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가지 마요."

백설희의 가녀린 손가락끝이 내 깃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이 얇은 셔츠를 타고 피부에 닿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고인 눈물은 이든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한 괴물이 심어놓은 공포의 잔해였다.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내 심장을 꿰뚫을 듯이 날카로웠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공격성이 아니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꽁꽁 싸맨 고슴도치의 처절한 가시 돋치기였다.

"이든 엔터에 저항하지 마요, 온하준 씨. 당신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한 대표님을 이길 순 없어. 거기 들어가는 순간…… 당신과 신우현 씨는 정말로 파멸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 포기해요."

겁에 질린 인형의 애원.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반투명한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 [인물: 백설희] - 몰입도: 45% (기교형 고지식 마스크) - 감정 소모율: 12% (감정 원천 차단 상태) - 상태 이상: [가면의 조종사]* (이든 엔터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자아 억제 족쇄. 영악한 기교 연기 뒤에 숨겨진 자아 상실 상태.) ================================== *가면의 조종사: 타인의 의도에 맞춰 완벽한 인형극을 수행하는 인격 분열적 방어기제. 연기력은 안정적이나 영혼이 결여된 목각 인형의 연기를 낳는다.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수장, 한서진이 채워놓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그녀의 영혼을 옥죄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지극히 오만하게 끌어올렸다.

"포기라뇨, 설희 씨."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을 하나씩 부드럽게 떼어냈다. 거부감이 들지 않을 만큼 섬세하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실린 손길이었다.

"우린 이제 막, 심연의 가면을 벗길 참인데."

내 목소리가 고요한 대기실 복도에 낮게 깔렸다.

내 뒤에 서 있던 신우현이 피식, 실소했다. 녀석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껌을 씹듯 사탕을 잘게 부수어 삼켰다. 불쾌함과 흥분이 뒤섞인 녀석의 눈빛이 오디션장 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비켜라, 인형."

우현이 설희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설희는 멍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구원받기를 거부당한 자의 허망함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오디션장의 무거운 방음문을 밀어젖혔다.

스르륵.

문이 열리는 순간, 안쪽의 서늘한 공기가 정면으로 쏟아졌다.

사방이 검은색 흡음재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 중앙에는 길게 늘어선 테이블이 있었고, 그 너머로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앉아 있는 사내, 강태오 감독.

헝클어진 머리에 헐렁한 야상 점퍼를 걸친 그는 지루하다는 듯 턱을 괸 채 펜을 돌리고 있었다. 그의 양옆으로는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입김을 듬뿍 받은 제작사 간부들과 캐스팅 디렉터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마음속의 장부를 펼쳤다.

================================== [배우의 대차대조표 가동] - 활성화 마스크: [예술성의 마스크 - 심연의 방랑자] - 현재 리스크 부채: 45% (신우현의 감정 완충 처리로 인한 이월 부채) - 이인증(Depersonalization) 위험도: 주의 단계 (가슴 중앙의 경미한 압박감 및 시야 외곽의 왜곡 현상 발생) ==================================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 육체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하지만 나는 익숙하게 그 통증을 미소 뒤로 숨겼다. 고압 희색(高壓 喜色). 내 강박적인 완벽주의는 이 정도의 환각 따위에 무릎 꿇지 않는다. 오히려 입꼬리가 더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온하준입니다."

내 목소리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공간을 채웠다.

심사위원석 우측에 앉은 이든 측 인사인 중년의 남성, 김 상무가 코방귀를 끼며 서류를 뒤적였다.

"온하준 씨, 그리고 신우현 씨. 두 분 다 소극장 출신이라 그런지 기세는 좋네요. 그런데 어쩌나. 오늘 두 분이 보실 배역은 원래 준비하셨던 '서진' 역이 아닙니다."

김 상무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 바닥으로 대본 몇 장을 툭 던졌다.

종이 뭉치가 바닥을 뒹굴며 내 구두 앞코에 멈춰 섰다.

