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뒤, 상암동의 한 사설 스튜디오 복도는 눅눅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서진이 뻗친 보이지 않는 손길은 이미 오디션장의 공기마저 오염시킨 뒤였다. 심사위원단을 매수하고 백설희를 투입해 온하준과 신우현을 통째로 매장하라는 비밀 지시는, 대기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서늘한 기운만으로도 증명되고 있었다.

하준은 가죽 재킷의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린 채, 대기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귓가에는 사흘 전부터 끈질기게 울려 퍼지던 시스템의 경고음이 여전히 잔향처럼 맴돌고 있었다.

================================== [경고: 대중의 위화감 및 리스크 투표 발생 감지] - 적대 세력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개입으로 난이도가 '극상(極上)'으로 조정되었습니다. - 현재 리스크 투표 게이지: 42% (실패 시 트라우마 시뮬레이션 강제 진입) ==================================

머릿속에 떠오른 반투명한 붉은 창을 보며, 하준은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올렸다.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지만, 눈매에는 서리 같은 한기가 서려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신우현은 신경질적으로 구두 앞코로 바닥을 툭툭 치고 있었다. 우현의 손가락 끝은 쉴 새 없이 허공을 긁어댔다. 대본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떨리냐, 우현아?”

하준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우현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핏발 선 눈동자가 하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딴 쓰레기 같은 공기 속에서 숨 쉬는 것 자체가 불쾌하니까.”

“불쾌해도 참아. 원래 맛집은 허름하고 냄새나는 법이거든. 저 안에서 우릴 기다리는 양반들이 아주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모양이야.”

하준의 시선이 대기실 정면에 붙은 ‘오디션 진행 수칙’ 종이로 향했다.

[특이 사항: 지원자 간 즉석 상호 배격 규칙 적용. 상대 배우의 연기를 전면 부정하거나 가로막는 즉흥 대립 연기로만 평가함.]

말이 좋아 즉흥 대립 연기지, 사실상 서로의 연기 맥락을 강제로 끊어놓고 진흙탕 싸움을 유도하겠다는 한서진의 비열한 덫이었다. 정상적인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을 서로 물어뜯게 만들어, 결국 누구 하나 제대로 된 감정을 잡지 못하고 무너지게 만들려는 기형적인 설계.

주변의 신인 배우들은 이미 사색이 되어 대본을 뒤적이고 있었다. 몇몇은 한서진의 입김을 아는지, 하준과 우현의 눈치를 살피며 수군거렸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덩치 큰 스태프가 들어왔다. 그의 뒤로 이든 엔터의 명찰을 단 중년의 사내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따라 들어왔다. 강태오 감독의 제작사 지분 라인을 쥐고 흔든다는 이든 측 제작 이사, 김성국이었다.

김성국은 대기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하준과 우현의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깔려 있었다.

“어이, 소극장 출신 천재들.”

김성국이 껌을 씹으며 뱉어내듯 말했다.

“여기가 무슨 대학로 푼돈 받아먹는 놀이터인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라. 자본이 도는 판은 룰이 달라. 너희 같은 잔챙이들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기획된 스타 한 명의 발끝도 못 따라오니까.”

대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다른 배우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한서진의 외압 아래, 감히 대기업 이사에게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하준은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김성국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키 차이로 인해 하준이 김성국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사님.”

하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화사했고, 그래서 더 기괴했다.

“자본의 논리를 아주 숭고하게 믿으시나 봅니다. 그런데 어쩌죠? 저희가 하는 건 연기라서요. 돈으로 처바른 연기가 얼마나 값싸고 천박해 보이는지, 혹시 극장 맨 뒷줄에서 한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구?”

김성국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모를 수도 있겠네요. 보통 그런 분들은 연기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애들이 벌어다 줄 정산서 숫자만 보시니까. 회계 장부만 보시느라 눈이 침침해지신 모양인데, 오늘 저희가 제대로 개안(開眼)시켜 드릴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공짜 관람치고는 꽤 사치스러운 경험이 될 겁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김성국이 손가락질을 하려던 순간, 하준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조롱이 가득 담긴 완벽한 신사의 태도였다. 주변에서 큭, 하고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급히 입을 막았다. 김성국은 씩씩거리며 오디션장 안으로 사라졌다.

우현이 혀를 찼다.

“입만 살았군.”

“입이라도 살아야 밥값을 하지. 안 그래?”

하준은 가볍게 대꾸하며 대기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오늘 한서진이 준비한 최고의 무기이자 첫 번째 제물이 앉아 있었다.

백설희.

이든 엔터테인먼트가 공들여 깎아 만든 ‘차세대 은막의 여왕’.

그녀는 마치 정교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단정하게 놓인 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초점을 잃은 눈빛은 그저 허공의 임의의 한 점을 응시할 뿐이었다.

하준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설희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하준이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허공을 손으로 가볍게 가로막았다. 그제야 설희의 눈동자가 아주 느리게 맑아지며 하준을 담았다.

“백설희 씨.”

하준이 나직하게 불렀다.

동시에 그의 시야에 [배우의 대차대조표]가 푸른빛을 뿜으며 전개되었다. 설희의 머리 위에 떠오른 수치들이 하준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 [인물: 백설희] - 몰입도: 12% (극도의 인지부조화 상태) - 감정 소모율: 88% (내면의 기저 우울 수치 위험군) - 캐릭터 싱크로율: 5% (가면의 지시대로 연기 중) - 상태 이상: [가면의 조종사 (The Masked Puppeteer)] * 설명: 타인의 강박적 가스라이팅에 의해 고유 자아가 억압된 상태. 자신을 도구로 인식하여 기교 연기만을 출력함. ==================================

‘가면의 조종사.’

