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이 기진맥진한 육신을 이끌고 차디찬 마룻바닥의 대전 앞으로 들어선 순간, 이이첨과 김상헌을 비롯한 백관이 독설에 가득 찬 상소문들을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종이뭉치들이 명정전의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흩날리며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가마터의 열기와 유독가스에 그을린 이진의 뺨 위로 찬바람이 스쳤으나, 그의 눈빛은 도리어 기하학적인 수식의 나열처럼 명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하! 이진 저 자는 미천한 잡술로 주상의 총명을 가리고, 조정의 정당한 물력 배분을 어지럽히고 있사옵니다!"
사간원 대사간 김상헌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조정을 울렸다. 그의 꼿꼿한 척추는 성리학적 대의와 척화의 명분으로 단단히 다져진 절벽과 같았다.
"사사로이 영변의 철광을 독점하여 제 손아귀에 넣으려 획책한 것은 조정의 전매권을 찬탈하려는 역모의 전조이자, 대명률이 엄히 금하는 장오(贓汚)의 대죄이옵니다. 저 간악한 기술관료의 목을 베어 종묘사직의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그 뒤를 이어 대북 세력의 관료들이 썰물처럼 엎드리며 일제히 격앙된 어조로 입을 모았다.
"목을 베소서, 전하!"
"사직의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옥좌에 앉은 광해군의 눈동자가 깊은 의구심과 광증 서린 피로감으로 침침하게 번뜩였다. 그는 턱을 괸 채, 흩어진 상소문들과 그 중심에 홀로 서 있는 이진을 번갈아 보았다. 이진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머릿속의 시뮬레이터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하자, 관자놀이 부근의 신경이 바늘로 찌르듯 아려왔고 귓가에서 미세한 온기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혈(耳血)의 전조였다. 그러나 이진에게 인간의 신체적 통증 따위는 연산의 오차 범위 내에 존재하는 사소한 변수에 불과했다.
이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에는 사대부들이 흔히 지니는 구차한 읍소나 명분에 대한 경외가 없었다.
"대사간께서는 대명률을 들어 저를 치려 하시는군풍."
이진의 목소리는 지극히 건조하고 평이했다. 감정이 거세된 기술관료의 양적인 보고서와도 같은 말투였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대명률 '형율(刑律) 수장(受贓)조'와 '직리장람(職吏贓濫)'의 법리가 어찌 사사로운 제강 기술을 검증하려는 자에게 적용될 수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진짜 장오의 죄를 지어 국가의 병참을 좀먹고, 화약과 철물의 유통을 어지럽힌 배후가 이 조정 안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들의 목부터 베어야 마땅치 않겠습니까?"
"무엇이라? 이 요망한 자가 감히 편전에서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김상헌이 호통을 쳤으나, 이진은 품 안에서 오래된 가죽으로 감싸인 묵직한 고서판과 장부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군기시의 모든 물류 흐름을 감시하던 중, 이이첨의 수하이자 대북 세력의 자금줄인 도접장 길준의 부정을 포착해 백업해 두었던 결정적 물증이었다.
"이것은 도성 안팎의 철물과 은의 유통을 장악한 도접장 길준의 사적 수납 장부이자, 군기시 야철 주조 대장입니다. 주상전하, 신이 군기시에 들어갔을 당시, 조총의 총열이 폭발했던 원인은 단순한 주조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었사옵니다."
이진은 장부를 높이 들어 올리며, 시뮬레이터가 연산해 낸 수치들을 거침없이 읊조렸다.
"도접장 길준은 군기시에 납품되는 동철(銅鐵)의 배합비를 위조하였습니다. 기준 미달의 똥철을 납품하고, 그 차액으로 발생한 막대한 은자와 초석을 사사로이 유포하여 대북의 일부 가신들과 결탁하였사옵니다. 대명률 '직리장람' 규정에 따르면, 관직을 이용하여 사사로이 재물을 갈취하고 위조 장부를 작성한 자는 장(杖) 일백에 유(流) 삼천리, 혹은 참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장부에는 길준이 동철의 무게를 속여 가며 장부를 사적으로 조작한 명백한 필적과 수납 도장이 찍혀 있사옵니다."
