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뻗어 나온 서슬 퍼런 냉기가 엘리시아의 가냘픈 가슴팍을 사정없이 짓누르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투명하고 보들보들한 살결 위로 서릿발이 하얗게 돋아나며, 마치 얼음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손끝은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보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얼음 가루가 섞인 가녀린 숨결이 흩날릴 때마다, 허공에는 차가운 은빛 결정들이 몽글몽글하게 피어올랐다.

“공녀님!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엘리시아!”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카일런의 다급한 목소리가 마치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메아리처럼 웅웅거렸다. 그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엘리시아의 얼어붙은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독한 한기는 가여운 온기를 사정없이 밀어내며 어둠 속으로 그녀를 끌어내렸다. 태초의 위대한 정령들의 법도를 바꾸어 대지를 무리하게 정화한 대가, 즉 영혼의 조율관에게 내리는 가혹한 감옥과도 같은 ‘정령의 잠’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었다.

카일런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엘리시아의 보드라운 몸뚱이를 단단한 양팔로 안아 들고는, 서리가 맺힌 길을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성채 안의 가장 아늑하고 포근한 침소로 들어선 그는 거친 가죽 이불을 겹겹이 덮어주었으나, 엘리시아의 가냘픈 이마에 맺힌 성에는 좀처럼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마솥에 펄펄 끓인 물을 대어 보아도, 화로의 붉고 따스한 불꽃을 가까이 가져가도, 얼어붙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주변의 온기를 모조리 삼켜버릴 뿐이었다.

‘이대로 두면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얼음 인형이 되어버려.’

카일런의 우직하고 굳센 눈동자에 난생처음으로 깊은 초조함과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갑게 식어버린 엘리시아의 보들보들한 두 손을 제 커다란 손바닥 사이에 집어넣고 꼭 맞잡았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제 몸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기이할 정도로 뜨겁고 거대한 마나의 불씨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단단한 단전에서부터 피어오른 마나는 평범한 마법사들의 은은한 마력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붉고 포근한 불꽃송이처럼 엄청난 열량을 품고 있었다. 혹한의 북부 날씨 속에서도 그가 얇은 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다닐 수 있었던 비밀스러운 온기가 엘리시아의 얼어붙은 손바닥을 통해 서서히 흘러들어 갔다. 카일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하고 뜨거운 마나의 파동이 방 안의 차가운 서리를 부드럽게 녹이며 몽글몽글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추우실 겁니다. 하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밤새도록 엘리시아를 제 품에 꼭 껴안은 채, 자신의 뜨거운 체온과 감정의 파동을 아낌없이 불어넣었다. 엘리시아의 차가운 뺨이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 닿자, 카일런은 심장이 터져나갈 듯한 기묘한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녀의 영혼을 향해 끝없이 온기를 밀어 보냈다. 깊고 어두운 의식의 심연 속에서 얼어붙어 가던 엘리시아는, 자신을 감싸 안는 보드랍고 달콤한 살구색 봄볕 같은 감각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창가의 틈새를 타고 들어와 하얀 침대 위에 매끄러운 금빛 줄기를 그려낼 때쯤이었다. 엘리시아의 가녀린 손가락 끝에 맺혀 있던 서리들이 마침내 투명하고 몽글몽글한 물방울이 되어 톡, 하고 이불 위로 떨어져 내렸다. 길고 부드러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맑고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아.”

엘리시아는 제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한결 가볍고 보드라워졌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일런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온몸에서는 여전히 화끈거릴 정도로 뜨겁고 포근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침대 주변을 맴돌던 투명하고 동글동글한 바람 정령들이 엘리시아가 깨어난 것을 보고 기쁜 듯 뺨을 보들보들하게 비벼대며 살랑거렸다. 정령들의 날갯짓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풀꽃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자,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작고 말랑한 손을 뻗어 그들의 둥근 몸통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카일런.”