"강 감독님 신작 <심연의 가면>에서 주인공의 뒷조사를 하다가 3분 만에 칼에 맞아 죽는 삼류 양아치 '독사' 역입니다. 한 대표님께서 특별히 두 분의 '날것 같은 느낌'을 살려보라고 추천해 주셨거든요. 대사도 몇 줄 없으니 즉석에서 리딩해 보시죠."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이든 엔터의 한서진이 뒤에서 판을 짜둔 것이 분명했다. 오디션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우리를 철저하게 짓밟아 기를 죽이고,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백설희를 돋보이게 만들려는 수작.

옆에 선 신우현의 호흡이 한순간에 거칠어졌다. 녀석의 주먹이 바지 주머니 속에서 터질 듯이 쥐어지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몰입 소모율 게이지가 다시 붉은빛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손을 뻗어 우현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냉정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대본을 천천히 주워 올렸다.

대본의 내용을 훑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삼류 느와르의 대사들. 캐릭터의 전사(Backstory)도, 행동의 정당성도 없는, 그저 플롯의 소모품으로 쓰이기 위해 급조된 쓰레기 텍스트였다.

"삼류 양아치 독사라……."

나는 입안으로 대사를 읊조리며 심사위원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김 상무는 승리감에 도취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설희는 오디션장 구석에 서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대본을 쥐지 않은 한 손으로 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김 상무님."

"왜요? 자신 없습니까? 소극장에서는 대단한 배우인 척하더니, 상업 영화의 매운맛을 보니 겁이 좀 나나 보지?"

"아뇨."

나는 생긋 웃었다.

"이 대본이 너무나 '예술적'이라서 감탄하는 중입니다. 캐릭터의 내면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오직 자극적인 폭력성만을 추구하는 이 기법, 마치 1980년대 삼류 비디오 영화의 향수가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말을 멈추고, 손에 든 대본을 반으로 접었다.

찌이익.

정적만이 흐르던 오디션장에 종이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김 상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무슨 짓거리야!"

나는 찢어진 대본 조각을 허공에 가볍게 흩뿌렸다. 하얀 종이 가루들이 조명을 받아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태오 감독님의 카메라가 이런 죽은 텍스트를 담기에는 렌즈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고개를 돌려 강태오 감독을 똑바로 응시했다.

"감독님. <심연의 가면>은 자아의 붕괴와 구원을 다루는 정통 심리 스릴러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가벼운 가짜 분노로 가득 찬 대본을 제게 주신 건, 저를 시험하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이 오디션의 격을 떨어뜨리려는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신 겁니까?"

강태오 감독의 펜이 멈췄다.

그의 감은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살벌하고도 집요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온하준 씨!"

김 상무가 테이블을 탁 치며 일어섰다.

"어디서 건방지게 감독님께 훈계질이야! 당장 나가! 당신은 아웃이야!"

"가만히 있어 봐, 김 상무."

강태오 감독이 낮고 고요한 목소리로 김 상무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기묘한 권위가 실려 있었다.

강 감독은 턱을 괴고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대본을 찢었다라……. 기개가 좋은 건지, 아니면 대책이 없는 미친놈인 건지 모르겠군. 온하준, 네 눈에는 이 대본이 그렇게 쓰레기로 보여?"

"쓰레기라기보다는, 배우의 영혼을 갉아먹는 '감정 상각(Emotional Amortization)'*의 도구로 보입니다." *감정 상각: 배우가 무가치한 배역에 자신의 감정 에너지를 무의미하게 소모하여 내면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현상.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내 안의 [심연의 방랑자] 마스크가 요동치며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배우는 감정을 파는 광대이지만, 영혼까지 싸구려로 팔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이곳에 '독사'가 아니라, 진짜 '서진'의 심연을 보여드리러 왔습니다."

그때였다.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백설희가 돌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기획사가 주입한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맹목적인 의무감이 서려 있었다.

"건방지네요, 온하준 씨."

