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의 거대한 널문이 둔중한 굉음을 내며 닫히는 순간, 이진의 시야가 일순 번쩍이며 흐려졌다.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려 턱밑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핏자국이 차가운 쇠가죽처럼 살갗을 죄어왔다. 호흡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탄내가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몸은 이미 사흘 전,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다 쓴 가상 연산의 과부하로 인해 붕괴 직전까지 몰렸던 육신이었다. 좌우로 도열한 대간들의 시선이 서슬 퍼런 칼날처럼 꽂히는 정적 속에서, 이진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사흘 전 군기시 야철 가마터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사투를 복기했다.

***

사흘 전, 군기시의 밤은 지독하게 깊었으나 야철 가마터만은 붉은 용광로의 거친 숨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진은 가마터 한구석,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벽돌 더미 위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관자놀이의 굵은 혈관이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머릿속에 내장된 '미래 무기 설계 데이터베이스 및 가상 주조/제련 시뮬레이터'가 자그마치 사십만 번이 넘는 반복 가상 연산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온은 이미 장작불을 직접 마주한 것처럼 펄펄 끓어올라, 마흔 도에 육박하는 고열이 온몸의 뼈마디를 사정없이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오한이 온몸을 지배하여 이가 덜덜 떨리는데도, 이마와 등줄기에서는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강선(腔線)…… 일 회전에 필요한 최적의 피치(Pitch)와 비틀림 각……."

이진이 갈망하는 것은 단순히 불을 뿜는 활강식 조총이 아니었다. 수년 뒤 전단을 가득 메울 후금의 정예 기갑 기병들을 일격에 꿰뚫고, 동아시아의 전장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총신 내부에서 탄환을 회전시켜 직진성과 관통력을 극대화하는 '강선 조총'의 규격화된 양산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조잡한 야철 기술로 생산된 연질의 철로는 강선을 팔 때 내부에서 발생하는 가스 압력과 응력을 견디지 못하고 총신이 터져버리기 일쑤였다.

눈꺼풀 안쪽에서 시뮬레이터의 푸른 연산 화면이 폭포처럼 홀로 흘러내렸다.

[경고: 대뇌 피질의 열 부하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연산 지속 시 영구적인 신경 손상 및 뇌출혈 발생 가능.]

이진은 어금니를 사정없이 악물었다. 잇몸 사이로 비릿한 핏물이 흘러나와 턱끝을 적셨다.

"계속해."

그는 연산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뇌 용량을 초과하는 부하가 걸리더라도, 철강의 분자 구조를 제어하고 내벽의 두께와 가압 주조 시의 수축률을 소수점 아래 네 자리까지 계산해 내는 인지 연산이 계속되었다. 머릿스크린 안에서 쇳물의 온도가 1,300도에서 1,400도로 치솟고, 탄소 함유량이 0.8%에서 0.4%로 떨어지는 가상의 제련 과정이 수만 번 반복되었다. 마침내 뇌수가 통째로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의 정점에서, 강성 조총 총신 강화를 위한 회전수 공식과 최적의 응력 분포 설계가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이진! 이 미련한 인간아!"

그때, 거친 발소리와 함께 서태린이 달려와 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그녀의 손안에 쥐어진 거친 삼베 수건이 이진의 귀밑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수건은 순식간에 진득하고 붉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귀에서 또 피가 흐릅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병증이란 말입니까? 가마터의 유독 가스 때문입니까,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어서 이리 스스로를 죽음으로 모는 것입니까!"

서태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가마터의 붉은 화광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이진의 귀밑에 마른 수건을 덧대고 삼베 끈으로 그의 머리를 단단히 고정해 주며 손을 벌덜 떨었다. 과학과 제철을 향한 이 비정한 사내의 집념은 그녀로 하여금 경외감을 넘어선 깊은 두려움과 애달픔을 느끼게 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대전의 마룻바닥을 밟기도 전에 쇳물 곁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진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그의 마비된 인지 영역에서 서태린의 눈물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다.

'서태린. 야철의 모든 공정을 현장에서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인적 자원. 이 자의 감정적 소모는 작업 효율을 저하시킨다. 안심시키고 현장에 복귀시켜야 한다.'

이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상관없소. 공식은 추출해 냈으니까."

"공식이라니요? 그깟 종이 위의 수식과 도면 때문에 목숨을 버린단 말입니까?"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이 규격화요. 규격이 없으면 조선의 군사력은 영원히 사대부들의 사적 이권에 휘둘리는 잡졸들의 모임에 불과할 것이오."

이진은 가슴팍에 고이 간직했던 낡은 가죽 서책을 꺼냈다. 그것은 서태린의 아비가 남긴 야철 일지였다. 그는 책장을 넘겨 특정 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유황 냄새와 먼지가 섞인 종이 위에 바스러진 묵흔이 드러났다.

"여기, 그대의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보시오. '평안도 영변 철광의 유황 중독 실패 기록'. 영변에서 채굴된 철광석은 유황(S)과 인(P)의 함량이 조정의 야철 기술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았지. 쇳물을 아무리 오래 끓여도 식는 순간 유황이 철의 결정 사이에 끼어들어 유리처럼 쉽게 깨지는 적열취성(Red Shortness)을 유발했다. 그대의 아버지는 이를 극복하려다 가마를 날리고 역모의 누명까지 썼다."

서태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비의 실패는 그녀의 가슴에 평생 박힌 가장 아픈 가시이자 비밀이었다.

이진이 냉혹하게 읊조렸다.