순간, 백관들의 맨 앞줄에 서 있던 이이첨의 은빛 수염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이진이 든 장부로 향했다. 이이첨은 즉시 상황의 심각성을 간파했다. 도접장 길준은 자신의 사적 군사력과 정치 자금을 조달하는 가장 거대한 자금줄이자 가신이었다. 그 장부가 이진의 손에 들어가 실시간으로 해부되고 있는 것이었다.
"전하! 저 자가 가져온 장부는 출처가 불분명한 위조품이옵니다! 군기시의 야철 공정을 방해하기 위해 꾸며낸 모함에 불과하옵니다!"
이이첨이 급히 나섰으나, 이진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이었다.
"위조 여부는 의금부의 서리들을 시켜 도성 내 길준의 전점(廛店)에 보관된 대조 장부와 맞춰보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증명될 것입니다. 또한, 이 장부의 가치가 진짜인 이유는 여기에 기록된 철의 유황 성분 비합률 때문입니다."
이진은 광해군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심리를 흔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는 오직 실리뿐이었다.
"영변의 철광석은 조선에서 가장 매장량이 많으나, 유황(S)과 인(P)의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제련할 때마다 부스러지고 갈라지는 '유황 중독'의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서태린의 부친이 남긴 일지에도 '영변의 철은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똥철로 변하니, 이는 하늘이 조선에 내린 저주다'라고 탄식한 기록이 있사옵니다."
이진은 품에서 서태린의 아비가 남긴 빛바랜 야철 일지를 꺼내 보였다. 수십 년간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었던 조선 야철의 산 역사였다.
"그러나 신은 이 실패의 기록에서 핵심 단서를 찾아내었습니다. 황 성분이 가득한 무쇠를 고온 가열할 때, 소석회(消石灰)를 적절한 비율로 투입하면 유황 성분이 슬래그로 분리되어 쇳물 위로 떠오른다는 과학적 원리입니다. 신은 이미 군기시 가마터에서 이 공정을 완벽히 검증해 내었습니다."
이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편전의 무거운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차가운 새벽바람을 뚫고 들어온 이는 머리에 수건을 질러매고 얼굴에 검은 그을음을 묻힌 서태린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묵직한 물체가 들려 있었다. 서태린은 대전의 법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이진의 곁에 가 무릎을 꿇었다.
"주상전하, 군기시 야철 장인들을 대표하여 영변의 똥철로 구워낸 순수 강철판을 바치옵니다."
서태린이 비단을 걷어내자, 은청색의 고결한 빛을 내뿜는 완벽한 강철판이 편전의 촛불 아래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그것은 황과 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거울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강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오오……."
대신들 사이에서 나직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야철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관료들이라면, 저토록 맑은 은청색의 철판이 조선의 흙과 철광석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영변의 무쇠란 말이냐?"
광해군이 마침내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에 서린 의구심이 한순간에 거대한 탐욕과 경탄으로 뒤바뀌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진이 쐐기를 박듯 차갑게 덧붙였다.
"이 공정을 사용하면 기존의 불량 조총 제작 단가의 절반 이하로, 수만 자루의 조총과 고강도 화포를 찍어낼 수 있사옵니다. 주상의 친위 호위대를 전원 신형 조총으로 무장시키고, 북방의 여진족을 방어할 화차 군단을 양산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에 불과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사옵니다."
"조건이라니?"
광해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영변을 비롯한 평안도 일대의 철광산과 초석의 유통 전매권을 오직 군기시, 즉 신이 관할하는 야철 가마터에 독점적으로 귀속시켜 주셔야 하옵니다. 사대부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철광산의 물력을 징발하여 국가의 통제하에 두지 않는다면, 기술이 있어도 원자재의 수급이 막혀 병기 양산은 불가능합니다."
이진의 요구는 사대부들의 경제적 요새인 광산 소유권과 사노비 군역 면제권의 근간을 뒤흔드는 선언이었다.
"전하! 저 자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풍! 전매권을 독점하여 군권을 사사로이 쥐려는 역적의 흉계이옵니다!"
