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조금만 더 버텨라. 가문의 영광을 위한 거름이 되는 것은 네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니라."

레오나르드의 메마른 목소리가 어두컴컴한 지하 제단실의 사방벽을 차갑게 두드렸다. 그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서리 맞은 가시나무처럼 날카롭게 서걱거리며 엘리시아의 가냘픈 귀 끝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제단의 단단한 대리석 바닥은 얼어붙은 강물처럼 시리도록 차가웠고, 은빛 쇠사슬에 묶인 엘리시아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목은 이미 붉은 꽃잎처럼 쓰라리게 짓물러 있었다.

가늘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찌릿한 통증이 분홍빛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가문에서 강제로 심어둔 마법 포집 장치가 그녀의 여리고 맑은 마나 홀을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긁어내듯 사정없이 헤집는 탓이었다.

엘리시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은은한 촛불의 노란 잔상이 아른아른 흔들렸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는 로웰 공작가에서 태어났지만, 실상은 오직 정령의 달콤하고 순수한 마나를 정화하고 바치는 무기력한 도구에 불과했다. 레오나르드는 마른 낙엽처럼 건조하고 꼿꼿한 자세로 서서, 제단 바닥에 새겨진 정밀한 마법진의 홈마다 붉은 마석들을 차례로 끼워 넣었다.

"이번 정화 의식만 무사히 끝나면, 황실에 바칠 찬란한 마나 보석이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허튼짓할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마라."

그의 메마른 손길은 가을날의 낙엽이 바스러지듯 거칠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따스한 봄볕 같은 온기라곤 단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엘리시아의 가슴속에 깃든 마나 홀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치 가느다란 명주실이 툭 끊어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주변의 공기는 눅눅하고 어두웠지만, 엘리시아의 영혼은 여전히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하얀 백합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냘픈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공중에서 부드럽게 흩어졌다.

몸 안의 마나가 강제로 뽑혀 나가는 감각은, 온몸의 뼈마디에 차가운 눈꽃 송이를 촘촘히 박아 넣는 것처럼 시리고 아팠다. 제단 구석에 서 있던 감시 기사들은 무거운 바위처럼 묵묵히 서서 그 비참한 광경을 차갑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의 무거운 철갑옷에서 풍기는 비린 쇠 냄새가 좁은 지하 제단실을 가득 채워 숨을 쉬기조차 텁텁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멀었나요?"

멀리서 들려오는 줄리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얼음판 위에 떨어지는 쇠구슬처럼 날카로웠다. 그녀는 화사하고 향긋한 장미 향수를 가득 뿌렸지만, 그 이면에는 엘리시아를 향한 불타는 시기심과 독한 가시가 가득 차 있었다. 줄리아는 부드러운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화려한 깃털 부채를 가볍게 부치며 제단 가까이 걸어왔다.

"아버님, 이 쓸모없는 아이가 제대로 힘을 짜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정령들이 이 아이의 부름에 전혀 응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마나 홀이 완전히 망가진 게 분명해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서운 북풍한설이 되어 엘리시아의 귓가를 스쳤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냘픈 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을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이 지옥 같은 은빛 감옥을 벗어나 자유롭고 싱그러운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뜨거운 갈망만이 가득했다. 정령들을 그저 소모품으로만 여기는 이 탐욕스러운 가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푸르른 잔디밭을 마음껏 두 발로 달리고 싶었다.

"조금 더 출력을 높여라."

레오나르드의 나직하고 무거운 명령에 마법진이 붉고 탁한 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거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불쾌한 진동이 제단실 지하를 가득 울렸다. 엘리시아의 가슴속 홀이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함께, 그녀의 의식이 아스라한 안개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암흑의 문턱, 모든 감각이 아스라해지는 순간에 엘리시아는 홀로 서 있었다. 그곳은 소리마저 삼켜버린 고요한 호수 같았다. 그런데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아주 가늘고 보드라운 울음소리가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들려왔다.

- 아파, 너무 아파요……. - 차가운 쇠사슬이 우리를 가두고 있어. 살려줘…….

