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키득거리는 눈바람 사이로 붉은 안광들이 굶주린 이빨처럼 번뜩였다. 몰아치는 하얀 폭설은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며 마차의 얇은 가죽 틈새로 얼음송곳 같은 냉기를 들이밀었다. 덜덜 떨리는 엘리시아의 작은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품속에 꼭꼭 숨은 바람 정령 보레아스가 보송보송한 솜털을 잔뜩 곤두세우며 웅크렸다.

"크르릉……."

사나운 눈보라를 뚫고 뿜어져 나오는 마수들의 탁한 숨결이 마차 사방을 무겁게 에워쌌다. 얼어붙은 대지 위로 거친 발톱이 눈을 콱콱 짓밟는 불길한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 마부는 이미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삐를 꼭 쥔 손만 가련하게 부르르 떨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마차 창문을 향해 무시무시하게 도약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슈우욱―!

새하얀 눈보라를 가르며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파열음이 허공을 갈랐다. 은빛 밤하늘을 수놓는 유성처럼 차가운 검광이 매끄러운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단 한 번의 단호한 휘두름에 붉은 안광을 번뜩이던 마수 한 마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슨?"

엘리시아는 가죽 커튼을 쥔 손가락에 겨우 힘을 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눈가루가 흩날리는 시야 너머로 거대한 실루엣이 우뚝 서 있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강철 갑옷 위로 불어닥치는 혹한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사내였다. 그의 넓은 어깨 위로 흩날리는 검은 망토는 마치 밤의 수호자처럼 든든해 보였다. 사내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단단한 손으로 커다란 대검을 가볍게 털어내며, 붉은 피 대신 검은 마력을 뿜어내는 마수의 사체를 담담히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민간인의 마차가 지나갈 만한 온화한 길이 아니다."

동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흩날리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롭게 날이 선 턱선과 타오르는 불꽃처럼 짙은 금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눈빛은 혹한의 고원에서도 결코 얼어붙지 않을 것처럼 강렬하고 뜨거웠다.

사내의 등 뒤로 가죽 갑옷을 단단히 껴입은 군사들이 횃불을 든 채 일사불란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순식간에 남은 마수들을 포위하며 날카로운 창끝을 겨누었다.

"대장님! 마차 문에 새겨진 저 문장은……."

횃불을 들고 있던 한 부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마차 측면을 가리켰다. 은빛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날개 달린 사자 문장. 제국의 가장 강력하고 오만한 세력인 로웰 공작가의 표식이었다. 군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경계심과 깊은 불신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기사 대장이라 불린 사내, 카일런 베인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엘리시아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가닿았다. 카일런이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마차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들이닥친 것은 얼어붙을 듯한 겨울바람이었지만, 그보다 먼저 엘리시아의 코끝을 스친 것은 기이할 정도로 훈훈하고 묵직한 열기였다.

"……공녀님?"

카일런의 금빛 눈동자가 마차 구석에 웅크려 있는 엘리시아를 발견하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화려하지만 얇디얇은 드레스 하나만 걸친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가녀린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엘리시아의 하얀 뺨은 이미 핏기를 잃어 투명한 얼음 인형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추워…… 요……."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가냘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얼어붙은 심장이 느리게 뛰며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다. 가문에서 도망치느라 무리하게 마나를 소모한 탓에, 몸 안의 온기가 모래알처럼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카일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로웰 공작가의 문장을 보았음에도, 그의 행동에는 단 한 줌의 계산이나 기만도 섞여 있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카일런은 즉시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두껍고 아늑한 털망토를 벗어 엘리시아의 가냘픈 몸을 겹겹이 감싸 안았다. 거칠고 질긴 가죽 너머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가 엘리시아의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바로 앞에 누운 것처럼 밀려드는 따스함에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단단한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지?’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고, 북부의 매서운 혹한마저도 그의 주변에서만큼은 봄날의 햇살처럼 녹아내리는 듯했다. 카일런은 가벼운 깃털을 다루듯 엘리시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일리리아 성채로 복귀한다. 전속력으로 이동하지."

그의 낮고 든든한 명령 소리를 마지막으로, 엘리시아는 아늑한 온기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정신을 차렸을 때, 엘리시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에 매달린 투박한 나무 들보였다. 가문의 화려하고 정교한 대리석 천장과는 달리,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따뜻한 갈색 나무결이 마음을 묘하게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시아, 인제 잠에서 깼어? 걱정했잖아!"

