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얼음 돌풍은 단숨에 일리리아의 포근한 온기를 쓸어가 버렸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내리쬐던 햇살 자리에 서늘하고 엄격한 법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바람의 태초 정령, 보레아스. 그의 거대한 실루엣이 회오리치는 눈보라 사이로 푸른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 순간, 대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묵화의 짙은 먹선처럼 뚜렷한 위압감이 온 벌판을 지배했다.
“미천한 인간들이 감히 자연의 숨결을 사사로이 길들이려 하는구나.”
보레아스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 위를 달리는 날카로운 썰매 날처럼 차갑게 대지를 울렸다. 그 음파가 닿는 곳마다 마른 잎새들이 바스라지며 힘없이 흩어졌다. 무릎을 꿇고 있던 영지민들은 낙엽처럼 몸을 떨며 바닥에 이마를 바짝 붙였다. 그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흘러내렸다.
카일런은 품에 안긴 엘리시아를 더욱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뜨거운 호흡이 엘리시아의 귓가를 부드럽게 스쳤지만, 그의 단단한 어깨는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춘 듯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엘리시아, 내 뒤로.”
“아니에요, 카일런.”
엘리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하얀 김이 허공에서 몽글몽글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든든한 품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굳건하게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섰다.
연약하고 가냘픈 체구였지만, 보레아스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연보랏빛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바람이 그녀의 길고 고운 은발을 사납게 휘감아 올렸으나, 엘리시아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아앙!
보레아스가 불쾌하다는 듯 날카로운 바람의 장막을 쳐 올렸다. 엘리시아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바람 칼날은 그녀의 뺨을 스칠 듯이 차갑게 울부짖었다. 주변의 작은 바위들이 바람에 쓸려 이리저리 굴러다녔고, 겁에 질린 산새들이 숲속 깊은 곳으로 날개 가루를 뿌리며 다급히 숨어들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기세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을 터였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보레아스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내며, 자신의 내면에 깃든 맑고 순수한 영혼의 조율관 능력을 잔잔하게 일깨웠다.
“우리는 당신을 길들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보레아스.”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맑은 유리종이 울리듯 청아하게 대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자연의 법도를 존중하기에, 그 법도에 걸맞은 정당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마주 선 것입니다.”
“정당한 이야기라니? 오만하구나, 로웰의 피를 이은 아이여. 너희 가문이 정령들에게 저지른 기만과 착취의 역사를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보레아스의 거대한 날개가 요동치며 주변의 대기를 더욱 차갑게 얼려 붙였다. 먹구름이 떼를 지어 몰려오듯, 그의 분노는 대지를 집어삼킬 것처럼 사나웠다.
학대당하던 시절, 가문의 차가운 제단 위에서 정령들의 울부짖음을 강제로 뽑아내야 했던 기억이 스쳤으나 엘리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죽지 않는 당당함이 그녀의 작은 어깨에 깃들어 있었다.
“그들의 기만과 죄악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나는 가문의 도구이기를 거부하고 내 의지로 이곳에 섰습니다. 나는 당신의 숭배자가 되어 무릎 꿇지도 않을 것이며, 당신을 부리는 지배자가 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동등한 계약자로서, 서로가 필요한 것을 나누는 거래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거래라고?”
보레아스의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불신으로 가득 찬 눈빛 속에서, 엘리시아의 흔들림 없는 태도가 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보레아스의 거대한 형체 깊숙한 곳을 응시했다. 영혼의 조율관인 그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보레아스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바람의 칼날 안쪽에, 타락한 마나의 어두운 얼룩들이 마치 검은 가시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모습이. 로웰 공작가와 제국의 마법사들이 남긴 탐욕의 찌꺼기가 태초의 정령에게도 깊은 생채기를 남긴 것이었다.
“당신의 날개 아래 깃든 그 사악하고 타락한 마나의 가시들, 그것이 얼마나 당신을 고통스럽게 밤새 잠 못 들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영혼의 조율술로 깨끗하게 정화해 드리겠습니다.”
엘리시아는 손을 뻗어 허공을 향해 부드러운 손짓을 보냈다.
“그 정화의 대가로, 당신은 이 척박한 일리리아 영지를 사악한 침입자들로부터 지켜주는 굳건한 바람의 방벽이 되어주십시오.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상호 보호의 등가 협약입니다.”
보레아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바람의 거친 포효가 잦아들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대기 중에 맴돌았다. 인간들은 언제나 정령에게 구걸하거나, 비열한 유물로 힘을 억눌러 강탈하려 했다. 하지만 이 눈앞의 작은 아이는 스스로의 가치를 당당히 증명하며 대등한 계약을 요구하고 있었다.
“……좋다. 무모한 아이여. 만약 네가 내 날개의 고통을 단 한 조각의 훼손도 없이 온전히 조율해 낼 수 있다면, 내 기꺼이 이 땅의 바람이 되어 너를 수호하마. 하지만 실패한다면, 네 영혼은 이 혹독한 북부의 눈보라 속에서 영원히 얼어붙을 것이다.”
태초의 정령이 내리는 엄격한 시험의 선언이었다.
카일런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드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안심이었다.
엘리시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가 보레아스의 거대한 바람의 날개 앞에 섰다.
그녀가 깊은숨을 들이쉬고 두 손을 모으자, 손끝에서부터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살구빛 마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청스름하고 맑은 물빛의 정화 마나가 살구빛 온기와 섞여들며, 마치 봄날의 아침 이슬처럼 싱그럽고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조율을 시작합니다.”