그것은 가문에 붙잡혀 동력원으로 비참하게 소모되던 하급 정령들의 애달픈 흐느낌이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에 찌들어 타락한 마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작은 영혼들이었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맑은 물방울이 툭 떨어지는 것처럼 엘리시아의 가슴속에 깊고 성스러운 파동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았다. 가문의 모진 학대 속에서도 결코 더럽혀지지 않은 그녀의 순수한 영혼이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듯, 엘리시아의 마음속에서 보드랍고 싱그러운 금빛 마나가 흘러나왔다.

‘울지 마. 내가 너희의 아픔을 전부 들어줄게.’

그 순간, 엘리시아의 영혼 깊은 곳에서 거대한 문이 열리는 듯한 장엄한 진동이 일었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법도와 규칙을 조율하는 절대적인 권능, 바로 '영혼의 조율관'의 영예로운 각성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지하 제단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탁하고 매캐한 검은 마나가 엘리시아의 부드러운 호흡 한 번에 새하얀 눈송이처럼 정화되어 흩날렸다. 그녀의 주변으로 몽글몽글한 연둣빛 정령 마나가 아름다운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정령들은 엘리시아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머물며 기쁨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자연과 정령의 언어를 직접 듣고 바르게 인도하는 태초의 성스러운 권능이었다.

하지만 힘을 각성함과 동시에, 엘리시아의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차가운 서리 같은 한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의 감각이 얼어붙는 듯한 기묘한 감각. 동화율이 치솟으며 찾아오는 '정령의 잠'의 희미한 전조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지금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 달콤한 자유의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레오나르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마른 얼굴에 당혹감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가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고 믿었던 제단의 마법진이 붉은빛을 완전히 잃고,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으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정령들이…… 통제를 벗어났다! 마법진이 역류하고 있어!"

감시 기사들이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엘리시아는 가만히 눈을 떴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는 맑은 가을 호수처럼 고요하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단단한 위엄을 담고 있었다.

"더 이상 당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보드라운 봄바람 소리 같았으나,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대나무 같은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아주 작은 바람의 파동이 제단의 마법진 경로를 부드럽고 매끄럽게 뒤틀어버렸다.

조율관의 정교한 손길에 의해, 마법진의 마나 흐름이 완전히 역방향으로 꺾였다.

쿠우우웅-!

지하 제단 전체가 부드러운 황금빛 파동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강압적으로 정령들을 가두고 있던 마력 포집 장치들이 차례로 아름다운 불꽃놀이처럼 터져 나갔다. 파스텔톤의 분홍빛과 연둣빛 마나 파편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꽃가루처럼 사방으로 화사하게 흩날렸다.

그것은 시각적으로는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끄아악!" "내 마나가…… 마나가 사라진다!"

레오나르드는 뒤로 크게 자빠지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힘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줄리아 역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먼지와 마나 파편으로 지저분하게 더러워졌다.

기사들이 엘리시아를 향해 거칠게 달려들려 했지만, 정화된 대지의 정령들이 싹을 틔워 그들의 발목을 싱그러운 덩굴처럼 단단하게 묶어버렸다.

"어딜 감히 가문의 물건을 두고 도망치려 하느냐!"

레오나르드가 흙먼지 속에서 손을 뻗으며 소리쳤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힘을 잃고 흐려져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들을 단 한 번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손목을 묶고 있던 은빛 사슬을 가볍게 털어냈다. 사슬은 이미 조율된 마나의 힘에 의해 부드러운 모래알처럼 스르륵 바스러져 내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단 한 가닥의 망설임도 없었다.

