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 놀아 보자는 거지, 지금?”
구민재가 코웃음을 치며 무대 위로 발을 디뎠다. 그의 구두굽이 삐걱거리는 합판 바닥을 내리누를 때마다 둔탁한 소음이 지하 소극장의 사방 벽에 부딪혔다. 연차로만 치면 대학로에서 굴러먹은 지 얼추 8년이 넘은 베테랑이었다. 비록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그림자 대역으로 들어가며 제 영혼을 저당 잡히긴 했으나, 날것의 연극 무대에서 쌓아 올린 발성의 뼈대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구민재가 턱을 치켜들며 성대를 울렸다.
“야, 애송이. 침묵 연기? 대본도 없이 눈빛으로 10초를 버티라고? 네가 무슨 대단한 메소드 배우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카메라 앞이랑 이 연극 무대는 격이 달라. 마이크도 없는 여기서 네 눈빛이 저 구석 자리 관객한테 1호기 카메라 렌즈마저 없이 전달될 것 같아? 주둥이만 살아서는.”
소극장의 낡은 텅스텐 조명이 흔들리며 구민재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그는 일부러 어깨를 넓게 펴고 횡격막을 부풀렸다. 소위 ‘무대를 장악하는 육체적 연출’이었다. 기성 연극계에서 상대를 기선 제압할 때 흔히 쓰는 전형적인 압박 기술이었다.
하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 오른쪽 구석에서 푸른빛과 붉은빛이 교차하는 격자무늬 장부가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배우의 대차대조표 가동] * 대상: 구민재 (싱크로율: 42% / 감정 소모율: 28% / 자산: ‘성량의 물리적 압박’ / 부채: ‘고착화된 양식미’) * 대상: 온하준 (침묵 몰입도: 대기 중 / 트라우마 부채: 38% / 활성 상태: 이인증 환각 진행률 40%)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쇄골 아래에서부터 타올랐다. 회귀의 대가로 들이닥친 이인증*의 환각이었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마치 거대한 유령이 되어 내 가죽을 뒤에서 조종하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그러나 하준은 그 지옥 같은 감각을 오히려 입가에 걸어두는 ‘냉소’의 재료로 삼았다. 고압 희색형의 가면이 그의 얼굴 위에 단단히 밀착되었다.
*이인증(Depersonalization): 자아가 자신의 신체나 정신 과정으로부터 일시적 혹은 지속적으로 분리되어 소외감을 느끼는 상태. 연극계에서는 ‘내 몸을 조종하는 꼭두각시 조종사가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비유되곤 한다.
“말이 길군요, 구민재 씨.”
하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무대 중앙으로 두 걸음 걸어 나갔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건 목소리의 데시벨이 아니라, 그 공간을 메우는 호흡의 밀도입니다. 시작하시죠. 10초는 당신에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질 테니까.”
“이 새끼가 진짜―!”
구민재가 분노로 핏대를 세우며 하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협적인 기세가 소극장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구민재는 당장이라도 하준의 멱살을 잡을 듯이 눈을 부릅뜨고, 목에 굵은 힘줄을 세웠다. 연극 <리어왕>의 광기 서린 폭군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과장 연기(Ham acting)의 교본이었다.
그 순간, 하준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그저 ‘존재’하기 시작했다.
하준은 단 한마디의 대사도 뱉지 않았다. 그저 구민재의 핏발 선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하준의 눈빛이 닿는 순간, 구민재의 성대를 울리던 분노의 파동이 기묘하게 꺾여 나갔다.
하준의 시선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담지 않은 무(無)의 상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난 뒤의 황량한 무덤, 혹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의 바다와 같았다. 하준은 전생에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끝내 제 가장 위대한 라이벌이자 파트너였던 신우현의 요절을 막지 못했던 그 지독한 죄책감과 완벽주의의 광기를 눈동자속에 압축해 넣었다.
대차대조표의 숫자가 가파르게 진동했다.
* 온하준: 침묵 몰입도 85% 돌파. (감정 부채를 자산으로 전환 중) * 구민재: 감정 소모율 55% 급증. (호흡 불안정 발생)
하준은 스타니스라프스키의 ‘주의 집중의 고리’를 극도로 좁혔다. 무대 위의 먼지 한 톨, 구민재의 콧방울이 씰룩이는 미세한 떨림, 그리고 그의 옷깃이 흔들리는 찰나의 공기 흐름까지 전부 제 통제 하에 두었다.
하준이 아주 느리게, 오른발을 반 보 앞으로 내디뎠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구민재는 마치 거대한 철퇴가 제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듯한 물리적인 압박감을 느꼈다. 하준의 눈빛이 구민재의 시선을 옭아맨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뱀이 사냥감을 응시하는 포식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인간의 내면을 낱낱이 해체해 들어가는 부검의의 메스에 가까웠다.
“어, 어…….”
구민재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뭘 봐!” 하고 고함을 치며 이 기괴한 침묵을 깨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딱딱하게 굳어 시멘트를 부은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대사 없이 버티는 침묵의 시간은 배우에게 가장 가혹한 고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침묵은 무대 위의 진공상태를 만들고, 그 진공은 배우의 폐부에서 산소를 사정없이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하준은 구민재의 호흡 템포를 완전히 가로채 갔다. 구민재가 숨을 들이쉬려 할 때 하준은 시선의 각도를 미세하게 아래로 낮추어 그의 시선을 떨어뜨렸고, 구민재가 당황해 눈동자를 굴릴 때 다시 정면으로 그 눈을 쏘아보며 호흡의 맥을 끊었다.
