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도성 밖 참수터에 뿌려진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인 그날 밤, 군기시 야철 가마터의 검은 기와지붕 위로 낮게 깔린 안개는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도접장 길준의 목이 달아나고 이이첨의 자금줄이 완전히 끊어진 지 불과 반나절 만이었다.

가마터 한편에서 불어오는 야풍은 차가웠으나, 이진의 이마에는 끈적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허름한 가죽 표지의 일지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서태린의 아비가 남긴, 평안도 영변 철광의 유황 중독 실패 기록이었다.

'영변의 무쇠는 붉은빛을 띠며 단단하나, 매번 풀무질을 거칠 때마다 스스로 깨어지니 이는 흙 속에 숨은 악귀의 소행이라.'

성리학의 명분에 갇힌 이들이 악귀라 부른 것의 실체는 명확했다. 황(S)이었다.

철광석에 잔류한 고농도의 황은 철의 인성을 극도로 저하시켜 조총의 총열을 유리창처럼 깨뜨리는 주범이었다. 현대의 고로에서는 망간이나 석회석을 투입해 이를 슬래그로 걸러내지만, 조선의 1,100도짜리 토법 가마로는 황을 분리해낼 물리적 온도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이진은 머릿속의 가상 주조 시뮬레이터를 기동했다.

[가상 연산 구동: 평안도 영변 자철광 성분 분석] [Fe: 62.4%, S: 1.85%, P: 0.92%] [열량 한계: 1,150℃ (목탄 연소 기준)] [반응식 대입: FeS + CaO -> FeO + CaS (슬래그 분리)] [경고: 뇌신경 전달 물질 과부하율 84%. 연산 지속 시 전두엽 모세혈관 손상 위험.]

귓가에서 이명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진은 무감각하게 손가락 끝으로 귓바퀴를 훔쳤다. 붉은 피가 손가락에 묻어났다. 이미 수백 번을 겪은 이혈(耳血)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미래의 연산 장치를 감당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물리적 대가였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소석회 분말이 담긴 자루를 가리켰다.

"저것을 가마에 투입해라."

옆에서 석탄 가루를 정리하던 서태린이 이진의 붉게 물든 귀를 보고 경악하며 다가왔다.

"나으리, 또 귀에서 피가 흐릅니다! 당장 일손을 멈추고 쉬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 이이첨의 자금줄인 길준의 장부를 털어 조정을 뒤흔든 대가는 곧장 물리적 보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 전에 영변의 철을 완벽한 연철(軟鐵)로 제련해내어 주상에게 전매권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진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건조했다. 사람의 육체도, 자신의 건강도 오직 병기 생산이라는 거대한 공정 속의 소모품일 뿐이라는 태도였다. 서태린은 그의 냉혹함에 소스라치면서도, 일지에 적힌 아비의 평생 한을 풀어줄 유일한 열쇠가 이 외골수 기술관료의 머릿속에 있음을 알기에 침을 삼키며 소석회 자루를 가마 입구로 날랐다.

그때였다. 가마터 외곽을 둘러싼 대나무 울타리 너머에서 미세한 바스락거림이 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 소리와는 달랐다. 규칙적이고, 극도로 살기를 억누른 발소리였다.

이진의 시뮬레이터가 즉각 주변 공간의 음향을 격자형 데이터로 전환하여 분석했다.

[음향 분석: 외곽 경계선 침입자 수 7명.] [이동 속도: 초속 1.2미터. 보폭 및 착지 압력으로 보아 고도로 훈련된 사병.] [무장 상태: 경량 철검 및 화척(불화살) 소지 추정.]

이이첨이 사가에 은닉해 두었던 자객들이었다. 백탄 횡령 비리가 폭로되어 가문이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이이첨은 군기시 제강 단지를 통째로 불태우고 이진의 목을 베어 증거를 인멸하려는 극단적인 수를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나으리, 수색대나 금위영 병사들을 불러야……!"

서태린이 창백해진 얼굴로 철검을 쥐려 하자, 이진이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늦다. 병사들이 이 넓은 야철지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반 각(7분 30초). 그들이 도달하기 전에 저들은 가마에 기름을 붓고 도주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 해결한다."

"자원이라니요? 여기엔 우리 둘과 야장들뿐입니다!"

이진의 시선이 가마터 중앙에 설치된 신형 고압 가열 증기 배관으로 향했다. 벽돌 가마 내부의 화력을 강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진이 직접 설계한, 구리로 주조된 고압 스팀 송풍 장치였다. 현재 가마의 내부 압력은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저 자객들의 동선은 가마터 서쪽의 보관창고를 향할 것이다.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고 있으니, 기압 가마의 안전 밸브를 개방하면 가스의 확산 방향과 일치한다."

이진은 머릿속으로 증기 배관의 압력 지도를 그렸다.

[배관 내 압력: 6.8기압] [안전핀 개방 시 분사 거리: 15미터] [기화 온도: 160℃] [초산 배합량: 12%]

이진은 가마 아래쪽에 연결된 질산과 초산 희석액 조절 밸브를 가리켰다. 주조 형틀을 세척하기 위해 대량으로 제조해 둔 강산성 기화 물질들이었다.

"서태린, 내가 신호를 주면 저 초산 밸브를 최대 개방해라. 그리고 즉시 방수 가죽막 뒤로 숨어라."

"하지만 나으리, 압력 밸브의 안전핀은 수동으로 뽑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가마 자체가 폭발합니다!"

"내 연산은 틀리지 않는다. 움직여라."

이진의 명령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가마의 뜨거운 구리 배관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인해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둠 속에서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자객 세 명이 담장을 넘어 창고 안쪽으로 침투하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그들의 손에는 기름병과 횃불이 들려 있었다.