학대와 방치로 일관하던 가문에 남겨둘 미련 따위는 단 한 줌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하 제단의 무거운 철문을 밀어젖히자, 싱그러운 바깥공기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엘리시아는 미리 매수해 두었던 가문의 하급 마부와 약속한 뒷마당의 우거진 덤불 숲으로 빠르게 달렸다. 그녀의 가쁜 숨소리가 고요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달릴 때마다 가녀린 다리가 후들거렸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하지만 가슴속을 채우는 시원한 공기는 그 어떤 달콤한 열매보다 달콤했다. 정령의 잠으로 인해 몸의 끝부분부터 시작된 서늘한 한기가 서서히 손목을 타고 올라왔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새들을 밟으며 달리던 그때, 커다란 참나무 밑둥 구석에서 아주 작고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엘리시아는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가문의 사악한 실험에 쓰이다가 상처 입고 버려진, 아주 작고 몽글몽글한 바람 정령 한 마리가 가엽게 웅크리고 있었다. 정령의 투명한 날개는 찢겨 있었고, 몸체는 회색빛으로 탁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마치 차가운 비바람에 젖은 어린 새처럼 바르르 떨고 있는 가녀린 모습이었다.

- 아파……. 무서워……. 나를 버리지 마…….

정령의 가냘픈 흐느낌이 엘리시아의 귀가로 애처롭게 흘러들었다. 그 모습은 가문에서 방치당하고 도구로 쓰이던 자신의 비참한 과거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엘리시아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흙먼지가 그녀의 하얀 드레스 자락을 더럽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보드라운 두 손으로 상처 입은 바람 정령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괜찮아. 이제 아무도 널 아프게 하지 못해. 나와 함께 가자."

엘리시아의 손길이 닿자, 그녀의 맑고 순수한 마나가 정령의 몸으로 따스하게 흘러들어갔다. 정령을 옥죄고 있던 탁한 오염 물질들이 은은하고 향긋한 향기를 풍기며 하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다.

정령의 회색빛 몸체가 이내 싱그러운 민트빛으로 투명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정령은 기쁨에 겨운 듯 엘리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비벼대며 몽글몽글한 미풍을 일으켰다. 그 바람은 마치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를 품은 듯 무척이나 포근했다.

- 응! 같이 갈래! 이시아랑 같이 갈래!

정령은 엘리시아의 은빛 머리칼 사이에 쏙 숨어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엘리시아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힘차게 달렸다.

마침내 저 멀리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던 허름한 가죽 마차가 보였다. 마부는 초조한 얼굴로 말의 고삐를 쥐고 있다가, 엘리시아가 나타나자 황급히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타십시오, 공녀님! 추격대가 쫓아오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엘리시아는 마차 안으로 몸을 날렸다. 문이 쿵 하고 닫히고, 마차가 거친 소리를 내며 가문의 영지를 벗어나 북쪽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 유리에 비친 엘리시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자유로웠다. 드디어 가문이라는 좁고 어두운 새장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마차 안으로 은은하게 흘러들어와 그녀의 하얀 뺨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마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덜컹거리며 달렸다. 창밖의 풍경은 점차 푸르른 숲에서 황량하고 메마른 바위산으로 씁쓸하게 변해갔다. 제국의 가장 변방이자, 오염된 불모지인 '은빛 고원 일리리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몸의 절반쯤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감각이 엘리시아를 사정없이 괴롭혔지만, 그녀는 품에 안은 바람 정령의 보드라운 온기를 느끼며 묵묵히 버텨냈다.

마침내 국경의 거대한 돌장벽이 저 멀리 안개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어두워지더니, 무서운 기세로 먹구름이 몰려왔다. 세찬 바람과 함께 창문을 깨트릴 듯한 사나운 폭설이 마차를 사정없이 덮쳤다.

히히힝-!

말들의 비명과 함께 마차가 급격하게 흔들리며 우뚝 멈춰 섰다.

"공녀님! 큰일났습니다! 갑작스러운 눈보라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마부의 다급한 외침이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 소리에 묻혀 가냘프게 들려왔다. 엘리시아는 차가운 손으로 마차의 가죽 커튼을 살짝 걷어 올렸다. 사방을 가득 채운 하얀 눈보라, 그리고 그 어둠 저편 거친 눈바람 사이로…….

스산하고 불쾌한 마력의 기운과 함께, 붉은 안광 수십 개가 번뜩이며 그들을 포위하듯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수들의 굶주린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고원을 울렸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