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턱밑까지 치밀어 오른 백설희의 숨결은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 끝이 셔츠깃을 헤집고 들어와 맨살을 파고들었다. 손톱끝이 쇄골 뼈를 짓누르는 감각이 시리도록 선명했다. 방금 전까지 오디션장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메트로놈처럼 기교를 뽐내던 은막의 여왕은 온데간데없었다. 내 눈앞에 서서 사시나무 떨듯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는, 그저 주인을 잃고 고장 나 버린 태엽 인형에 불과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설희의 목소리가 젖은 모래톱처럼 갈라져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내 얼굴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왜 내 머릿속에서 한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지? 왜... 왜 내가 내 마음대로 숨을 쉬고 있는 거야?"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도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치받았다. 부채 이관의 후유증인 이인증*의 증세였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마치 허공에 붕 뜬 채 나 자신을 방관하는 듯한 이 감각. 허파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 올렸다. 이 연예계라는 거대한 도살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터득한 가장 강력한 마스크는 바로 이 차가운 희색(喜色)이었다.

*주석 1 [이인증(Depersonalization)]: 내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마치 3인칭 시점으로 유체이탈을 해서 남의 몸을 구경하는 듯한 극단적인 뇌의 안전장치 작동 상태. 배우들에게는 연기가 너무 잘 풀릴 때 찾아오는 축복이자,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지독한 저주다.

"백설희 선배."

나는 내 목덜미를 움켜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힘으로 꺾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그녀의 엄지손가락 관절 부근을 가볍게 압박했다. 지극히 정교하고 효율적인 신체 통제 기술이었다. 설희의 손가락이 힘없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한서진 대표가 매일 밤 선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주문이 사라지니까, 세상의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숨이 안 쉬어집니까?"

"뭐...?"

"너는 내 최고의 조각품이다. 내가 깎아내고 다듬은 선을 벗어나는 순간, 너는 길거리의 흔한 쓰레기일 뿐이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볼 때마다 그 목소리를 되새김질했겠지. 그러니까 선배의 연기에는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겁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어두운 복도 구석, 벽면의 그림자가 우리 두 사람의 경계를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밀착했다. 내 시야 우측 상단에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배우의 대차대조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 [대차대조표 - 백설희 (상태 분석)] * 자산(Asset): 무결점의 신체 제어력 (95%), 정교한 발성 기교 (90%) * 부채(Liability): 가스라이팅 족쇄 [가면의 조종사] (적색 점멸 중) * 현재 몰입도: 15% (기계적 인형 상태) * 감정 소모율: 89% (자아 붕괴 임계점) ==================================

그녀의 머리 위에 얽혀 있는 검은 사슬들이 파르르 떨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서진이 수년에 걸쳐 그녀의 영혼에 낙인찍어 둔 가학적인 지배의 흔적이었다. 전생에서 백설희는 이 지독한 족쇄를 끝내 견디지 못하고, 한서진의 가혹한 지시에 따라 스스로 생을 마감했었다. 그 비극의 궤도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선배가 방금 오디션장에서 보여준 연기는 메트로놈 연기*에 불과했습니다. 완벽한 박자, 오차 없는 톤. 하지만 그건 선배의 연기가 아니라 한서진의 연출이었지. 안 그렇습니까?"

*주석 2 [메트로놈 연기(Metronomic Acting)]: 상대방의 호흡이나 현장의 변수를 무시하고, 머릿속으로 계산한 완벽한 템포와 억양만을 기계처럼 출력해 내는 기교 위주의 연기 스타일. 관객의 눈을 속이기는 쉽지만, 영혼을 흔들지는 못하는 고급 인형극에 가깝다.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설희가 내 가슴을 밀치려 손을 뻗었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그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쿵, 하고 허리가 벽에 부딪히는 충격이 전해졌으나 내 눈동자는 흐려지지 않았다.

"나는 압니다. 선배가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뺨을 때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한서진이 던져주는 대본의 대사 한 줄을 외우기 위해 밤새도록 스스로를 학대할 때, 그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 말입니다."

나는 [배우의 대차대조표]의 청산 버튼을 마음속으로 눌렀다.

[경고: 대상 '백설희'의 상태 이상 [가면의 조종사]를 청산합니다.] [대가 지불: 리스크 부채가 온하준의 계정으로 이관됩니다. 트라우마 시뮬레이션 '질식의 늪'이 강제 기동됩니다.]

순간, 목구멍으로 차가운 진흙이 한가득 들이치는 듯한 환각이 덮쳐왔다. 숨이 턱 막혔다.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리며 어두운 심해로 가라앉는 이인증의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등 가죽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식은땀 속에서, 나는 이빨을 악물고 미소를 유지했다. 영혼을 갉아먹는 고통이었으나, 내 눈앞에서 백설희를 묶고 있던 검은 사슬들이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나는 광경이 펼쳐지는 순간, 그 고통은 극상의 희열로 치환되었다.

쩍, 쩌적!

설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길이 마침내 완전히 걷혀 나갔다. 허공을 헤매던 그녀의 시선이 비로소 진짜 '온하준'이라는 인간의 눈과 마주쳤다.

"아..."

설희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평생 그녀를 조종하던 가짜 자아, 한서진이 심어둔 기계식 매뉴얼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소거된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기교 어린 이성이 걷히고, 날것의 거친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눈물이 고이는 대신, 그녀의 눈빛은 무섭도록 차갑고 투명해졌다.

"이게... 진짜 나라고?"