"지금이다!"

이진이 배관 끝에 달린 무쇠 안전핀을 움켜쥐었다. 가상 시뮬레이터가 핀의 마찰력과 배관 내부의 압력 저항을 실시간으로 계산해냈다. 0.1초라도 늦으면 고압 증기가 그의 오른팔을 통째로 삶아버릴 터였다.

*콰르릉!*

이진이 정확한 타이밍에 핀을 뽑아내며 신형 스팀 내압 가열 밸브를 제어 개방했다. 동시에 서태린이 초산 밸브를 힘껏 돌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가마 내부의 초고온 증기가 초산 기화액을 머금고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백색의 자욱한 증기 장막이 순식간에 서쪽 창고 방향을 덮쳤다. 단순한 수증기가 아니었다. 눈과 호흡기를 찢어발기는 강산성의 독무(毒霧)였다.

"끄아아악!"

"눈이! 눈이 안 보인다!"

창고 뒤편에서 횃불을 밝히려던 자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160도에 달하는 고온의 증기가 그들의 살결을 그슬렸고, 허공에 기화된 초산 가스가 자객들의 안구와 기도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그들이 쥐고 있던 기름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으나, 자욱한 연무 속에서 불꽃은 산소 결핍으로 인해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서태린은 가죽막 뒤에서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칼 한 자루 쓰지 않고, 오직 가마의 압력과 화학 물질의 기화 현상만으로 살기등등한 자객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것이다. 그것은 무장한 지식이 지닌 압도적인 우월성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연무의 확산 경로는 저들의 도주로인 북쪽 문으로 유도된다."

이진이 기침을 참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귀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 끝을 타고 내화 벽돌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연무 속에 갇힌 자객들은 보이지 않는 초산 열기와 배관이 울부짖는 기괴한 폭력음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요술을 부리는 악마라고 확신한 듯 비명을 지르며 북쪽 담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쪽 문을 열고 도망치려던 자객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횃불을 밝혀 든 금위영 수색대였다.

"역적 무리들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포박하라!"

금위영 군관의 호령과 함께 병사들이 그물과 쇠사슬을 던져 도망치던 자객들을 덮쳤다. 이진이 낮에 도접장 길준을 처형한 직후, 이이첨의 보복을 예측하고 의금부와 금위영에 미리 '군기시 야간 경계 강화'를 요청해 두었던 결과였다.

체포된 자객들의 품에서는 이이첨의 사가 문양이 새겨진 패도와 기름 주머니가 낱낱이 쏟아져 나왔다. 배후가 누구인지 조정 백관들 앞에서 다시 한번 명백히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서태린이 이진의 곁으로 다가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으리의 예측대로 되었습니다. 이제 이이첨 대감은 역모의 혐의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이이첨은 꼬리를 자를 것이다. 자객들을 사주한 것은 가신들의 독단이라 치부하겠지."

이진이 차갑게 대답하며 셔츠 소매로 귀의 피를 닦아냈다.

"하지만 상관없다. 저들의 자금줄을 끊었고, 이번 습격으로 인해 주상은 대북 세력의 사병 보유에 대해 극도의 경각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카드가 있다."

이진의 머릿속에는 서태린이 사전에 수집해 두었던 또 다른 정보가 각인되어 있었다. 정인홍 일파의 가신들이 군기시 외부에서 몰래 사적인 가마를 짓고 사철을 야장하여 무기를 밀조했다는 구례 위반 정보였다. 대명률의 '사무기 주조 죄'는 곧 역모를 뜻했다. 정인홍이 자신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 때 사용할 최후의 반격 카드였다.

그러나 정쟁의 소용돌이는 이진의 계산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더러운 방식으로 휘몰아쳤다.

다음 날 아침, 편전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도성 전체는 기괴한 유언비어로 뒤덮였다.

"군기시 판관 이진이 기방과 매향지에 신형 강성 조총을 사적으로 빼돌려 기녀들과 광대들에게 사술을 시험하게 했다!"

"그 조총의 사격술을 전수하는 대가로 음란한 연회를 즐기며 조선의 국법과 성리학의 강상을 어지럽혔다 하더이다!"

터무니없는 날조였으나, 소문은 꼬리를 물고 도성 안으로 번져 나갔다. 대북의 영수이자 성리학의 거두인 정인홍이 배후에서 조종한 여론 조작이었다. 이진이 군기시의 화약과 무기 전매권을 독점하자, 사대부들이 지닌 도덕적 명분론을 극대화하여 그를 '패륜의 간신'으로 낙인찍으려 한 것이다.

왕의 침전 앞마당에는 흰 소복을 입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 수십 명이 거적때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는 대북의 영수 정인홍이 차가운 눈빛으로 상소문을 치켜들고 있었다.

"전하! 군기시 판관 이진은 미천한 기술적 재주를 믿고 임금의 총명을 가렸으며, 사적으로 국경의 병기를 기방에 유출하여 장난감처럼 다루었으니, 이는 백성들을 현혹하고 국가의 근간을 해치는 사술이옵니다! 당장 이진을 참형에 처하시고 가마터를 국유화하여 사대부들의 감시하에 두소서!"

백관들의 연명 상소문이 광해군의 어전 앞으로 던져졌다.

이이첨의 자객 습격 실패를 덮고, 이진의 목을 베어 기술 독점권을 빼앗으려는 정인홍의 최후의 발악이자 거대한 덫이었다.

편전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광해군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이진을 향했다. 이진은 주상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자신이 설계한 미래 병기의 청사진이 정쟁의 칼날 위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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