그녀의 보드라운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카일런은 그제야 팽팽하게 긴장했던 어깨를 스르륵 내리며, 든든하고 듬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공녀님의 몸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 제 심장이 그대로 멎는 줄 알았습니다.”

“정령의 힘을 크게 조율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가혹한 규칙이에요. 동화율이 치솟으면 제 영혼이 정령계의 차가운 틈새에 갇혀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되거든요.”

엘리시아는 자신의 조그만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얼어붙는 잠에서 깨어나려면, 마법이나 정령의 힘이 아니라 오직 살아 있는 인간의 순수한 온기와 진실한 마음이 담긴 신체 접촉이 필연적으로 필요해요. 카일런이 밤새도록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카일런은 그녀의 담담한 설명에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어린 소녀가 가문을 탈출해 자유를 찾기 위해 얼마나 가혹하고 무서운 대가를 치르며 걸어왔는지 비로소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놓아둔 쟁반 위의 그릇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공녀님의 지친 몸을 달래줄 따뜻한 밤 수프를 끓여왔습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

그릇에 담긴 밤 수프는 노르스름하고 고소한 빛깔을 띠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몽글몽글하게 올라와 있었다. 엘리시아가 숟가락으로 수프를 한 움큼 떠서 입에 넣자, 밤의 달콤하고 고소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이 혀끝을 타고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목을 타고 매끄럽게 넘어가는 따스한 기운이 지쳐 있던 장기들을 다정하게 두드리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포근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정말 달콤하고 맛있어요. 온몸이 따뜻한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 것처럼 포근해지는 기분이에요.”

엘리시아가 만족스러운 듯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미소 짓자, 카일런의 입가에도 옅은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수프를 말끔히 비우며 기운을 되찾은 엘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낡고 해진 겉옷을 걸쳤다. 가문에서 가져온 여독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일리리아 영지를 비옥한 보금자리로 만들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시작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카일런, 성채 뒷마당에 있는 낡은 온실로 저를 안내해 주시겠어요?”

카일런은 그녀의 단호하고 올곧은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성채의 뒤편,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허물어져 가는 유리 온실로 향했다.

온실의 유리창은 뿌연 먼지와 차가운 성에로 뒤덮여 빛을 거의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내부의 공기는 매캐하고 텁텁한 흙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바닥의 흙은 어두운 잿빛을 띤 채 메마르고 푸석푸석하게 갈라져 있었으며, 그 틈바구니 속에서 아주 작고 시들어가는 대지 정령 세 마리가 빛을 잃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마치 거친 모래알처럼 까칠까칠해 보였고, 머리 위에 돋아난 가냘픈 이파리는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먼지투성이 흙에 닿아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보들보들한 손가락을 뻗어, 상처받고 잔뜩 웅크린 대지 정령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인간! 너희는 늘 기만을 일삼고 우리를 도구로만 쓰잖아!”

대지 정령 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날카로운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앙칼지게 경계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마나가 엘리시아의 손끝을 따갑게 찔러왔다. 정령들은 인간의 이기심과 기만적인 태도에 깊은 상처를 입어, 극도로 예민하고 적대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손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맑고 고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너희를 억지로 부리거나 가두지 않아. 너희가 숨 쉴 수 있는 맑고 깨끗한 집을 만들어주고 싶을 뿐이야. 나와 정당한 상호 등가교환의 계약을 맺지 않을래?”

“등가교환……?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데?”

정령들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둥근 눈을 깜빡였다. 엘리시아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영혼 속에 잠재된 맑고 향긋한 마나의 실타래를 은은하게 자아냈다.

“내가 매일 아침 너희에게 이슬처럼 달콤하고 맑은 물과, 따스하고 포근한 바람을 아낌없이 제공해 줄게. 그 대신 너희는 이 차갑고 딱딱한 대지를 부드럽게 깨워줄 수 있겠니?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거야.”

