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쇠비린내와 매캐한 유황 연기가 자욱한 군기시 제1포구의 가마터에 기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대지를 붉게 물들이던 쇳물의 열기가 무색하게도, 입구를 막아선 보부상 사병들의 손에 들린 쇠몽둥이와 철편들이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붉은 도포를 걸치고 탐욕스러운 안광을 번뜩이는 도접장 길준은 갓 주조되어 은백색의 빛을 발하는 조총 총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무엄하다! 이곳은 조정의 무기를 제조하는 군기시의 관할이거늘, 사사로운 상단의 가솔들이 어찌 병장기를 들고 관청의 금줄을 넘는단 말이냐!"

서태린이 가마터의 장인들을 뒤로 물리며 소리쳤으나, 길준은 코방귀를 뀌며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관청이라? 군기시 판관조차 우리 상단의 장부를 보고 숨을 죽이거늘, 어디서 굴러먹던 야철 노비와 근본 없는 기술쟁이가 감히 법도를 논하느냐. 저놈이 쥔 기이한 조총 총열과 주조 도면을 모조리 압수하라. 저항하는 자는 역모를 꾀하는 무리로 간주하여 즉시 타살해도 좋다!"

길준의 서슬 퍼런 일성에 보부상 사병들이 일제히 발을 내디뎠다. 험악한 장정들의 어깨 너머로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가마터를 울렸다. 가마터의 장인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뒤로 물러섰고, 서태린의 안색 역시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표적이 된 이진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쥔, 아직 미온이 남아 있는 은백색의 규격 총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의 가상 시뮬레이터는 이미 작동을 멈추었으나, 극도의 연산으로 인해 관자놀이 부근의 신경이 바늘로 찌르듯 쑤셔왔다. 귓가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한 방울 흘러내려 턱끝에 맺혔다. 이진은 손등으로 무심히 피를 훔쳐내며, 길준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에는 공포도, 분노도 없었다. 오로지 대상을 부품이나 수치로 환산해 보는 냉혹한 기술관료의 건조함만이 서려 있었다.

"보부상 도접장 길준이라 했는가."

이진의 목소리는 낮고 평이했으나, 가마터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울 만큼 기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내 손에 쥔 이것을 빼앗는 순간, 네놈은 물론이고 네놈의 배후에 있는 가문까지 역모의 피바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라? 이 미천한 놈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세작의 혀를 놀리느냐!"

길준이 안광을 부릅뜨며 대갈했다. 그러나 이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문구를 한 자 한 자 고고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경국대전 병전(兵典) 제오조(第五條). '조정의 군기시에서 관장하는 무기와 병장기는 주상의 군권을 수호하는 신물(神物)이니, 조정의 공식 사신이나 전령이 아닌 자가 이를 사사로이 강탈하거나 탈취하려 획책하는 자는 그 신분을 막론하고 즉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다스린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대명률(大明律) 병률 군정 편에 이르기를, 관청의 병기창에 무단으로 진입하여 제조 중인 변기(兵器)를 약탈하는 자는 군령을 어지럽힌 수괴로 보아 삼족을 멸하고 그 가산을 몰수한다 하였다."

이진의 시선이 길준의 비단 도포를 꿰뚫듯이 닿았다.

"내가 주조한 이 총열은 주상전하의 어명에 따라 군기시의 정식 제강 지휘권을 부여받아 생산한 국가의 공물이다. 네놈들이 든 그 쇠몽둥이와 철편이 주상의 어명보다 무거우냐? 감히 조정의 군기(軍器)를 사사로이 강탈하려 드는 것은, 주상의 군권을 찬탈하겠다는 역모의 수작임이 명백하다. 내 말이 틀렸는가, 판관 나리?"

