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지독하게 차가웠다.

코를 찌르는 싸구려 염소계 표백제 냄새와 정체 모를 곰팡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파르르 떨며 울어대는 구형 형광등의 소음이 귓전을 때렸다. 온하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초점을 맞추었다.

보이는 것은 금이 간 세면대와 녹슨 수도꼭지, 그리고 때가 찌든 회색 시멘트 벽이었다.

칸의 붉은 카펫 위에서 심장이 멎어가던 그 마지막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침묵은 간데없었다. 하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들어 올렸다. 수없이 많은 대본을 넘기며 굳은살이 박여 있던 손가락 끝이, 지금은 마치 아무런 고초도 겪지 않은 정갈한 백지처럼 매끄러웠다.

“……하.”

짧은 탄식이 갈라진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거울 속의 얼굴은 낯설 만큼 젊었다. 눈가에 깊게 파여 있던 피로의 주름도, 영혼을 갉아먹으며 버텨온 세월의 흔적도 없었다. 고작 스물넷. 연극계의 변두리를 전전하며 기회를 갈구하던 그 시절의 온하준이 거울 너머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회귀(回歸).

황당무계한 단어가 뇌리를 스쳤지만, 온몸의 감각이 이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축축한 공기와 뼛속까지 시려 오는 소극장의 냉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 순간, 거울 표면 위로 기괴한 청록색 격자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광선들이 하준의 시야를 가로지르며 정교한 표를 그려 나갔다.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는 반투명한 인터페이스. 그것은 흡사 꼼꼼하게 정리된 기업의 회계 장부를 닮아 있었다.

[시스템 ‘배우의 대차대조표(The Actor's Balance Sheet)’를 개설합니다.] [사용자: 온하준 (배우)] [자산(Asset): 발성 안정도 A, 신체 통제력 A-, 대사 분석력 S, 누적 연기 자산 0] [부채(Liability): 완벽주의 강박증(이월), 회귀 전 죄책감(이월), 잠재적 트라우마 계정 0] [자본(Equity): 순수 연기적 자아 100%]

“대차대조표라고?”

하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극한의 혼란 속에서도 그의 고압적인 완벽주의 성향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턱을 괴고 거울 속의 시스템 창을 지적으로 뜯어보았다.

예술을 복식부기로 계산하다니. 메디치 가문이 환생해서 충무로에 길거리 기획사라도 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장부의 명세는 자비가 없었다. 자산 항목에 기록된 자신의 연기 능력치들은 회귀 전 일류 배우로서 쌓아 올린 정밀한 감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지만, 부채 항목에 붉은 글씨로 박힌 ‘완벽주의 강박증’과 ‘죄책감’은 심장을 무겁게 압박해 왔다.

그 죄책감의 원천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준은 서둘러 화장실 문고리를 잡았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서자, 어둡고 좁다란 소극장 ‘무단’의 백스테이지 복도가 나타났다. 익숙한 먼지 냄새와 무대 조명용 젤 필터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향이 안면을 때렸다.

저 멀리, 복도 끝 무대 뒤편의 음침한 구석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흑, 아아아!”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목을 매단 이의 단말마 같기도 한 처절한 오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는 하준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구형 형광등의 소음보다 더 크게 귓가를 울렸다.

무대 뒤편, 부서진 소품 상자들이 쌓여 있는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된 얼굴. 낡은 대본을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쥔 채, 스스로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존재.

신우현이었다.

회귀 전, 스스로를 완벽하게 불태워 재로 만들어버렸던 천재. 마침내 대중의 광기 어린 환호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하준의 가슴에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겼던 나의 라이벌.

그가 살아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숨을 쉬며, 여전히 자신을 파괴하는 연기에 몰입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우현아.”

하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우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입술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깨물려 있었다. 그는 대본의 대사를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자학적인 감정의 심연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때, 신우현의 머리 위로 붉은색 경고 탭이 점멸했다.

[대상: 신우현 (라이벌 배우)] [캐릭터 싱크로율: 104% (과부하 상태)] [내면 감정 소모율: 99% (적색 경고 - 영혼 마모 진행 중)] [보유 부채: 중증 우울증, 불안성 이인증(Depersonalization)*]

*작가 주석: 이인증(離人症). 자신의 몸이나 정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제3자가 된 듯한 기괴한 소외감을 느끼는 증상. 연기자로 치면 ‘자아라는 배역의 대본을 분실한 상태’와 같다. 영혼을 갈아 넣는 메소드 연기자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치명적인 직업병이다.

저 수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회귀 전에도 신우현은 저렇게 제 몸을 땔감 삼아 연기의 불꽃을 피우다 결국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99%의 감정 소모율은 영혼의 파산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준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와 깊은 슬픔이 동시에 솟구쳤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천재성을 예술이라 부르며 방관했던 지난날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이 미친 천재를 구원하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하준은 입꼬리를 바르르 떨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극한의 패닉 상태일수록 차갑게 웃는 그의 고압 희색형 버릇이 튀어나왔다.

“여전하네, 신우현. 여전히 연기를 무슨 도살장 백정 칼춤 추듯 하고 있어.”