이른바 호흡 가로채기(Breath Hijacking)*의 정수였다.
*호흡 가로채기: 상대 배우의 호흡 주기를 시각적 자극과 신체적 리듬으로 강제 조정하여, 상대가 제 페이스를 잃고 극심한 과호흡이나 질식감을 느끼게 만드는 고난도의 침묵 제어 기술.
“흡…….”
구민재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꺼풀을 적셨다. 하지만 그는 눈을 깜빡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준의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어둠의 형상이 자꾸만 제 목을 조르는 환각이 보였기 때문이다.
1초. 2초. 3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소극장 무단에 모여 있던 한서진의 수하들과 임 실장은 이 비정상적인 광경에 숨을 죽였다. 덩치 큰 기성 배우 구민재가, 가녀린 체구의 신인 온하준 앞에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4초. 5초. 6초.
구민재의 무릎이 꺾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탈색되어 아무런 대사도, 동선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의 눈빛을 피해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객석 맨 구석,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신우현이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우현의 눈동자가 기이한 광채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는 오직 무대 위, 한마디 대사도 없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온하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우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녹슬어 방치되어 있던 거대한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든 엔터테인먼트의 가학적인 가스라이팅과 학대 속에서 스스로를 불태워 죽어가던 그의 영혼에, 하준이 쏘아 올린 차가운 예술의 불꽃이 직격으로 내리꽂힌 것이다.
[배우의 대차대조표 - 연동 감지] * 대상: 신우현 * 예술 갈망 수치: 18% -> 42% -> 75% (폭발적 회복세) * 상태: 자멸적 체념에서 ‘투지’로의 영혼 전환 발생.
‘저 녀석은…… 대체 뭐지?’
우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이었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준이 보여주는 연기는 기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길어 올린, 지독하게 정교하고 계산적인 ‘증명’이었다. 우현의 핏대가 서서히 솟구치며, 그의 식어버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8초.
“아, 욱……!”
구민재가 헛구역질을 하며 무대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의 거구가 합판 위로 나뒹굴었다. 구민재는 가슴을 움켜쥔 채 헐떡였다. 마치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산소를 갈구하는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단 10초를 버티지 못하고, 연기력의 격차만으로 뇌가 산소 부족을 일으킨 것이다. 무대 위의 완벽한 고사(枯死)였다.
하준은 바닥에 쓰러진 구민재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가면을 고쳐 썼다. 그의 화사한 미소가 다시 피어올랐다. 가슴속을 찌르는 이인증의 통증을 억누르며, 그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9초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퇴장하십니까, 선배님?”
하준의 목소리에는 뼈가 가득 차 있었다.
“무대 위의 중력은 생각보다 무겁죠. 날림으로 배운 기교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척추를 꺾어버리니까요. 이든의 메이저 대역 배우라는 타이틀이, 이 낡은 소극장의 바닥 먼지보다 가볍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이, 이 괴물 같은 년놈들이……!”
임 실장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구민재의 연기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이 말도 안 되는 패배가 믿기지 않았다.
임 실장이 뒷걸음질을 치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가자! 일단 철수해!”
그들이 서둘러 도망치듯 소극장을 빠져나가려 할 때, 임 실장의 서류 가방이 덜컥 열리며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급하게 짐을 챙기던 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 일부분을 미처 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지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하준은 멀어지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바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흩어진 종이 더미 중 유독 눈에 띄는 붉은색 인장이 찍힌 문서를 빠르게 낚아챘다.
[비운의 요절 마케팅 포트폴리오 - 신우현 항목 실마리 획득] * 회수 복선(2화 탑재): 한서진의 비서가 흘린 기획 문서의 실체 파악 완료.
하준은 문서를 슬쩍 재킷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의 입꼬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서진, 그 악마 같은 인간이 신우현을 어떻게 파멸로 몰고 가려 했는지, 그 추악한 설계도의 첫 페이지가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하준아…….”
무대 뒤편에서 우현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죽어 있던 눈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꽃 같은 생기가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방금 그건…….”
하준은 우현을 향해 몸을 돌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했잖아, 우현아. 난 네 최고의 파트너가 될 사람이라고.”
바로 그 순간, 소극장의 가장 깊은 어둠, 아무도 앉지 않았던 객석 맨 뒷줄에서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스스슥.
어둠 속에서 정체불명의 흰 종이 한 장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하준의 발치 앞에 툭 떨어졌다.
하준과 우현의 시선이 동시에 바닥으로 향했다.
그것은 고급 크라프트지로 제작된 봉투였다. 봉투의 전면에는 굵고 거친 필체로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영화 <심연의 가면> 특별 오디션 추천장 - 감독 강태오]
하준이 고개를 들어 객석 어둠 속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낡은 가죽 의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한민국 영화계를 뒤흔드는 거장, 강태오의 그림자가 소극장 무단에 드리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