이진의 시선이 길준의 뒤쪽,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군기시 판관 김자겸에게로 향했다. 김자겸은 이진의 서슬 퍼런 법리 추궁에 안색이 흙빛이 되어 급히 소매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무리 이이첨의 비호를 받는 보부상단이라 할지라도, 대명률과 경국대전의 자구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역모'로 몰아세우는 마당에 대놓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이놈이...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길준이 짐짓 큰소리를 쳤으나, 그의 발걸음은 미세하게 멈칫거렸다. 율법을 칼날처럼 휘두르는 이진의 기세에 사병들 역시 서로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그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대치 속에서, 서태린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가마터 구석에 서 있던 믿을 만한 장인 몇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의 손에는 정련 과정에서 불순물로 걸러내어 양동이에 모아둔 황(S) 정련 찌꺼기와 끓는 가마에서 퍼 올린 뜨거운 유황액이 들려 있었다. 유독가스를 뿜어내는 황색의 액체는 공기와 닿아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매캐한 냄새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한 걸음만 더 움직여라! 이 가마터의 백탄 가루와 유황액이 섞이면 어찌 되는지 네놈들의 그 무식한 머리로도 잘 알 것이다. 불씨 하나만 던져도 이 포구 전체가 화염 지옥으로 변할 터,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어디 한 번 들어와 보거늘!"

서태린이 횃불을 유황 양동이 근처로 가져가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장인들 역시 급조한 화염 방초 유황액을 가마 입구에 배치하고 이진의 뒤를 든든히 지지하며 늘어섰다. 가마터의 지형과 가연성 물질을 완벽히 장악한 그들의 배수진에, 보부상 사병들의 얼굴에 비로소 진정한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길준은 이빨을 부득 갈았다.

"이 천한 기술쟁이 가솔들이 단체로 미쳤구나. 네놈들이 여기서 우리를 죽인다 한들, 조정의 대관들이 네놈들을 가만둘 것 같으냐? 당장 무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삼족을 멸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네놈이 될 것이다, 길준."

이진이 차갑게 가로막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터의 연산 장치가 다시금 정교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번 연산은 쇠의 응력 분포가 아니었다. 지난 나흘간 군기시 야철 터에서 수집한 원자재의 입출고 수치, 그리고 가마터 한편에 더미로 쌓여 있던 조잡한 동철의 성분 비율에 대한 귀납적 회계 연산이었다.

[인지 연산 개시: 군기시 동철 및 백탄 수급 데이터 대조.] [최근 3개월간 평안도 영변 및 삼등 현에서 납품된 무쇠 및 동철 총량: 12,000근.] [실제 군기시 주조에 사용된 총량: 4,500근.] [잔여 불량 무쇠의 황(S) 함유량: 1.8% 초과. 규격 미달.] [차액 7,500근의 행방 추적 및 단가 연산: 엽전 기준 약 3,000냥의 차액 발생.]

이진의 눈동자가 기계적인 안광을 뿜어냈다. 뇌가 타들어 가는 고열 속에서, 그는 조작된 장부의 모순을 완벽하게 귀납해 냈다.

"길준. 네놈은 대북의 권세에 기대어 군기시에 기준 미달의 똥철을 납품하고, 그 차액으로 막대한 폭리를 취해왔다. 그뿐인가? 조정에서 지급한 양질의 무쇠와 동철 7,500근을 몰래 빼돌려 사사로이 처분했지."

"무, 무슨 근거로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느냐! 조정의 감찰을 거친 정당한 거래였다!"

길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정당한 거래라?"

이진이 비웃음을 흘렸다.

"군기시 대장에 기록된 동철의 무게와, 실제 이곳 제1포구 지하 창고에 적재된 불량 동철의 무게는 일치하지 않는다. 황 성분이 가득해 쓸모없는 똥철을 양질의 무쇠로 둔갑시켜 납품한 뒤, 진짜 양질의 선철은 네놈들의 보부상 루트를 통해 사사로이 유통했지.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말해주랴?"