우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하준의 모습이 담겼지만, 그의 입술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너…… 온하준…….”

“그래, 네 유일한 관객이자 네가 평생 이기지 못할 벽이지.”

하준은 차가운 조소를 던지며 우현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떠 있는 대차대조표 시스템 창을 응시했다.

[시스템 알림: 상대방의 감정 부채가 임계점을 초과했습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대상의 정신적 붕괴가 시작됩니다.] [옵션: '부채 이관'을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내면 트라우마 및 감정 소모율의 일부를 사용자의 자산 감가상각 장부로 이관합니까?] [※ 주의: 부채 이관 시 사용자는 즉시 '트라우마 시뮬레이션'에 노입되어 직접적인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하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분석적인 지성이 그에게 경고를 보냈지만, 완벽주의자로서의 강박과 우현을 향한 구원의 갈망이 그 경고를 가볍게 짓밟았다.

“넘겨.”

하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 그 구차하고 무거운 슬픔, 나한테 넘기라고. 내가 정산해 줄 테니까.”

그가 허공의 ‘부채 이관 수락’ 버튼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순간, 소극장의 공기가 일순간 멈춘 듯한 기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신우현의 머리 위에 떠 있던 99%의 적색 수치가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부채 이관 계약 체결 완료.] [신우현의 감정 소모율 30%를 온하준의 장부로 이관합니다.] [온하준의 잠재적 트라우마 계정에 '불안성 이인증'이 등재되었습니다.]

“윽……!”

하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시야가 기괴한 흑백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서 있는 신우현의 모습이 마치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자신의 손발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괴한 이질감. 자아가 육체라는 껍데기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허공을 떠도는 듯한 극심한 공포가 온하준의 뇌수를 헤집어 놓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조여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파로 들어오는 공기가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목구멍을 찢어발기는 듯한 환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것이 신우현이 매 순간 견뎌내던 지옥의 편린이었다.

하준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시멘트 벽을 긁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시야는 완전히 암전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준은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올렸다.

‘겨우 이 정도인가.’

자신에게 들이닥친 이 지옥 같은 환각 속에서, 하준은 오히려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이 고통을 견뎌내고 정산할 수만 있다면, 저 눈앞의 천재를 제 살을 깎아 먹는 자멸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와 함께 세계의 정점에 서서 진짜 연기가 무엇인지 증명해 보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몸은 정직했다.

하준의 무릎이 꺾였다. 시야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그의 귓가에 차가운 시스템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경고: 대중의 리스크 투표가 개시되기 전, 이입된 트라우마를 완벽한 연출 연기로 돌파하지 못하면 사용자의 정신적 영구 손상이 발생합니다.] [첫 번째 정산 스케줄까지 남은 시간: 24시간.]

어둠 속에서, 온하준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준아?”

바닥으로 무너지려던 하준의 어깨를 거친 손길이 악착같이 붙잡았다.

신우현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광기 어린 안개가 걷혀 있었다. 감정 소모율이 99%에서 69%로 수직 하강한 덕분이었다. 제 영혼을 갉아먹던 자학적인 과몰입에서 기적적으로 비껴난 우현은, 오히려 평소와 다르게 사시나무 떨듯 떠는 하준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 너 왜 이래.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질문은 하준의 귀에 닿지 않았다.

지금 하준의 뇌가 인지하는 세상은 지독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수중에서 울리는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손가락을 구부려 우현의 깃을 쥐려 했으나, 마치 두꺼운 우주복 장갑을 끼고 물건을 잡으려는 것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자아와 육체의 분리.

영혼이 육체라는 단단한 감옥에서 튕겨 나가 허공에서 제 시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이 기괴한 소외감은, 연기론에서 말하는 최악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시스템 알림: 사용자의 '불안성 이인증' 수치가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감각 차단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물리적 최정착 훈련(Grounding)*'을 권장합니다.]

*작가 주석: 그라운딩(Grounding). 극심한 해리나 이인증 상태에서 오감을 자극해 자아를 현실로 강제 소환하는 기법. 얼음물을 마시거나, 거친 질감을 만지거나, 스스로의 뺨을 세게 때리는 등의 '셀프 뺨 때리기 치료법'이 대표적이다.

하준은 비틀거리며 무대 소품용으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깨진 거울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손바닥으로 날카로운 유리 단면을 움켜쥐었다.

서늘한 감각 뒤에 찾아온 찌르는 듯한 통증.

붉은 혈선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자, 멀어졌던 세상의 소음이 단숨에 고막으로 들이닥쳤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하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미친 새끼가 진짜…… 뭐 하는 거야!”

우현이 경악하며 하준의 손을 쳐냈다. 깨진 유리 조각이 바닥으로 구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준은 피가 흐르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연습이야. 메소드 연기의 기초도 모르는 삼류 배우들이나 몸을 사리는 법이지.”

“온하준!”

“시끄러워, 신우현. 관객이 시끄럽게 굴면 무대 위에 선 배우가 집중을 못 하잖아.”

하준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비록 강제로 이입된 이인증의 잔재 탓에 시야의 가장자리가 여전히 흑백으로 명멸하고 있었지만, 이 고통마저 연기의 소스로 삼겠다는 광기가 그의 눈동자에서 번뜩였다.