조율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나는 마치 갓 피어난 장미 꽃잎처럼 향긋하고 보들보들한 촉감을 품고 있었다. 그 무해하고 따스한 에너지가 대지 정령들의 거칠고 메마른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정령들의 눈가에 맺혀 있던 경계심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정령들은 마침내 몽글몽글한 안개 같은 황금빛을 내뿜으며 엘리시아의 손가락을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흙바닥 위로 상호 존중과 신뢰의 굳건한 영적 계약이 맺어지는 순간, 온실 안의 공기가 한결 싱그럽고 매끄럽게 변화했다.

“조율관의 약속은 믿을 수 있어. 좋아, 힘을 보태줄게!”

대지 정령들이 기쁜 듯 웅얼거리며 흙 속으로 쏙 파고들었다. 엘리시아는 카일런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카일런, 가져오신 한랭밀 씨앗을 제게 주세요.”

카일런은 품 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던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를 열자, 북부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껍질이 기이할 정도로 두껍고 까칠까칠한 한랭밀 씨앗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리리아의 척박한 토양에서는 발아하는 데만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지극히 키우기 힘든 까다로운 작물이었다.

엘리시아는 씨앗 한 알 한 알을 보드라운 손길로 만지며, 정령들의 축복이 깃들기 시작한 흙 속에 정성스레 심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대지 위로 맑고 포근한 마나의 파동을 흘려보냈다.

그녀가 흘려보낸 에너지는 정령들에게는 가장 달콤하고 영양가 높은 자양분이 되었다. 정령들은 그 대가로 대지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타락한 마나 찌꺼기들을 걸러내고, 흙의 입자를 부드럽고 몽글몽글하게 부풀려 나갔다. 말만 번지르르한 기적이 아닌, 철저한 노동과 등가적인 마나 조달을 통한 대지의 재건 과정이었다.

사흘 동안, 엘리시아는 밤낮으로 온실을 보살폈다. 매일 아침 바람 정령들을 불러 온실 안의 공기를 향긋하게 순환시켰고, 우물에서 길어온 맑고 달콤한 물을 대지 정령들과 나누며 흙을 가꾸었다. 카일런 역시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무거운 물통을 나르고 온실의 깨진 유리 틈새를 두꺼운 가죽으로 꼼꼼하게 메워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온실 안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바스락.

작은 소리와 함께, 푸석푸석하던 회색빛 흙 표면이 부드럽게 갈라졌다. 그 틈바구니 사이로, 연약하지만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고 싱그러운 연둣빛 한랭밀 새싹들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지켜보던 카일런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 사흘 만에 일어난 기적적인 발아였다. 척박하고 얼어붙은 불모지 일리리아에서, 단 한 뼘의 생명도 허락하지 않던 그 죽은 땅 위로 파릇파릇하고 보드라운 초록색 새싹들이 끝없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온실 안은 이제 매캐한 먼지 대신, 갓 구운 빵처럼 고소하고 향긋한 생명의 냄새로 온통 가득 차올랐다.

“성공이에요, 카일런. 대지가 우리에게 응답해 주었어요.”

엘리시아는 땀방울이 맺힌 뺨을 훔치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새싹들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끝이 기쁨으로 잘게 떨렸다. 카일런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벅찬 감동을 느끼며,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든든하게 감싸 안았다. 영지민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공녀님을 진정한 구원자이자 영주로 모시며 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웅—!

온실의 유리창이 깨질 듯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매서운 칼바람이 성채 외곽에서부터 웅웅 울부짖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침침한 먹구름으로 뒤덮이며 온실 안으로 음산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쾅!

온실의 낡은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사색이 된 영지민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의 옷자락은 무언가에 찢긴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공, 공녀님! 기사 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외곽 방어선이……!”

영지민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침을 삼키며 소리쳤다.

“사악한 기운에 오염되어 흉측하게 변형된 거대한 정령 마수가, 지금 온실 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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