"하지만 방법이 있소. 유황은 고온에서 강한 염기성 물질과 결합하여 용융 슬래그로 분리된다. 가마 내부의 온도를 천이백도 이상으로 일정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석회석을 가열해 얻은 소석회(산화칼슘)를 정확한 비율로 투입하면 유황은 석고의 형태로 쇳물 위로 떠오른다. 이것이 영변 철광의 유황 중독을 해결하고, 조선의 무쇠를 순수한 강철로 거듭나게 할 유일한 기술적 열쇠다."

그는 시뮬레이터로 영변 철광석의 조성을 대입해 얻은 완벽한 정련 공식을 서태린에게 보여주었다. 인과 황의 오염률을 0.03% 이하로 떨어뜨리는 극적인 연산 결과였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에게 조정의 독점 전매권을 정당화하고, 사대부들의 광산 소유권을 박탈할 가장 강력한 기술적 무기였다.

이진은 품속에 들어 있는 서태린의 옥패를 슬며시 만져보았다. 역모로 몰락한 그녀의 아비가 남긴 유품이자, 가마터의 장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의 상징. 이 비정한 공리주의자는 옥패 역시 장인들을 부리기 위한 유용한 기술 관리의 부속으로 간주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묵직한 촉감을 가슴 깊이 갈무리하며 결의를 다잡았다.

그때, 가마터 중앙에서 장인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가마가 울린다! 쇳물이 끓어 넘친다!"

"송풍이 막혔다! 벽돌이 버티지 못하고 터질 것이다!"

황 성분이 채 빠지지 않은 영변의 무쇠가 고온에서 이상 반응을 일으키며 가마 내벽의 황토 벽돌을 갉아먹고 있었다. 장인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주조 형틀에서 도망치려 했다. 가마가 폭발하면 반경 수십 보 안의 생명체는 쇳물 세례를 받고 뼈도 추리지 못할 터였다.

그 아수라장 속으로 이진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몸은 고열로 인해 오한이 돌아 덜덜 떨리고 있었고, 귀밑의 수건은 이미 검붉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대나무를 쪼개듯 명징하고 압도적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제자리를 지켜라!"

장인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진은 가마의 균열을 매서운 눈으로 훑었다. 그의 안구 뒤편에서 시뮬레이터가 균열의 깊이와 내부 가스 압력을 실시간으로 연산해 냈다.

"자 한치! 우측 송풍구를 정확히 일 치 오 분(分) 넓혀라! 압력을 빼야 가마가 버틴다!"

"하, 하지만 나으리! 송풍구를 넓히면 열기가 빠져나가 쇳물이 굳어버립니다!"

"닥치고 움직여라! 내 계산은 틀리지 않는다!"

이진의 서슬 퍼런 기백과 확신에 찬 눈빛에 압도당한 장인이 비틀거리며 철정을 잡고 송풍구를 넓혔다. 푸쉭 하는 유황 가스 분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으나, 가마의 불길한 진동이 기적처럼 가라앉았다.

"지금이다! 소석회 두 근 사 량(兩)을 가마 안쪽 우측벽을 향해 고르게 투입하라! 서태린, 송풍 온도를 천이백오십도까지 강제로 가압해라!"

이진의 지시에 따라 서태린과 장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마 안으로 하얀 소석회 가루가 뿌려지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쇳물 표면에서 거무죽죽하고 걸쭉한 유황 슬래그가 껍데기처럼 분리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쇠갈퀴로 걷어내자, 가마 안에서 흐르는 쇳물은 이전의 탁한 갈색빛이 아니었다. 은청색의 맑고 고결한 빛을 내뿜는 완벽한 강철이 형틀로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오오……."

늙은 야철 장인이 도구들을 떨어뜨리며 쇳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이것이 정녕 영변의 똥철로 만든 무쇠란 말인가……."

장인들은 자 한치, 오차 수식마저 정확하게 짚어내며 지옥의 가마를 다스리는 이진을 향해 신앙과도 같은 탄복의 눈빛을 보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신의 야철술을 목도한 장인들은 이제 이진의 명령이라면 쇳물 속이라도 뛰어들 기세였다.

그 가혹했던 사흘간의 지옥 같은 사투가 끝난 직후가 바로 지금이었다.

이진은 기진맥진한 육신을 이끌고 창경궁 명정전의 차디찬 대리석 바닥 위에 섰다. 몸에 남은 열기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고, 귀밑의 상처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아려왔다.

어전의 문이 완전히 닫히고, 엄숙하다 못해 살기등등한 침묵이 조정을 지배했다.

김상헌이 이진을 매섭게 쏘아보며 품에서 상소문 뭉치를 꺼내 들었다.

"전하! 이진은 사사로운 기술을 빌미로 조정의 법도를 흔들고, 영변의 철광을 사사로이 독점하려 획책하였사옵니다. 이는 대명률의 '장오(贓汚)'와 '사무기 주조'의 율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대역죄이옵니다! 군기시의 수많은 무기를 사사로이 개조하여 군권을 위협하려 한 저 무도한 자의 목을 베어 사직의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그의 외침을 신호로, 대북 세력의 백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품에서 상소문들을 꺼내 들었다.

"이진을 즉시 국문하소서! 사직의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간신 이진의 목을 베어 백성들의 원성을 달래소서!"

눈발처럼 하얀 상소문들이 어전 바닥 사방으로 뿌려지며 이진의 발치를 어지럽혔다. 이이첨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고, 광해군의 눈빛은 짙은 의구심으로 깊어졌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사대부들의 독설 속에서, 이진은 품 안의 대명률 조문과 영변 철광의 정련 비책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대부들의 탐욕스러운 가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피의 전장이 마침내 개막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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