김상헌이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울부짖었으나, 이진은 시선을 돌려 이이첨을 바라보았다.
"이판 대감. 대감의 자금줄인 도접장 길준이 저지른 장오의 죄액은 총액이 은자 수만 냥에 달하옵니다. 군기시의 물력을 사사로이 빼돌려 대북의 사가 가마에서 무기를 밀조하려 한 정황 또한 이 장부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만약 주상전하께서 이 장부를 전면 국문하시어 의금부에 하사하신다면, 대북 세력의 절반 이상이 역모와 장오죄로 대명률의 칼날 아래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이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도덕적 분노도 없었다. 그저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온 협박이자, 정적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차가운 공리주의적 배분이었다.
이이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진이 쥐고 있는 장부는 단순한 비리 장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북 세력의 목숨줄이자, 광해군이 자신들을 일거에 숙청할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을 제공하는 독약이었다. 만약 여기서 이진을 계속 탄핵하려 들다가는, 자신을 포함한 가문 전체가 장오와 역모의 그물에 걸려 파멸할 것이 자명했다.
광해군은 이이첨의 일그러진 안색과 이진이 제시한 은청색 강철판을 번갈아 보았다. 왕에게 있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적 명분 따위는 자신의 왕권을 지켜줄 총칼보다 무력한 것이었다. 이진이 가져온 기술과 장부는 왕에게 강력한 친위 군권과 정적들을 통제할 칼자루를 동시에 쥐여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도접장 길준을 즉시 의금부에 하수하고, 대명률 '직리장람'의 법리에 따라 엄히 국문하라!"
광해군의 서슬 퍼런 어명이 편전을 갈랐다.
"또한, 군기시의 제강과 병기 주조를 어지럽힌 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장오죄로 다스릴 것이며, 이 시간 이후로 평안도 일대의 철광과 초석 전매권은 군기시 판관 이진에게 독점적으로 귀속한다. 조정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김상헌과 사헌부 대간들이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으나, 광해군은 차갑게 소매를 휘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오후, 도성 밖 처형장에서는 도접장 길준을 비롯한 비리 관료 세 명의 참수형이 집행되었다. 사대부들의 탐욕스러운 이권망을 조장하던 자금줄이 하룻밤 사이에 끊어지고, 그들의 가신들이 목이 잘려 효수되는 참혹한 광경이 도성 백성들과 관료들의 눈앞에 낱낱이 공개되었다.
이진을 불효와 궤변으로 모함하여 거열하려던 대신들은 도리어 자신들이 조장한 횡령과 세리 혐의로 묶여 처형단으로 끌려가는 기막힌 권모술수의 인과응보를 당한 것이었다.
이진은 처형장의 붉은 피가 흙바닥에 스며드는 것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 선 서태린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한 고비는 넘겼으나, 저들의 원한이 뼈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특히 이이첨 대감의 눈빛은 마치 산 채로 우리를 씹어 삼킬 듯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전력의 변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진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이 자원을 잃었으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려 들겠지요. 그것 또한 예측된 경로 내에 있습니다."
같은 시각, 이이첨의 사가 깊숙한 밀실.
자금줄을 잃고 가신들의 참수를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이이첨의 안색은 검푸르게 죽어 있었다. 그의 손에 쥔 찻잔이 가늘게 떨리다가 이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감히…… 감히 미천한 기술자 놈이 내 목을 겨누어 서까래를 흔들다니."
이이첨이 이빨을 갈며 어둠 속을 향해 손짓했다.
그림자 속에서 검은 가죽 옷을 입고 호흡마저 지워버린 정예 자객들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이첨이 혹시 모를 역모와 사리사욕을 위해 평생 동안 사가에 은닉하고 키워온, 살인만을 위해 길러진 최고 수준의 사병들이었다.
"오늘 밤, 군기시 야철 가마터로 가라. 영변의 철과 주조 도면, 그리고 가마터 전체를 흔적도 없이 불태우고, 그 이진이라는 자의 목을 내 앞에 가져오너라."
어둠 속에서 살기 가득한 자객들의 안광이 번뜩였다. 조선의 국방을 뒤흔들 제강 단지를 향해, 보이지 않는 피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