설희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전율이었다.

"그래요. 이제야 진짜 배우를 마주하는군."

나는 젖은 셔츠깃을 가볍게 털어내며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가슴의 통증은 여전했으나, 입가에 걸린 냉소적인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구경 잘했다, 온하준. 사람 하나를 아주 뼈마디까지 발라 놓는구나."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실루엣. 신우현이었다.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나와 백설희를 번갈아 응시했다.

"자멸하는 연기라면 내가 전문인 줄 알았는데, 너는 타인의 자멸을 유도해서 아예 새로 재조립하는 취미가 있었군."

우현의 말투는 건조했으나, 그의 목덜미에 돋아난 핏대는 그가 방금 전 오디션장에서 느꼈던 연기적 전율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신우현 씨."

백설희가 천천히 몸을 돌려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스타'가 쓰던 가짜 교양이 묻어나지 않았다. 오직 무대 위에서 자신의 영혼을 태울 준비가 된 진짜 광대의 목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나, 이든에서 나갈 거야."

설희의 폭탄선언에 우현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한서진 대표가 씌워둔 족쇄, 내 손으로 부수겠어. 계약 해지 소송이든 뭐든, 내가 가진 모든 자산을 털어서라도 그 지옥에서 벗어날 거야. 그리고..."

설희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 영화, <심연의 가면>에서 진짜 연기가 뭔지 보여주겠어. 당신들이 짜놓은 그 미친 판에 나도 기꺼이 끼어들겠다는 뜻이야."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서진이 가장 아끼던 최고의 자산이자, 이든 엔터의 여왕이었던 백설희가 스스로 사슬을 끊고 우리의 동맹으로 걸어 들어온 순간이었다. 거대 기획사의 자산 가치 1위 여배우를 오직 대사의 전율과 실력만으로 설득해 아군으로 빼앗아 온 이 압도적인 아우라.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환영합니다, 백설희 선배."

나는 우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내 파트너는 성격이 좀 까칠하지만, 연기 하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맛깔나게 비벼주니까요. 우리 셋이 함께 만드는 <심연의 가면>은, 한서진의 장부에는 절대로 기록될 수 없는 메가 시너지를 내게 될 겁니다."

우현이 피식 웃으며 내 손을 거칠게 쳐냈다.

"누가 네 파트너라는 거냐. 난 그저 네가 깔아놓은 이 미친 무대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너를 짓밟아 주려는 것뿐이다."

"그거 참 든든한 선포로군요."

나는 물러서지 않고 우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서로를 갉아먹는 라이벌 구도가 아닌,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며 동반 성장하는 공생의 콤비 플레이. 회귀 전 나를 짓누르던 죄책감의 사슬이 드디어 조금씩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 시야에 푸른색 시스템 창이 급박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인과율의 급격한 변동이 감지되었습니다.] [백설희의 자살 예정 운명(Day 45)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대중의 위화감 리스크 투표 게이지가 급상승합니다: 12% -> 38%] [주의: 대중의 의구심이 임계점(100%)에 도달하면 즉각적인 심장 정지 및 재능 회수 패널티가 부과됩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역시 운명의 궤도를 통째로 틀어쥐는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대중들은 백설희의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과 이든 엔터테인먼트와의 갈등에 대해 집단적인 의구심을 품기 시작할 것이다. 이 위화감을 정당한 '천재적 연출'과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정산해 내지 못한다면, 내 생명력 자체가 소멸할 터였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투지가 끓어올랐다. 리스크가 크다는 것은, 그 위기를 돌파했을 때 손에 쥘 예술적 배당금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었으니까.

* * *

같은 시각. 청담동에 위치한 이든 엔터테인먼트 사옥 7층, 대표 이사 집무실.

콰직!

고급 가죽 소파의 팔걸이가 한서진의 손끝에서 흉하게 뜯겨 나갔다. 그녀의 잘 정돈된 매니큐어 하나가 부러져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한서진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디션장에서... 백설희가 대본을 거부하고 온하준과 즉흥 연기를 했다고?"

한서진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비서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숙였다.

"예, 대표님. 강태오 감독이 현장에서 온하준과 신우현을 공동 주연으로 캐스팅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백설희 씨 또한 계약 해지 소송을 준비하라는 변호사의 연락이 방금 전 수신되었습니다."

"백설희, 그 무식한 인형 년이 제 발로 걸어서 나가겠다고?"

한서진이 기괴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 올랐다. 자신이 수년에 걸쳐 정교하게 설계해 둔 '비운의 요절 마케팅 포트폴리오'의 핵심 부품들이, 온하준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인 배우의 손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건방진 쥐새끼가 내 정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구나."

한서진이 천천히 마우스를 쥐었다. 화면에는 이미 그녀가 사전에 가공해 두었던 수많은 더미 파일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신우현의 과거 소극장 시절 사진들, 그가 극심한 우울증으로 약물을 처방받았던 병원 기록의 교묘한 위조본, 그리고 사설 찌라시 업체들과 연계된 가짜 뉴스 초안들.

"망가뜨려 주지."

한서진의 손가락이 마우스 왼쪽 버튼을 거칠게 클릭했다.

[전송 완료: '천재 배우 S군, 상습 마약 복용 및 극단적 선택 암시... 충무로 충격' 기사 배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니터 화면의 푸른 빛이 한서진의 일그러진 미소를 차갑게 비추었다. 가공할 만한 폭풍이, 오디션장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그들을 향해 불어닥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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