쾅-!

그때, 소극장 무단으로 들어오는 낡은 철문이 굉음을 내며 나가떨어졌다.

지하 특유의 눅눅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세련된 이태리제 가죽 구두의 둔탁한 굽 소리였다. 어둠침침한 관객석 사이로 서너 명의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그들의 중심에 선 사내는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고가의 맞춤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한서진의 심복이자, 수많은 신인 배우들을 계약서 한 장으로 노예로 만들었던 사냥개.

임 실장이었다.

그의 뒤에는 덩치가 산만 한 사내들과 함께, 거만한 표정으로 껌을 씹고 있는 젊은 배우 하나가 서 있었다. 하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망막 위로 새로운 장부 명세가 어지럽게 갱신되었다.

[대상: 임창현 (이든 엔터테인먼트 기획실장)] [적대도: 극도로 높음 (무단 소극장 폐쇄 및 신우현 강제 수거 임무 수행 중)]

[대상: 구민재 (대역 배우)] [자산: 기교형 발성 B, 신체 장악력 C+, 캐릭터 싱크로율 15%] [상태 이상: '가면의 조종사' 하위 계약자 (한서진의 하수인)]

“여전히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곳이군.”

임 실장이 코트를 털어내며 혐오스럽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무대 뒤 어둠 속에 서 있는 신우현에게 멈췄다.

“우현아, 짐 싸라. 한 대표님이 너 같은 인재가 이런 쓰레기통에서 썩는 걸 원치 않으신다. 이든에서 준비한 '비운의 천재' 포트폴리오의 첫 페이지는 이미 인쇄에 들어갔어.”

우현의 전신이 굳어졌다. 그가 쥐고 있던 대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회귀 전, 우현을 요절로 몰고 갔던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가학적인 '요절 마케팅'의 마수가 지금 이 순간 뻗쳐오고 있었다.

“싫어…… 난 안 가.”

우현이 주먹을 쥐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거대 기획사의 압도적인 자본과 권력 앞에서, 무명의 연극배우는 날벌레에 불과했다.

임 실장이 비웃음을 흘리며 뒤에 서 있던 구민재를 앞으로 밀어냈다.

“안 가겠다면 힘으로라도 데려가야지. 이 극장, 오늘부로 우리 이든이 인수했다. 건물주와 합의는 끝났어. 당장 꺼지지 않으면 무단침입으로 고소할 테니 그리 알고. 아, 그리고 저기 서 있는 구민재 군이 오늘부터 무단 소극장의 간판 연극 '심연'의 주연을 맡기로 했다. 우현이 네 자리는 이제 없어.”

구민재가 하준과 우현을 내려다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선배님들, 연극판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메이저의 진짜 연기가 뭔지 옆에서 편하게 구경이나 하시죠.”

상황은 최악이었다. 무단 소극장이 무너지면 우현을 지켜낼 방어선이 사라진다. 게다가 하준의 시스템 장부는 여전히 이인증의 부채로 인해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경고: 대중의 리스크 투표가 활성화되기 전, 즉흥 연기 전투를 통해 '무단 소극장'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자산 수치가 영구 감쇄합니다.] [현재 리스크 투표 의구심 지수: 12% (상승 중)]

하준은 주머니 속의 피 묻은 손을 천천히 꺼냈다.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완벽하게 걸렸다. 극한의 위기 상황일수록, 그의 완벽주의 강박은 가장 화려한 가면을 만들어냈다.

그가 천천히 걸어 나가며 임 실장과 구민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든 엔터테인먼트라. 길거리에서 개 사료 파는 기획사 이름치고는 제법 거창하네.”

임 실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는 뭐 하는 뼈다귀냐?”

“이 극장의 진짜 주인이자, 앞으로 너희 대표 한서진의 목줄을 쥘 사람.”

하준이 구민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인증의 환각 탓에 구민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보였지만, 하준의 지성은 냉철하게 그의 약점을 분석해 냈다. 싱크로율 15%의 삼류 기교 배우. 한서진이 보낸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한 존재.

“진짜 연기가 뭔지 보여주겠다고 했나, 구민재?”

하준이 무대 위로 한 걸음 올라섰다. 낡은 무대 바닥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좋아. 그럼 이 관객도 없는 썩어빠진 무대 위에서, 딱 한 장면만 맞춰보지. 대본은 필요 없어. 즉흥 침묵 연기다. 네가 내 눈빛을 단 10초라도 버텨낸다면, 이 극장 통째로 넘겨주고 우현이도 순순히 보내주지.”

“하준아! 미쳤어?”

우현이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하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 붉은색 시스템 메시지가 거대하게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침묵의 심판'이 개시됩니다.] [성공 조건: 즉흥 침묵 연기로 상대 배우 구민재의 자아를 완벽히 압도할 것.] [실패 시 대가: 신우현의 소유권 이든 이관, 사용자의 이인증 영구 고착화.]

하준은 피가 흐르는 손을 털어내며 구민재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그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준비됐나, 삼류?”

그 순간, 소극장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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