2화에서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발견했던 그 붉은 낙인이, 지금은 더 짙은 색으로 그녀의 영혼을 옥죄고 있었다. 한서진이 채워둔 영혼의 족쇄였다.

하준은 설희의 바로 앞자리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가볍게 꼬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참 예쁜 인형이네요.”

하준의 첫마디는 칭찬이 아닌 칼날이었다.

설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녀의 입술이 차갑게 열렸다.

“무슨 뜻이죠, 온하준 씨.”

“말 그대로입니다. 한서진 대표님이 참 정성껏 깎아 만드셨어요. 머리카락 한 올, 숨소리 하나까지 다 통제 범위 안에 두고 계시던데. 기분은 어떻습니까? 남이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는 목각 인형이 된 소감이.”

설희의 손가락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한층 더 이성적이고 차갑게 내리깔았다.

“무례하군요. 저는 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든의 기획력은 저를 가장 완벽하게 빛내줄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시스템이라.”

하준이 피식 웃었다.

“그 시스템의 대가가 뭔지 정말 모릅니까? 당신의 대차대조표는 이미 적자로 가득 차 있어요. 매 작품마다 영혼을 조금씩 잘라내서 한서진의 장부에 자산으로 입금해주고 있잖아. 그 대가로 당신에게 남은 건 기교뿐인 메마른 껍데기뿐이고.”

하준은 상체를 설희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번 오디션, 당신이 우릴 밟고 지나가도록 설계되어 있죠?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껍데기만 남은 인형은, 진짜 광기를 만나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버리니까.”

설희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가빠졌다. 그녀의 눈빛 밑바닥에서 깊은 혼란과 두려움이 소용돌이쳤다. 한서진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심어놓은 지배의 그늘이, 하준의 정교한 도발에 의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하준을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우현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의 시 뺨에 닿는 공기가 한결 무거워진 것을 느끼며, 하준은 다시 장부를 켰다. 이번에는 신우현의 정보 탭이었다.

================================== [인물: 신우현] - 몰입도: 91% - 감정 소모율: 96% [위험: 95% 초과!] - 상태 이상: [자멸적 광기], [무릎 관절 부상 (만성 염증 및 인대 미세 손상)] ==================================

우현의 머리 위에서 적색 경보가 격렬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몰입 소모율 95% 돌파. 그리고 무릎 관절 부상의 심각한 표지.

회귀 전, 우현을 파멸로 몰고 갔던 육체적, 정신적 붕괴의 전조 증상들이 이미 그의 몸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우현은 지금도 무릎이 쑤시는지, 바지춤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하준은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한 알을 꺼내 우현의 손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먹어라. 당 떨어지면 연기고 뭐고 신경질만 나니까.”

“필요 없어.”

우현이 사탕을 던지려 하자, 하준이 그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하준의 손아귀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우현은 그의 손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먹어, 새끼야.”

하준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걷혀 있었다. 오직 파트너를 향한 집요한 통제와 안쓰러움만이 묻어나는 낮고 묵직한 어조였다.

“네가 무대 위에서 쓰러지는 꼴은 안 봐. 쓰러져도 내 연기에 압도당해서 쓰러져야지, 몸이 썩어 들어가서 쓰러지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안 하니까.”

우현은 하준의 눈동자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죄책감과 완벽주의적 강박을 읽어냈다. 언제나 화사한 미소 뒤에 숨겨진, 자신을 향한 기묘할 정도의 집착.

우현은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사탕을 껍질째 짓이기듯 까서 입에 넣었다. 단맛이 입안에 퍼지자, 그의 거친 호흡이 미세하게 진정되었다.

================================== [시스템 알림: 신우현의 몰입 소모율이 92%로 완화되었습니다. 임시 조치 성공.] ==================================

하준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었다. 오디션이 시작되면, 저 자멸적인 천재는 다시 자신을 불태워 심연으로 뛰어들 터였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뒤를 쫓아 대차대조표의 리스크를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그때, 대기실 스피커에서 찌르르한 노이즈와 함께 차가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다음 지원자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온하준 씨, 신우현 씨. 그리고 백설희 씨. 세 분 동시에 오디션장으로 입장해 주세요.

마침내 한서진이 설계한 죽음의 링으로 올라갈 시간이 되었다.

하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가에는 다시금 세상에서 가장 화사하고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오디션장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의 앞을 급하게 가로막았다.

백설희였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칼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하준의 가슴팍을 밀치며 속삭였다.

“가지 마요.”

하준의 눈썹이 가볍게 치켜 올라갔다.

“이든 엔터에 저항하지 마요, 온하준 씨. 당신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한 대표님을 이길 순 없어. 거기 들어가는 순간…… 당신과 신우현 씨는 정말로 파멸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 포기해요.”

눈물 젖은 협박. 그것은 경고인 동시에, 한서진의 공포에 완벽하게 굴복한 자가 던지는 처절한 애원이었다.

하준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내려다보며,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포기라뇨, 설희 씨.”

하준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린 이제 막, 심연의 가면을 벗길 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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