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본은 잊어버려. 지금부터 내가 주는 상황에서, 너희 둘이 서로를 죽일 듯이 뜯어먹는 즉흥 연기를 보여봐라. 한 놈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강태오 감독의 나지막한 선언이 오디션장의 가라앉은 공기를 찢고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잔인한 흥분이 묻어 있었다. 자본의 논리로 굴러가는 상업 영화판에서 타협을 거부해 온 괴팍한 거장. 그가 지금 이 순간, 이든 엔터테인먼트가 짜놓은 정교한 각본을 제 손으로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셈이었다.
가슴 한가운데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시야 모퉁이에 붉은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경고: 부채 이관으로 인한 이인증(Depersonalization) 환각 발생] [심장 박동수 분당 134회 돌파. 감정 소모율 72% 급증]
*이인증(離人症):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자신의 몸이 낯설게 느껴지는 정신의학적 해리 현상. 쉽게 말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나를 밖에서 관조하는 듯한 유체이탈형 지옥을 뜻한다. 예술가들에게는 축복이자 저주인 이 병증은, 장부의 부채를 무리하게 인수한 대가로 내 폐부를 갉아먹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이 마치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번져 나갔다. 강태오 감독의 얼굴도, 심사위원석에 앉아 마른침을 삼키는 이든 엔터의 김 상무의 실루엣도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직 내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둔탁한 타격음만이 고막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나는 입꼬리를 팽팽하게 당겨 올렸다. 이런 지옥 같은 패닉 상태야말로 내가 가장 잘 다루는 무대였다.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강박이 내 척추를 꼿꼿하게 세웠다. 비릿한 쇠 맛이 혀끝을 스쳤지만, 나는 오히려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즉흥 연기라. 감독님 작품의 시놉시스를 삼일 밤낮으로 쪼개서 분석한 보람이 있겠군요."
내 건조한 음성이 마이크를 타지 않고도 넓은 오디션장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갔다.
강태오 감독이 턱을 괴며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시험하는 자의 가혹함이 서려 있었다.
"극단적 살인마 사도현. 피해자를 난도질하면서 구원을 속삭이는 이중성이지. 그놈이 마지막 순간에 교수대 앞에서 신을 찾으며 참회하는 척 대중을 기만하는 독백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온하준, 너라면 이 빌어먹을 인간의 이중성을 어떻게 증명할래? 단순한 미친놈의 발광으로 끝낼 건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나?"
질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내 시야에 푸른색 정보창이 겹쳐졌다.
[배우의 대차대조표 가동] - 대상: 강태오 (감독)의 예술적 갈증 수치: 98% - 요구 키워드: [위선], [종교적 기만], [정적 광기] - 현재 싱크로율: 42% -> 실시간 분석을 통한 수정 필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걸음,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나의 발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무겁게 울렸다. 이인증의 환각 속에서 내 육체는 지독한 흉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내 이성은 그 고통을 ‘사도현’이라는 인물의 밧줄로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감독님."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시선은 그 누구도 향하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공간 전체를 지배했다.
"사도현은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가 피해자를 죽이며 기도를 올린 건 구원을 바래서가 아니라, 자신이 신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목소리에서 물기가 완전히 빠져나갔다. 서늘할 정도로 건조하고 고요한 저음이었다.
"그에게 교수대는 형벌의 장소가 아닙니다. 대중이라는 관객 앞에서 펼치는 마지막 성찬(聖餐)이지요."
말을 마친 순간, 내 눈빛에서 모든 감정의 흔적이 지워졌다. 방금 전까지 백설희를 뒤흔들며 날뛰던 청춘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정적만이 내 눈동자에 고였다. 살인범보다 더 소름 끼치는,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거세된 인간의 무심함이었다.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마치 독실한 신자가 기도를 올리듯 손가락을 맞물렸다. 하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었다. 목을 매달기 직전의 인간이 느끼는 기묘한 흥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를 향한 가학적인 유열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문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지독하게 성스럽고, 지독하게 모독적인 톤이었다.
"이 죄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되, 저들의 눈에 서린 공포를 당신의 영광으로 삼으소서."
나는 고개를 살짝 꺾어 심사위원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서진의 대리인으로서 나를 짓밟으려 했던 김 상무가 앉아 있었다. 내 시선이 그의 눈동자에 가닿은 순간, 김 상무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내가 짓고 있는 미소는 온하준의 것이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의 영혼을 완벽하게 해체해 버리겠다는 사도현의 미소였다.
