리리아의 영토를 침범하다니."

카일런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멱살을 잡아채 올렸다. 엘리시아는 첩자들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사악한 마나의 근원을 쫓아 그들의 소지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손길이 첩자의 품속 이중 주머니를 스치자,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와 함께 묘하게 불쾌한 진동을 내뿜는 붉은 서신이 딸려 나왔. 서신의 겉면에는 로웰 가주의 직인이 찍힌 붉은 밀랍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엘리시아가 조심스레 서신을 펼치자, 그 안에는 그녀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드는 사악한 계략과 함께 정교하게 그려진 마법 도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도면 위에 그려진 장치는 기괴하고도 탐욕스러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정령들의 날개를 강제로 꺾어 가두고, 그들의 순수한 생명력을 빨아들여 마나 탱크로 송전하는 사악한 기계. 이름바 '정령 한계 수집기'였다.

서신에는 일리리아에 잠든 태초의 정령들을 이 기계로 포획하여 가문의 마나 동력원으로 박제해 버리라는 가주 레오나르드의 잔혹한 지시가 적혀 있었다. 줄리아와 레오나르드가 이 끔찍한 유물을 통해 엘리시아를 다시 붙잡고 영지를 파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도면의 복잡한 마법 기하학적 선들을 훑어내리는 순간,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영혼의 조율관으로서 정령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그녀에게는, 이 기계의 치명적인 결함이 너무나도 투명하게 보였다.

"바보 같은 가문 사람들……. 정령을 도구로만 생각하니까 이런 멍청한 설계를 하는 거예요."

엘리시아는 손가락으로 도면의 중심부를 짚었다.

"이 설계는 정령들이 가하는 미세한 반발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만약 정령들의 마나를 역방향으로 아주 조금만 흘려보내 과부하를 일으킨다면, 이 장치는 스스로를 집어삼키며 완전히 파괴될 거예요. 역추적해서 폭발시키는 것도 가능해요."

가문이 자신들을 파멸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장치의 치명적인 약점을, 엘리시아는 이미 손에 쥐게 된 것이었다. 지독한 기만과 학대의 가문이 보낸 음모가 오히려 그들의 목을 조를 단서가 되어 돌아온 통쾌한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바닥에 묶여 신음하던 첩자 중 한 명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이빨로 제 소매 속에 숨겨둔 붉은 마법석을 깨물었다.

"크하하! 위대한 로웰의 영광을 위해…… 모두 함께 죽어라!"

쨍그랑!

마법석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화염의 마나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며 동굴의 벽을 사정없이 때렸다. 지진이 일어난 듯 광산 전체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광!

"낙반이다! 모두 대피해라!"

기사들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먼지와 흙더미가 시야를 가로막는 혼란 속에서, 거대한 돌기둥 하나가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피할 시간도, 정령을 부를 여유도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엘리시아!"

뜨거운 외침과 함께 거친 손길이 엘리시아의 몸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카일런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깊숙이 박아 지지대를 만들고, 자신의 단단한 등과 우람한 어깨로 무너져 내리는 돌덩이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콰직, 하는 무거운 충격음이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카일런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고 엘리시아를 자신의 품 구석구석까지 단단하게 밀어 넣어 감싸 안았다.

그의 품 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하고 뜨거웠다. 혹한 속에서도 홀로 타오르는 태양처럼,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롭고 강력한 열기가 동굴의 차가운 흙먼지와 공포를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다.

"하아, 하아…… 괜찮으냐, 엘리시아?"

카일런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엘리시아의 뺨에 톡 떨어졌다. 그의 가슴 고동 소리가 쿵, 쿵 하고 귓가에 든든하게 울렸다.

"……네, 전 괜찮아요. 카일런은요? 다치지 않았어요?"

엘리시아가 걱정스레 그의 어깨를 짚자, 카일런은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의 굳건한 신체와 뜨거운 마나 앞에서는 동굴의 낙반조차 가벼운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던 것이다.

낙반이 멈추고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자, 무너진 바위 벽체 너머로 기묘하고도 찬란한 우윳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이건……?"

카일런이 엘리시아를 안아 일으키며 그 빛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무너진 동굴 안쪽 깊은 공동에는, 과거의 오염으로 인해 검붉게 가라앉아 썩어가던 거대한 고원 크리스탈 광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낙반으로 인해 오염된 겉껍질이 깨져 나가고, 그 틈새로 정화의 손길을 기다리는 순수한 광맥의 본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엘리시아는 본능적으로 그 광맥을 향해 걸어갔다. 손끝을 뻗자, 차가운 서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하얀 살결 위에 피어오르려 했다. 정령의 잠이라는 가혹한 대가가 그녀의 체온을 앗아가려 한 순간, 카일런이 뒤에서 그녀의 손을 함께 맞잡아 주었다. 그의 몸속에 깃든 고대 불씨의 온기가 전해지며, 동화율의 상승을 든든하게 억제해 주었다.

"보레아스, 대지의 숨결을 깨워줘."

엘리시아가 조율의 언어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지자, 보레아스가 맑은 바람을 광맥 전체에 불어넣었다. 탁하고 검붉은 타락한 마나가 비눗방울처럼 투명하게 정화되며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광맥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담아낸 듯 찬란한 푸른빛과 따스한 우윳빛 광채를 내뿜으며 완벽하게 부활했다. 일리리아 영지를 단숨에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로 만들어줄 막대한 국부 축적의 근본이 드디어 깨어난 것이었다. 광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사로운 기운에 영지민 기사들은 벅찬 감동을 느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찬란한 정화의 순간, 엘리시아의 품속에 있던 얼어붙은 푸른 씨앗이 다시 한번 콩닥거리며 살아있는 생명처럼 심장박동을 전해왔다. 대지가 정화될수록, 이 씨앗 역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롭고 따스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광산 입구 쪽에서부터 대지를 찢어발길 듯한 거대하고 웅장한 경고의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 뿌우우우우-!

그것은 일리리아 영지 국경 초소에서 오직 일촉즉발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만 울리는, 붉은 경보의 소리였다.

곧이어 얼굴이 흙먼지로 범벅이 된 보초병 한 명이 헐떡이며 광산 지하로 굴러떨어지듯 뛰어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보, 보고드립니다! 카일런 님! 엘리시아 님! 국경 방벽 바로 앞 지대까지…… 가주 레오나르드가 이끄는 로웰 공작가의 대규모 징벌 전사대가 시시각각 당도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영지의 방벽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정도로 엄청납니다!"

그 외침에 광산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드디어 가문의 거대한 이빨이 일리리아의 목덜미를 향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침공의 거대한 그림자가 갓 피어난 영지의 온기를 집어삼키려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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