보레아스가 몽글몽글한 미풍을 일으키며 엘리시아의 뺨을 따스하게 부벼댔다. 보송보송한 바람의 감촉에 엘리시아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여전히 조금 무거웠지만, 기이할 정도로 따뜻한 벽난로의 온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은 비록 거칠고 투박한 모포였지만, 깨끗하게 세탁되어 향긋한 풀 냄새가 났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창밖을 보니 굳게 닫힌 성채의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이곳이 바로 은빛 고원 일리리아의 성채였다.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거친 돌벽과 얼어붙은 흙만이 가득한 쓸쓸한 요새였다.

엘리시아는 뭔가에 홀린 듯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성채 복도는 고요했고, 계단을 지나 마당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게 뺨을 스쳤다. 마당 한구석에는 척박하고 메마른 흙 더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락, 사락.

보레아스가 날개를 파닥이며 마당의 얼어붙은 흙더미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시아, 여기 밑에 이상한 게 있어. 아주 차갑고, 아주 꼭 닫혀 있는 무언가가 지면 깊은 곳에서 숨을 쉬고 있어!"

엘리시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가운 흙을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거칠고 굳은 흙덩이들이 손톱 사이에 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얼마쯤 흙을 걷어냈을까, 손끝에 아주 매끄럽고 단단한 감촉이 닿았다.

흙을 털어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푸른 씨앗이었다.

하지만 그 씨앗은 성한 곳이 없었다. 표면에는 미세하게 금이 가 있었고, 마치 영원히 얼어붙은 얼음처럼 지독하게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씨앗을 손에 쥐는 순간, 엘리시아의 머릿속으로 아련하고 슬픈 노랫소리 같은 파동이 흘러들어왔다.

‘살려줘…… 너무 추워…….’

그것은 단순한 식물의 씨앗이 아니었다. 씨앗의 깊은 내면에 깃든 신성하고 성스러운 영혼의 잔재가 엘리시아의 '영혼의 조율관' 권능과 공명하며 애달프게 울부짖고 있었다.

"너도 나처럼…… 갇혀서 얼어붙어 있었구나."

엘리시아는 가만히 속삭이며 씨앗을 품에 꼭 안았다. 비록 지금은 금이 가고 차갑게 얼어붙어 있지만, 언젠가 대지가 온전히 정화되는 날, 이 작은 씨앗이 어떤 기적을 피워낼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씨앗을 조심스럽게 품속 깊은 곳에 갈무리했다.

"여기 계셨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카일런이 커다란 가죽 수건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나무 대접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넓은 가슴팍에서는 여전히 기분 좋은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차가운 흙바닥에 앉아 계시면 어찌합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도, 엘리시아의 머리칼에 묻은 흙먼지를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털어내 주었다. 그의 손길은 겉보기와 달리 아주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베인 경."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카일런은 들고 있던 나무 대접을 엘리시아에게 내밀었다. 대접 안에는 불투명하고 씁쓸한 회색빛을 띤 물이 담겨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찌르르하고 비릿한 냄새에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뭐예요?"

"이곳 일리리아의 식수입니다. 보기에는 흉측하지만, 끓이고 몇 번이나 천으로 걸러낸 것입니다. 이 땅은 과거의 전쟁으로 대지 깊숙이 사악한 마나가 스며들어, 식수원마저 오염되어 있습니다. 어떤 정화 마법으로도 이 독성을 완전히 지울 수 없지요. 영지민들은 모두 이 물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카일런의 담담한 어조 속에는 뼈아픈 좌절과 무력감이 깊게 배어 있었다. 기사로서 검을 휘둘러 영지민을 지킬 수는 있어도, 대지 전체에 퍼진 보이지 않는 독과 저주만큼은 그의 강인한 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성채 한편에서 일하고 있던 영지민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푸석하고 생기가 없었다. 오염된 물을 장기간 마셔온 탓에 그들의 눈빛에는 깊은 피로와 체념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엘리시아는 가만히 나무 대접에 담긴 물을 내려다보았다.

물속에서 일렁이는 것은 단순한 흙먼지가 아니었다. 검붉게 타락한 마나의 가시들이 물 분자 사이사이에 엉겨 붙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것은 정령들의 언어를 억압하고 자연의 흐름을 방해하는 사악한 찌꺼기였다.

