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장부 부채 이관을 수락하는 순간, 온하준의 시야가 기괴한 트라우마 환각으로 어둡게 물들며 심장이 미친 듯이 조여들기 시작한다.

허파 깊숙한 곳에서부터 산소가 일시에 증발하는 감각이었다. 갈비뼈를 힘껏 으스러뜨릴 듯한 압박감이 흉강을 짓눌렀고, 귓가에는 수천 개의 유리파편이 콘크리트 바닥에 쏟아지는 듯한 이명이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회귀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우현의 마지막 뒷모습이 망막 위에 핏빛 잔상으로 어른거렸다.

이인증(Depersonalization)[* 작가 주석: 영혼이 육체라는 전세방에서 강제로 쫓겨나 자기 몸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기괴한 유체이탈 증상. 배우들에게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 정신과 리포트에 단골로 등장하는 악질적인 직업병이다.]의 환각이었다.

[배우의 대차대조표]가 요구하는 리스크 비용의 지불 방식은 언제나 가혹했다. 타인의 무너진 감정을 장부에 자산으로 기록해 구원하는 대가로, 하준은 자신의 이성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시야가 온통 진흙탕처럼 어둡게 일렁였고, 무대 바닥의 나무 판자들이 썩어 문드러진 늪으로 변해 발목을 집어삼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하준은 비틀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극한의 패닉이 뇌수를 적실수록, 그의 완벽주의 강박은 더욱 화려하고 견고한 가면을 빚어냈다. 뺨의 미세한 근육들이 정교하게 통제되며 오만하고도 화사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고압 희색형(高壓 喜色型)의 본능이 자아낸 극상의 방어기제였다.

“겨우 이 정도인가.”

하준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매끄러운 심연을 닮아 있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심장 통증을 인위적인 미소 아래로 완벽하게 매장한 채, 하준은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신우현이 있었다.

우현은 무대 구석에 주저앉아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잘 조율되지 않은 현악기처럼 잘게 떨렸다. [배우의 대차대조표] 인터페이스가 우현의 머리 위에 띄워놓은 수치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조연: 신우현] [감정 몰입도: 98% (과몰입 상태)] [내면 감정 소모율: 94% (자멸 위험)] [캐릭터 싱크로율: 89%] [상태 이상: 영혼의 자가소화(Autolysis)[* 작가 주석: 세포가 스스로를 분해해 파괴하는 현상. 예술가들이 흔히 '영혼을 불태웠다'고 포장하는 자학적 연기의 실체이자, 자멸로 가는 직행열차 티켓이다.]]

우현은 기획사의 가스라이팅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갇혀, 자신을 불태워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회귀 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 지독한 자멸의 궤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하준은 거침없이 우현을 향해 걸어갔다. 구두 굽이 무대 바닥을 디딜 때마다 둔탁한 파열음이 소극장의 적막을 깨트렸다. 환각 속의 진흙탕이 발을 무겁게 잡았지만, 하준의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우아했다.

“신우현.”

하준의 목소리가 텅 빈 극장 안을 무겁게 울렸다. 단순한 부름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상대 배우의 자아를 강제로 끌어당기는 압도적인 연기적 ‘인력(Gravity)’이었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주창했던 ‘주의 집중의 영역’을 극단적으로 좁혀, 오직 서로의 존재만을 무대 위에 남겨두는 기술적인 압박이었다.

우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에 온하준의 얼굴이 담겼다.

우현의 시선에 비친 하준은 기이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안색이 창백함에도 불구하고, 입꼬리는 기만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순적인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우현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듯한 타격감을 주었다.

“……하준, 아?”

우현의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준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번뜩이는 냉소와 지독한 확신은, 우현이 평생 동안 갈구해 마지않던 ‘진짜’의 기운이었다. 자멸적인 슬픔에 침잠해 가던 우현의 이성이 그 자극에 반응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준이 방출하는 정교하고도 압도적인 연기적 밀도가 우현의 내면을 짓누르던 패닉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거대한 방파제처럼 파도를 막아섰다.

[시스템 안내: 상대 배우 '신우현'의 감정 소모율이 완화됩니다. (94% -> 82%)] [이인증 부채가 정산 계정으로 임시 이월됩니다. 사용자의 환각 지속 시간이 15분 연장됩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하준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오히려 더 깊고, 더 오만하게.

하준은 우현의 젖은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손바닥을 타고 우현의 척추가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준은 허리를 숙여 우현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의 숨결이 우현의 뺨에 닿았다.

“너는 그냥 불타기만 해.”

하준의 목소리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차라리 명령에 가까웠고,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선언이었다.

“그 불꽃이 재를 남기지 않게 끄는 건, 내 몫이니까.”

우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늘 스스로를 난도질해 예술의 제단에 바치려던 그였다. 한 번도 누군가가 자신의 불꽃을 통제해 주겠다거나, 그 파멸을 막아주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준의 오만하면서도 절대적인 확신이 담긴 대사는 우현의 내면 깊은 곳을 관통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현이 신음하듯 대꾸했지만, 하준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오히려 하준의 손가락끝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안도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독하게 이성적이고 정교한 도발을 던지면서도, 자신을 결코 놓지 않는 하준의 기묘한 이중성에 우현은 완전히 매료당했다.

그것은 배우 대 배우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신뢰의 싹이었다.