엘리시아가 조용히 속삭이자, 그녀의 영혼에서 뻗어 나온 미세한 마나의 실타래들이 보레아스의 거대한 바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강제로 마나를 주입하는 마법사들의 거친 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정령의 아픔에 깊이 동조하고, 그들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어루만짐이었다. 엘리시아는 보레아스의 핵을 감싸고 있는 타락한 마나의 검은 가시들을 하나하나 영적으로 감싸 안았다.
‘아프지 않게, 부드럽게…….’
그녀의 진심이 담긴 조율관의 언어가 바람의 결을 따라 흘러갔다.
보레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늘 자신을 찌르던 날카로운 통증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살구빛 정화의 온기가 상처 가득한 날개 깃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채우며, 맑고 청량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타락한 마나의 어두운 얼룩들이 하나씩 빛방울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화된 마나가 흩어지는 자리에 몽글몽글한 눈꽃 송이들이 피어나 춤을 추듯 내려앉았다.
대지를 짓누르던 살벌한 서릿발은 어느새 봄바람의 시원함처럼 맑고 쾌적한 기운으로 변해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검은 가시가 완전히 정화되어 사라졌을 때, 보레아스의 거대한 실루엣은 이전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고결한 푸른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아아…….”
보레아스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그 영혼의 울림에는 경탄과 깊은 감동이 담겨 있었다. 단 한 번의 영적 손상도 없이, 가장 완벽하고 숭고한 정화를 선사받은 것이었다.
태초의 바람 정령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엘리시아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시선에는 더 이상 인간에 대한 멸시나 의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진정한 동반자를 향한 깊은 존경심만이 깃들어 있었다.
“기적을 행하는 조율관이여. 네 영혼의 맑음이 내 날개를 다시 자유롭게 하였구나. 약속은 엄격히 이행될 것이다.”
보레아스가 날개를 가볍게 퍼덕이자, 일리리아 성채와 영지 전체를 감싸 안듯 거대하고 투명한 바람의 장벽이 둥글게 솟구쳐 올랐다.
외부의 사악한 마나와 침입자들을 완벽히 차단하는, 태초의 정령이 내린 축복의 요새가 완성된 것이었다. 영지민들은 믿을 수 없는 은혜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고, 숲속의 작은 동물들도 둥지에서 고개를 내밀며 맑아진 공기를 환영하듯 지저귀었다.
엘리시아는 마침내 해냈다는 안도감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비굴하게 무릎 꿇지 않고, 오직 등가교환의 규칙을 통해 태초의 정령과 대등한 협력자 관계를 쟁취해 낸 순간이었다. 로웰 공작가조차 결코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성취가 이 척박한 북부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달콤함도 잠시, 가혹한 대가가 엘리시아의 몸을 덮쳐왔다.
화아아아—!
태초의 고위 정령을 대규모로 조율한 영향으로, 엘리시아의 신체 동화율이 한계를 넘어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손끝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고, 그녀의 예쁜 입술은 푸르게 변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얼음 송곳이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 정령의 잠이…….’
몸이 무겁게 뒤로 기울어졌다. 시야가 하얗게 흐려지며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찰나였다.
석탄처럼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몸을 거칠고도 조심스럽게 낚아챘다.
“엘리시아!”
카일런이었다. 그는 얼어붙는 두려움 속에서도 지체 없이 엘리시아를 품에 안고 자신의 두꺼운 가죽 망토로 그녀를 감쌌다.
카일런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기이할 정도로 뜨거운 마나의 열기가 엘리시아의 차가운 뺨과 목덜미로 사정없이 흘러들었다. 혹한 속에서도 홀로 타오르는 벽난로처럼, 그의 가슴팍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정신 차려라, 엘리시아. 나를 봐라.”
카일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그는 자신의 볼을 엘리시아의 얼어붙은 이마에 맞대고, 두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을 꽉 쥐어 체온을 불어넣었다.
그의 진실한 온기와 애틋한 감정적 교감이 닿자, 엘리시아의 심장을 얼려가던 차가운 서리가 느리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잠식하려던 깊은 가사 상태의 전조가 카일런의 전력 어린 체온 덕분에 서서히 감속되며 안정을 찾아갔다.
“……카일런.”
엘리시아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희미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끝에 미약하게나마 붉은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카일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더욱 꽉 안아주었다. 그의 가슴 고동 소리가 쿵, 쿵 하고 엘리시아의 귓가에 든든하게 울렸다.
대지가 맑게 개고, 태초의 정령과 성공적인 계약을 맺은 일리리아 영지에는 이제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영지민들은 구원받았다는 기쁨에 서로를 껴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평화로운 기쁨은 너무나도 짧았다.
카일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엘리시아의 귓가에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무거운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서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엘리시아, 방금 전 광산 지하를 수색하던 정찰대에게서 긴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품에 의지한 채 고개를 들어 그의 어두운 눈빛을 응시했다. 카일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광산 깊은 공동 지하에서 정체 모를 낯선 이들의 인기척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버려진 물건들 중에서, 로웰 가문이 은밀히 고용하는 특수 용병대의 표식이 발견되었다.”
그의 말에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가문의 마수들이 벌써 이 깊은 북부의 심장부까지 소리 없이 기어들어 와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조여오는 보이지 않는 적들의 올가미가, 갓 피어난 일리리아의 평화를 다시금 위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