이진은 길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마터 서쪽 모퉁이에 자리한 도접장 직소를 정확히 가리켰다.

"도접장 직소 안쪽, 두 번째 책장 뒤편 바닥을 뜯어내면 붉은 칠을 한 이중 궤짝이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네놈이 군기시 관리들과 결탁하여 작성한 이중 수납 장부와, 진짜 무쇠를 빼돌려 처분한 은자(銀子)의 거래 내역이 적힌 위조 회계 장부가 보관되어 있겠지. 내 말이 틀렸다면, 지금 당장 금부 도사를 불러 저 바닥을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

길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 이중 궤짝의 존재는 오직 자신과 이이첨의 최측근 가솔들만이 아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군기시 가마터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쇳물이나 만지던 일개 평민 기술 학자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자신의 직소 내부 구조와 비밀 장부의 보관 위치를 마치 눈으로 본 듯이 짚어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 것이다.

이진의 귀납적 연산은 정확했다. 야철 가마터 주변의 마차 바퀴 자국 깊이, 석탄과 백탄의 보관량 대비 소모율, 그리고 장인들이 은밀히 나누던 원자재 부족에 대한 불평등을 종합하여 도출한 유일무이한 물리적 결론이었다.

"네놈이 이곳에서 날 죽이고 총열을 빼앗는 순간, 그 장부는 내 안속(眼屬)들이 즉시 사헌부와 의금부에 제출하도록 조치해 두었다. 대명률 제소 과정에서 네놈의 목이 먼저 달아날까, 아니면 내 목이 먼저 달아날까?"

이진의 차가운 압박에 길준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기병의 검술과 가문의 권세로 군기시의 미천한 장인들을 짓누르려던 거대 상단의 도접장이, 아무런 무력도 없는 평민 학자의 정확한 회계 수치와 조정 법령의 올가미에 걸려들어 사지가 결박당한 꼴이었다. 가마터의 장인들은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며 경외심 어린 눈으로 이진을 바라보았다.

"이... 이 악랄한 놈..."

길준이 이를 갈며 칼자루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죽일 수도,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과연... 소문대로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가마터 입구의 무거운 장막을 제치고, 차갑고도 격조 높은 목소리가 공간을 얼려버릴 듯 파고들었다.

보부상 사병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며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검은 비단 관복 위에 학무늬 흉배를 정교하게 수놓은 사내, 매의 눈빛처럼 날카로운 안광과 정돈된 수염 사이로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조정의 실권자이자 대북의 거두, 이이첨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이이첨은 바닥에 낭자한 쇳물 잔해와 유황 양동이를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 이진의 코앞까지 걸어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짙은 침향 냄새가 가마터의 매캐한 유황 냄새를 압도했다.

"네놈이 주상의 눈을 가리고 요술을 부린다는 그 이진이냐."

이이첨의 시선이 이진의 손에 들린 은백색 총열, 그리고 그의 귀에서 흘러내린 핏자국에 머물렀다. 이이첨은 가늘게 눈을 뜨며, 천천히 손을 뻗어 이진의 턱끝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이혈의 온기를 느끼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쓸 만한 사냥개라 여겼더니, 주인을 무는 법부터 배웠구나. 허나 명심해라. 이 조선에서 주상의 군권과 철광의 이권을 쥐고 흔드는 것은 일개 기술쟁이의 법리 나부랭이가 아니다."

이이첨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진의 턱뼈가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으나, 이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정객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놈이 살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방금 주조해 낸 그 무결함 총열의 제법 비방과 가마의 통제권을 조정에 영구히 단전(單專) 헌납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이 법전을 읊조리기도 전에 이 가마터 전체를 역모의 소굴로 만들어 흔적도 없이 쓸어버릴 터이니."

대북의 거두가 던진 잔혹한 양자택일의 칼날이 이진의 목덜미를 차갑게 겨누었다. 가마터의 온도가 다시 한번 얼어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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