그때였다. 소극장 입구의 낡은 철문이 삐걱거리는 비명과 함께 거칠게 열렸다. 먼지 쌓인 복도를 지나 무대 뒤편, 백스테이지를 향해 걸어오는 오만한 구둣발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아직도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신우현 씨.”

낮고 차분하지만, 뱀처럼 차가운 음색이 들려왔다.

하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한서진의 심복이자, 배우들의 영혼을 수거해 마케팅 포트폴리오로 조각하는 사냥개, 임 실장이 무대 아래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한 여자가 인형처럼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백설희.

이든 엔터테인먼트가 ‘차세대 은막의 여왕’이라는 타이틀로 기획 중인 신예 여배우이자, 훗날 하준과 우현의 라이벌 구도 속에서 냉철한 관조자로 군림하게 될 인물이었다. 그녀는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수학자 같은 눈빛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준의 시야에 백설희의 상단에 떠오른 경영 장부가 가시화되었다.

[조연: 백설희] [감정 몰입도: 40%] [캐릭터 싱크로율: 95% (기교형)] [상태 이상: 가면의 조종사 (Persona Pilot)[* 작가 주석: 배우가 자신의 진짜 자아를 완벽히 격리한 채, 기획사가 정해준 기교와 호흡 법칙만으로 연기하는 완벽한 목각 인형 상태. 기술적으로는 무결하나 영혼이 없어 관객의 가슴을 울리지 못하는 기계적 연기의 극치다.]]

‘가면의 조종사.’

하준의 입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미세하게 올라갔다. 회귀 전에도 백설희의 연기는 자로 잰 듯 정확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기계장치 같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 원인이 바로 한서진이 채워둔 자아의 족쇄 때문이었음을 장부는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임 실장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소극장 객석 시트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서류 봉투를 툭툭 쳤다.

“무단 소극장 강제 인수 및 권리 이전 합의서입니다. 건물주와의 계약은 이미 이든 측에서 정리가 끝났으니, 남은 건 이 퀴퀴한 곰팡이 냄새나는 무대에서 짐을 싸는 것뿐이죠. 신우현 씨의 전속 계약 이관 서류도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 실장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존중도 없었다. 그에게 배우란 그저 감정이라는 원자재를 추출해 내는 기계 부품에 불과했으니까.

“무슨…….”

우현이 다시금 이를 악물며 일어서려 했지만, 하준이 가볍게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무대 가장자리로 걸어 나갔다. 하준은 무대 아래에 서 있는 임 실장을 내려다보며, 마치 흥미로운 연극 소품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일 처리 방식은 여전히 천박하네.”

하준의 빈정거림에 임 실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는 아까부터 누구 선동질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무명 연극배우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글쎄. 무명인지 유명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하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손가락이 임 실장이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가리켰다.

“법적인 절차를 운운하기 전에, 이 극장의 역사와 가치를 단돈 몇 푼의 장부상 숫자로 퉁치려는 그 게으른 기획력이 한심해서 그래. 한서진 대표가 시키던가? 남의 상처를 가공해서 파는 것 말고는 스스로 가치를 창출할 줄 모르는 삼류 장사꾼의 방식이잖아, 그거.”

“입 조심해라, 애송이.”

임 실장의 목소리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백설희의 무표정한 눈동자에도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자신의 대표를 ‘삼류 장사꾼’이라 칭하는 겁 없는 신인의 존재에 흥미를 느낀 기색이었다.

하준은 임 실장의 살기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오히려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속을 짓누르는 이인증의 고통이 극에 달해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지만,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전생의 수많은 현장을 지배했던 대배우의 아우라가 그의 겉가죽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화내지 마시죠, 임 실장님. 화를 낸다는 건 논리가 부족하다는 자백이니까.”

하준이 무대 아래로 한 걸음 내려왔다. 임 실장과의 거리가 단 세 걸음으로 좁혀졌다. 임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하준의 기세에 눌려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렇게 하죠.”

하준은 임 실장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임 실장이 당황해 손을 뻗기도 전에, 하준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서류 봉투를 반으로 찢어버렸다.

찌이익―!

날카로운 마찰음이 소극장 천장에 부딪혀 흩어졌다. 하준은 찢어진 서류 뭉치를 임 실장의 가슴팍에 툭 던지며 생긋 웃었다.

“이딴 쓰레기 종이 쪼가리로 예술을 살 순 없어.”

“미쳤군!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임 실장이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질렀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든 소속의 대역 배우 구민재와 경호원들이 일제히 움직이려 했다.

“진정하세요.”

하준이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가 기이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극장은 무대 위의 법을 따릅니다. 당신들이 데려온 그 잘난 메이저 대역 배우, 구민재 씨라고 했나?”

하준의 시선이 임 실장의 뒤편에 서 있는 구민재에게 꽂혔다. 구민재는 갑작스러운 지목에 침을 삼켰다.

“소극장 무단을 보존할지, 아니면 당신들 뜻대로 넘길지. 무대 위에서 결정하자고. 대본 없는 즉흥 침묵 연기. 단 한 장면만으로, 저 친구가 내 눈빛을 10초라도 버텨낸다면 순순히 이 무대를 비워주지.”

하준의 오만한 제안에 소극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백설희의 눈빛이 처음으로 깊게 가라앉으며 하준을 응시했다. 무대 위에서 숨을 몰아쉬던 우현 역시 하준의 미친 듯한 도발에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 미친 대 대결의 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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