‘가문에서는 이보다 더한 타락한 마나 탱크도 정화하라고 나를 쥐어짰었지.’

가문의 학대는 끔찍했지만, 그 과정에서 단련된 엘리시아의 조율 능력은 이미 그 누구보다 정교하고 완벽해져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가문의 착취를 위한 제단이 아니다. 자신을 대가 없이 구해준 따뜻한 기사 대장과, 갈 곳 없는 유민들이 살아가는 그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엘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 한가운데에 위치한 커다란 돌 우물로 걸어갔다.

"공녀님? 위험합니다. 우물 근처의 마나 오염도는 더욱 심각……."

카일런이 다급하게 만류하려 했지만, 엘리시아의 단호한 걸음걸이는 멈추지 않았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시커멓고 걸쭉한 물이 기분 나쁜 기포를 부글부글 터뜨리며 고여 있었다. 영지민들이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꼬마 공녀가 뭘 하려는 거지?" "로웰 가문에서 왔다더니, 우리를 조롱하려는 건가?"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눈초리들이 엘리시아의 등에 따갑게 박혔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우물 가장자리에 작은 두 손을 가만히 얹었다.

"보레아스, 도와줘."

"웅! 이시아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레아스가 엘리시아의 손끝을 타고 내려가 우물 속으로 쏙 들어갔다. 엘리시아는 눈을 지시 감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조율판을 조용히 펼쳤다.

쿠우웅―.

바람의 정령어와 대지의 속삭임이 엘리시아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엉키고 오염된 마나의 매듭을 하나씩 부드럽게 풀어나갔다. 타락한 마나의 사나운 기운이 반발하며 그녀의 영혼을 찌르려 했지만, 엘리시아는 단호하고 매끄러운 의지로 그 흐름을 다정하게 다독였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렴. 맑고 깨끗한 흐름으로."

엘리시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정령의 언어가 은은한 파스텔톤의 푸른 빛무리가 되어 우물 안으로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스아아아―.

마치 봄날의 따스한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청량한 소리가 마당 가득 울려 퍼졌다.

순간, 검붉고 걸쭉하던 우물물이 기적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커먼 타락의 그림자가 푸른 빛무리에 닿자마자 눈 녹듯 투명하게 여과되어 사라졌다. 비릿하고 텁텁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향긋하고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 차올랐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지켜보던 영지민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목재 도구를 떨어뜨리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우물 안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구덩이가 아니었다.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한, 마치 에메랄드를 녹여낸 듯 영롱하게 빛나는 샘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몽글몽글하게 공중으로 피어올라 마당 전체를 따스하게 적셨다.

카일런은 넋을 잃은 채 우물과 엘리시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충격과 경외감으로 세차게 흔들렸다. 제국의 그 어떤 고위 마법사도, 신관도 해결하지 못했던 일리리아의 저주를 이 어린 소녀가 단 한 번의 몸짓으로 완벽하게 해결해 낸 것이다.

엘리시아는 두 손으로 우물의 맑은 물을 떠서 한 모금 축였다.

혀끝에 닿는 물맛은 눈물겹도록 달콤하고 시원했다. 대지의 깊은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싱그러운 생명의 맛이었다.

"이제…… 마셔도 돼요."

엘리시아는 카일런을 향해 돌아보며 맑게 미소 지었다. 영지민들은 기적 같은 광경에 무릎을 꿇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몇몇은 눈물을 흘리며 우물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쿵.

갑자기 엘리시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심장을 통째로 얼려버릴 듯한 극심한 오한이 휘몰아쳤다.

"……아."

손끝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갔다. 손톱 끝에서부터 하얀 서리가 피어오르며 피부가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갔다. 호흡할 때마다 입가에서 하얀 김이 아니라, 진짜 얼음 가루가 섞인 숨결이 터져 나왔다.

대규모 정화를 무리하게 성공시킨 대가. 영혼의 조율관이 치러야 하는 가혹한 규칙인 '정령의 잠'이 그녀의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녀님! 엘리시아!"

카일런의 다급한 비명이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흐릿하게 들려왔다. 엘리시아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려 하자, 카일런이 번개처럼 달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뜨거운 품에 닿았음에도, 엘리시아의 체온은 멈추지 않고 영하로 빠르게 내려앉아 가고 있었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기 직전, 엘리시아는 제 뺨을 감싸 쥐는 카일런의 타오르는 듯한 손길을 느끼며 깊고 차가운 잠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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