백설희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본의 가치를 판단하는 건 배우가 아니라 감독님과 제작진이에요. 주어진 배역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배우의 본분이죠. 스스로를 대단한 예술가라도 되는 양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의 그 오만이 결국 신우현 씨까지 망치게 될 거예요."

그녀의 대사는 완벽했다. 발음도 정확했고, 톤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영혼이 없는 '목각 인형'의 연기였다. 한서진이 설계한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발악.

나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시스템 경고] - 백설희의 [가면의 조종사] 상태가 온하준의 도발에 반응하여 충돌을 일으킵니다. - '감정 상각 붕괴' 연출을 가동할 수 있습니다. - 가동 시, 상대의 위선적 기교를 무너뜨리고 날것의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으나, 본인에게 가해지는 트라우마 부채가 15% 증가합니다. ==================================

가슴을 짓누르는 이인증의 통증이 더욱 거세졌다. 눈앞의 백설희가 마치 왜곡된 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입꼬리를 잔인하게 끌어올리며, 그녀의 사정거리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설희 씨."

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방금 그 대사, 정말 본인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한서진 대표가 머릿속에 심어놓은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입니까?"

"뭐라고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차단하고, 기교 뒤로 숨는 연기. 그건 연기가 아니라 '회피'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게 아니라, 박제된 인형처럼 전시되어 있을 뿐이에요."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눈빛에 담긴 날것의 압도적인 에너지가 그녀의 이성적인 껍질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진짜 분노를 느껴본 적은 있습니까? 이든 엔터의 거세된 온실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울부짖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당신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백설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녀의 정교하던 마스크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고, 차갑게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이 날것의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항상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본연의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내 시야의 대차대조표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 [백설희의 대차대조표 실시간 변동] - 상태 이상: [가면의 조종사] 균열율 78% 돌파! - 감정 소모율: 12% -> 65% 급상승 (억눌려 있던 자아의 폭발) - 부채 항목 '가면의 조종사' 지배 족쇄 장치 파손 중! ==================================

그녀의 머리 위로 기괴하게 얽혀 있던 검은 사슬 모양의 이펙트가 쩍쩍 갈라지며 불꽃을 튀겼다. 이든 엔터가 그녀의 영혼에 심어놓았던 지배의 장치가, 나의 가차 없는 도발과 그녀 내면의 날것의 분노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다.

백설희는 가슴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더 이상 기획된 눈물이 아니었다.

억압된 자아가 마침내 껍질을 깨고 나오며 겪는, 지독한 성장통의 눈물이었다.

오디션장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김 상무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예상치 못한 백설희의 감정 폭발과 극적인 기어 전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교 연기만을 보여주던 이든의 차세대 에이스가, 온하준이라는 신인의 도발 단 몇 마디에 이토록 입체적이고 날것의 감정을 터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완벽한 권위의 역전이었다.

오디션장의 공기는 이제 한서진의 각본이 아닌, 나의 주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지도 않은 채, 천천히 강태오 감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슴의 통증은 극에 달했지만, 내 입가에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강태오 감독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지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곳에는 피비린내 나는 예술적 갈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진짜 천재들의 숨 막히는 연기 투쟁을 목격한 연출가의 광기어린 흥분이었다.

강 감독이 테이블을 짚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거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온하준. 그리고 신우현."

그의 시선이 나와 내 옆에 서 있는 우현을 번갈아 머물렀다.

"너희들이 원하는 진짜 '서진'의 심연을 보여주겠다고 했지?"

강 감독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좋아. 룰을 바꾸지. 이 대본은 잊어버려. 지금부터 내가 주는 상황에서, 너희 둘이 서로를 죽일 듯이 뜯어먹는 즉흥 연기를 보여봐라. 한 놈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버티지 못하는 놈은 이 자리에서 영원히 아웃이야."

그가 던진 새로운 대결의 선포.

그것은 단순한 오디션이 아닌,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어야 하는 살벌한 광기의 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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