[싱크로율 96% 돌파] [감정 소모율 91% — 경고: 임계점 근접]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숨이 턱 막혔지만, 나는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사도현이 느끼는 질식의 감각으로 치환해 연기에 녹여냈다. 목을 죄어오는 밧줄의 감각을 상상하며, 나는 천천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오디션장 뒤편, 어둠 속에 서 있던 신우현이 소스라치며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내 주변 시야에 걸렸다.
우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생을 스스로를 태우는 연기로 일관해 온 그 천재가, 지극히 계산적이고 정교하게 통제된 내 정적 광기 앞에서 압도적인 경외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대차대조표의 숫자가 요동쳤다.
- 신우현 (라이벌)의 자극도: 95% (경탄 및 동반 상승 가동) - 시너지 효과: [영혼의 공명] 발생 중
우현의 거친 숨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지금 내 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해 낸 심연의 밑바닥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너지던 그의 예술적 자아가 내 도발과 실력을 이정표 삼아 다시금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감독의 질문에 대한 '증명'을 끝마쳤다면, 이제 이 판을 뒤흔들 수 있는 확실한 '추가타'를 날릴 차례였다.
나는 기도를 올리던 자세를 유지한 채, 천천히 심사위원석으로 걸어 나갔다.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김 상무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마이크 스탠드 바로 앞, 김 상무와 불과 두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의 귀 바로 옆에 입술을 가져갔다. 마치 대본에 있는 독백의 연장선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선이었다. 하지만 그 낮은 속삭임은 오직 김 상무 한 사람만을 조준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준비한 '비운의 요절 포트폴리오' 말입니다."
김 상무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려 뺨을 타고 흘렀다.
"참 공들여 쓴 시나리오더군요. 하지만 어쩌죠? 그 연극의 주연 배우들이 이제 대본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나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으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한 대표에게 전하세요. 다음 장부의 파멸 항목은 당신들 차례라고."
그것은 완벽한 추가타이자,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가학적인 지배 사슬을 향해 던지는 선전포고였다. 귓가에 꽂힌 내 빈정거림에 김 상무는 서류를 쥐고 있던 손을 부르르 떨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연기를 마무리하자, 머릿속에서 청아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리스크 투표 경고 10% 일시 회복] [대중의 위화감이 경탄으로 치환되었습니다. 인과율의 궤도가 수정되며 안전 자산이 확보됩니다.]
오디션장 내부를 무겁게 짓누르던 침묵의 장벽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김 상무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획한 오디션의 음모가, 단 한 명의 무명 소극장 배우의 압도적인 실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부서졌는지 깨달은 표정이었다. 이든 엔터가 행사하려던 외압의 영향력은 이미 이 공간에서 완전히 소멸해 있었다.
강태오 감독이 천천히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장이라 불리며 수많은 배우의 영혼을 카메라에 담아왔던 노감독의 눈에, 지독한 참회와 경외의 빛이 서렸다.
"내가... 완전히 틀렸군."
강 감독의 거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단상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성지를 밟는 참회자의 발걸음 같았다.
"온하준. 너를 그저 백설희의 들러리나 이든의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던 내 안목을 참회하지. 네가 보여준 건 단순한 연기가 아니다. 대본의 텍스트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한 영혼 그 자체였어."
그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거칠고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이 영화의 '서진'은, 그리고 그 심연은 오직 너만의 것이다. 나와 함께 칸으로 가자."
대기업의 외압을 완벽하게 박살 내고, 거장 감독의 무릎을 꿇린 격상 반격의 순간이었다. 나는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으며, 내 마스크 뒤에 숨겨진 차가운 승리감을 조용히 음미했다.
* * *
오디션장 뒷정리가 시작될 즈음, 나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대기실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부채 이관의 후유증으로 등 가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따끔거렸다.
"온하준."
대기실 그늘진 구석,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실루엣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백설희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방금 전 오디션장에서의 차분함과 기교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머리 위의 검은 사슬은 파괴되었지만, 지배당하던 자아가 갑작스럽게 깨어난 충격으로 그녀의 정신은 극한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턱.
설희가 거칠게 손을 뻗어 내 셔츠깃과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가냘픈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그녀의 숨결이 턱밑까지 닿았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설희의 목소리가 젖은 흙처럼 갈라졌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왜 내 머릿속에서 한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지? 왜... 왜 내가 내 마음대로 숨을 쉬고 있는 거야?"
목덜미를 움켜쥔 그녀의 손끝이 내 피부를 파고들었다. 통증 속에서도 나는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의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들려는 그녀의 날 선 질문이, 어두운 복도의 공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