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공, 공녀님! 기사 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외곽 방어선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영지민의 다급한 비명이 온실 안의 포근한 공기를 단숨에 찢어발겼다. 갓 돋아난 연둣빛 한랭밀 새싹들이 머금고 있던 싱그러운 이슬방울이 소년의 떨리는 구두 굽 소리에 맞춰 잘게 흔들렸다.

“사악한 기운에 오염되어 흉측하게 변형된 거대한 정령 마수가, 지금 온실 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실 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먹구름이 태양의 따스한 꼬리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단 사흘 만에 대지에 뿌리를 내린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연둣빛 새싹들 위로 차갑고 음산한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맑고 달콤했던 공기는 순식간에 쇠가 타들어 가는 듯한 매캐하고 눅눅한 냄새로 변해 갔다.

카일런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그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춤에 매달린 묵직한 강철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서슬 퍼런 검날이 어두워진 온실 안에서 차갑게 번뜩였다.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든든한 방패처럼 섰다.

“공녀님은 정령들과 함께 온실 안쪽에 머무르십시오. 제가 놈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단단했으며, 검을 쥔 손귀에는 굵은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척박한 무인으로 살아온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팽팽한 살기가 온실 안의 공기를 더욱 딱딱하게 얼려 붙였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가죽 갑옷 자락을 고운 손가락으로 가만히 거머쥐었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길에, 당장이라도 폭풍처럼 뛰어나갈 것 같던 카일런의 거대한 신체가 뚝 멈추어 섰다.

“안 돼요, 카일런. 검을 거두어 주세요.”

“공녀님, 놈은 이미 이성을 잃은 마수입니다. 정화되지 않은 타락한 마나는 인간의 피를 탐하는 법입니다.”

카일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엘리시아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림 없이 맑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카일런의 단단한 팔뚝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얹었다. 그의 가죽 보호구 너머로 엘리시아의 보드랍고 가냘픈 온기가 아련하게 스며들었다.

“저 아이는 우리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에요. 온몸을 찌르는 오염 때문에 아파서, 그 고통을 멈춰 달라고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것뿐이랍니다. 저 슬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엘리시아가 귀를 기울이자, 온실 밖에서 대지를 뒤흔들며 다가오는 웅장한 발소리 틈새로 찌르는 듯한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 그것은 포효가 아니었다. 살을 에어내는 고통 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비참한 정령의 비명이었다.

정령들은 기만과 폭력을 극도로 혐오한다. 만약 여기서 카일런이 칼을 휘둘러 그 고대 정령 마수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일리리아의 대지는 영원히 마음을 닫아걸 것이 분명했다. 엘리시아는 자신이 품고 있는 정령들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손을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리눌렀다.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영혼의 조율관이니까요.”

그녀의 단호하고도 따스한 눈빛에 카일런의 턱끝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그는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이내 낮게 한숨을 쉬며 검끝을 바닥으로 내렸다. 하지만 검을 완전히 칼집에 넣지는 않았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제 몸을 던져서라도 공녀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공녀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제 등 뒤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카일런.”

두 사람은 온실의 낡은 나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는 개활지 저편에서, 마침내 웅장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일리리아의 깊은 고대 숲에서 수백 년을 살아왔을 거대한 고대 산림 멧돼지였다. 집채만 한 덩치에 칼날처럼 날카롭고 하얀 엄니를 지닌 야수였으나, 지금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우어어어어묵—!”

멧돼지의 등덜미와 옆구리에는 타르처럼 끈적이고 검붉은 어스름 마나가 뾰족한 가시처럼 돋아나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오염된 마나가 상처를 헤집을 때마다 녀석의 거대한 몸집이 비정상적으로 경련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서는 피눈물과 같은 검은 진액이 흘러내려 보드라운 갈색 털을 더럽히고 있었다.

“히익……! 괴, 괴물이다!”

뒤따라온 영지민들이 공포에 질려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거대한 마수는 온실 앞마당에 서 있는 엘리시아를 발견하자마자, 대지를 거칠게 걷어차며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얼어붙은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카일런이 본능적으로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대검을 비껴 들었다. 그의 온몸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곁을 지나쳐, 오히려 마수를 향해 부드러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가죽 구두가 하얗게 서리가 내린 풀잎을 지그시 밟았다.

“엘리시아 님!”

카일런의 다급한 외침이 허공을 갈랐지만, 엘리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가장 맑고 순수한 은빛 마나를 끌어올렸다.

두 손을 가슴께로 모으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은빛 입자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한 줌 쥐어 짠 것처럼 신비롭고 영롱한 광채를 뿜어냈다.

엘리시아는 입술을 열어, 인간의 언어가 아닌 바람과 대지의 태초 정령들이 사용하는 고대 조율의 언어를 노래하듯 읊조렸다.

“—아, 서글픈 대지의 동반자여. 가시 돋친 어둠을 벗고, 본연의 푸른 숨결로 돌아가라.”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은빛 마나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물결쳤다.

그 순간, 돌진하던 거대한 멧돼지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녀석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은빛 광채가 반사되어 잘게 흔들렸다. 멧돼지는 콧김을 거칠게 내뿜으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엘리시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하고 따스한 정화의 기운에 매료된 듯 더는 폭주하지 못했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은빛으로 빛나는 정화의 파도가 잔잔하게 펴져 나가 척박한 흙을 부드럽게 적셨다.

마침내 거대한 야수의 코앞까지 다가간 엘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검붉은 마나 가시가 돋아난 녀석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치이이익—!

사악한 어스름 마나와 엘리시아의 순수한 정화 마나가 충돌하며 격렬한 증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며 끔찍한 악취를 풍겼지만, 엘리시아는 단 한 치도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이 멧돼지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아프지 마.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진심 어린 위로의 마음이 영혼의 통로를 통해 야수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시아의 등 뒤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빛의 일렁임이 나타났다. 수많은 하급 바람 정령들이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포근한 미풍을 만들어냈고, 대지의 정령들이 멧돼지의 발밑을 부드러운 흙으로 감싸 안았다.

검붉게 엉겨 붙어 있던 마나 가시들이 은빛 정화의 힘에 녹아내려 맑고 투명한 이슬방울로 변해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멧돼지의 피부를 찢고 있던 상처들이 기적처럼 아물며, 그 자리에는 윤기 흐르는 폭신한 갈색 털이 새롭게 돋아났다.

피눈물로 얼룩졌던 녀석의 눈동자가 마침내 고요하고 깊은 밤하늘 같은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우웅…….”

거대한 야수는 고통에서 해방되자, 마치 온순한 아기 양처럼 나직한 소리를 내며 엘리시아의 손바닥에 커다란 머리를 가만히 비벼댔다. 거칠고 뻣뻣했던 털이 이제는 햇볕에 잘 말린 담요처럼 보드랍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완벽한 정화였다. 폭력적인 제압이나 살상 없이, 오직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조율의 힘만으로 광포한 마수를 구원해 낸 것이다.

하지만 기적의 대가는 가혹했다.

두근, 두근.

엘리시아의 심장이 맥박을 칠 때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급격히 식어 내리기 시작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하얀 서리가 가냘픈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향해 뻗어나갔다.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온몸의 뼈마디가 얼음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몰려왔다.

‘정령의 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다리의 힘이 풀려 엘리시아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찰나였다.

“엘리시아!”

바람처럼 달려온 카일런이 그녀의 가냘픈 몸을 단단하게 안아챘다.

쿵!

그는 자신의 무릎이 흙바닥에 찧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시아를 품에 안아 올렸다. 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가슴팍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강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한겨울의 혹한조차 단숨에 녹여 버릴 듯한, 기이할 정도로 뜨겁고 맹렬한 불꽃의 성질을 띤 마나의 온기였다.

카일런은 자신의 두꺼운 가죽 망토로 엘리시아를 겹겹이 감싸 안으며, 그녀의 얼어붙은 뺨에 자신의 뜨거운 뺨을 갖다 대었다.

“제 체온을 가져가십시오. 어서요!”

그의 다급하고 간절한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귓가를 울렸다.

카일런의 몸속 깊은 곳에 잠재된, 혹한을 전혀 타지 않는 기이하고 뜨거운 마나가 엘리시아의 차가운 몸으로 사정없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 온기는 차갑게 얼어붙어 가던 심장의 혈류를 다시 따스하게 돌게 만들었고, 뼈마디를 찌르던 오한을 부드럽게 걷어내 주었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품은 세상 그 어떤 온실보다도 포근하고 안전했다. 그녀를 옥죄던 얼음 같은 가사 상태의 전조가 그의 진실한 교감과 온기 덕분에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차린 엘리시아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주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오염에서 벗어난 거대한 고대 멧돼지는 엘리시아와 카일런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고요한 숲속을 향해 평온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녀석이 지나간 자리마다 얼어붙어 있던 땅이 녹아내리며 초록빛 이끼가 몽글몽글 피어났다.

그리고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영지민들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공포와 의심으로 가득 찼던 그들의 눈빛은 이제 경외감과 깊은 감동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로웰 공작가에서 온 지체 높은 공녀가 자신들을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이 땅과 생명들을 구원하러 온 진정한 수호자임을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털썩.

가장 먼저 나이가 지긋한 노인 영지민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거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 위대하신 정령의 인도자시여…….”

그의 시작으로 뒤에 서 있던 젊은 남녀들과 아이들까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차례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가에는 참회와 감격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저희의 무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공녀님!”

“공녀님이야말로 일리리아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바람을 타고 영지민들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온실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들의 마음속에 서려 있던 차가운 불신의 장벽이 눈 녹듯 사라지고, 엘리시아를 향한 전폭적인 신뢰와 애정이 싹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의 품에 안긴 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마침내 이 척박한 땅에 자신과 정령들이 머물 수 있는 진정한 보금자리의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갑자기 깊은 숲 저편 하늘에서 거대하고 하얀 얼음 돌풍이 회오리치며 솟구쳐 올랐다.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포근한 온기가 단숨에 지워지고, 엄격하고 서늘한 법도를 다스리는 태초의 신성이 온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영지민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다시금 몸을 덜덜 떨었다.

회오리치는 폭풍의 중심에서, 푸른빛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는 태초의 바람 정령 보레아스의 거대한 실루엣이 위압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거대하고 차가운 시선이 은빛 고원 전체를 내려다보며, 엘리시아와 카일런이 맞닿아 있는 곳을 향해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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