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이윤정의 가마가 멀어지며 남긴 바퀴 자국 위로 밤안개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흘. 주상전하가 직접 참관하는 재시연까지 허락된 시간은 오직 그뿐이었다. 기한 내에 폭발하지 않는 조총의 총열을 주조하지 못한다면, 이 가마터의 장인들은 물론이고 이진의 목숨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터였다. 목덜미를 스치는 야풍이 칼날처럼 서늘했으나, 이진의 동공은 되레 기계적인 냉정함으로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귓가에서 가늘게 흘러내린 핏방울이 턱 끝을 타고 바닥의 붉은 흙 위로 툭툭 떨어졌다. 뇌수를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때렸지만, 이진은 손등으로 피를 무심히 문질러 닦아낼 뿐이었다. 그의 망막 위로 푸른빛의 시뮬레이터 연산 창이 다시금 명멸하며 가혹한 숫자의 행렬을 쏟아냈다.
[경고: 인지 연산 장치의 한계 부하율 87% 도달. 지속적인 가상 주조 연산 시 대뇌 피질의 영구적 손상 위험 존재.]
"연산 지속."
이진은 혼잣말로 낮게 읊조렸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나흘 동안 가마 내부의 가열 곡선을 어떻게 제어해야 할지, 그리고 철광석 안의 황과 인을 분리할 슬래그 배합을 어떻게 도출할지 수만 번의 시물레이션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웅크리고 있는 장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주눅이 든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노야(爐冶) 장인들이 이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가마를 전부 허문다."
이진의 첫마디는 장인들의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선언이었다. 수십 년간 흙 가마를 만져온 늙은 장수(匠手) 하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의 땀을 훔치며 소리쳤다.
"허물다니요! 나흘 뒤면 주상께서 납시는데 가마를 새로 지으라니, 이는 우리더러 그냥 목을 길게 빼고 칼을 받으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지금의 가마로는 온도를 천이백 도 이상 올릴 수 없다. 올린다 한들 가마 벽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거나, 내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틈새로 가스가 다 새어 나간다."
이진은 대답 대신 장인의 발밑에 굴러다니던 점토 덩어리를 구두 끝으로 툭 찼다.
"조총의 총열이 터지는 것은 연철의 질이 낮기 때문이고, 연철의 질이 낮은 것은 제련 가마의 기밀성이 떨어져 황을 분리할 만큼의 고온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가열 압력을 가둘 수 있는 가압 기밀 가마를 새로 세운다. 지금 당장 점토에 석회석 가루와 규사를 섞어라. 칼슘 농도를 정밀하게 보정해야 가마 벽이 깨지지 않는다."
조선 장인들의 눈에는 이진의 지시가 해괴망측한 풍설처럼 들렸을 터였다. 점토에 돌가루를 섞는 것도 모자라, 보이지도 않는 칼슘의 농도를 맞추라니. 하지만 이진의 눈빛에는 한 치의 타협도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오직 공정의 성공을 위한 부품으로만 여기는 철저한 기술관료의 안광이 장인들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억눌렀다.
"꾸물거릴 시간 없다. 가마를 허물고 벽돌을 구워라. 내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흘 뒤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군율 위반으로 참수해 달라고 판관에게 청할 것이다."
그 서슬 퍼런 협박에 장인들은 결국 욕설을 삼키며 삽과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가마터 구석에서 흙먼지가 부옇게 일기 시작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서태린이 이진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그녀의 거친 손에는 기름때 묻은 삼베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태린은 사내들의 음흉한 시선이나 권력자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을 한낱 계집이 아니라, 오직 가마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만 응시하는 이진의 기이한 시선에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태린이 보따리를 풀어 헤치자 빛바랜 책 한 권이 나타났다. 가마터 창고 깊숙한 곳, 썩어가는 목재 틈에 숨겨져 있던 그녀 아비의 야철 일지였다.
"아버님이 평안도 영변에서 철을 구우실 때 쓰시던 일지입니다. 조정에서는 아버님이 불량 화포를 만들어 역모를 꾀했다고 누명을 씌웠지만, 아버님은 마지막까지 철 자체가 오염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진은 일지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한 장씩 넘어가는 종이 위로 거친 붓글씨와 기하학적인 가마 도면들이 나타났다. 이진의 안구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시각 정보가 뇌 속의 시뮬레이터로 전송되자, 즉각적인 분석 수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데이터 분석 중: 1600년대 평안도 영변 지역 철광석 성분.] [유황(S) 함유량: 0.45% ~ 0.62% (극도로 높음).] [인(P) 함유량: 0.12% (취성 유발 수준).] [분석 결과: 전통적인 토법(土法) 제련으로는 황의 농도를 강하할 수 없음. 철광석이 녹는 과정에서 황이 철 격자 사이로 침투하여 상온 취성을 극대화함. 미세 균열의 주원인.]
"과연."
이진의 입술 틈으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서태린의 아비는 현대적인 화학 기호는 몰랐으나, 가마의 불꽃 색과 슬래그의 점도를 통해 황의 존재를 '황독(黃毒)'이라 규정하고 이를 없애기 위해 소석회를 투입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좌절이 그 누런 종이 위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아버님의 기록이 쓸모가 있습니까?"
태린이 긴장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이진은 일지를 덮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감각한 눈동자에는 슬픔이나 동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가치 있는 정보에 대한 만족감만이 서려 있었다.
"매우 유용하다. 이 기록 덕분에 평안도 무쇠의 불순물 거동 패턴을 연산할 기초 값을 얻었다. 소석회와 점토의 배합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이제 확실해졌다."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가마터 입구에서 거친 고함성이 들려왔다.
"게 누구냐! 조정에서 파견된 감역(監役)들이 오셨거늘, 어찌 마중하는 자 하나가 없단 말이냐!"
푸른 비단 관복을 걸친 사내 둘이 군졸들을 거느리고 가마터 안으로 거들먹거리며 걸어들어왔다. 대북(大北) 세력의 실세인 이이첨의 수하이자, 군기시의 원자재 관리를 감독하는 감역들이었다. 그들은 가마를 허물고 있는 장인들을 보며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이 무슨 망동이냐! 주상전하의 재시연이 코앞이거늘, 멀쩡한 가마를 부수고 장작을 낭비하다니! 당장 멈추지 못할까!"
감역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채찍을 휘두르며 장인들을 위협했다. 장인들이 흙손을 놓고 넙죽 엎드리자, 이진이 그들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가열 압력을 제어하기 위해 벽돌 가마를 신축하는 중이오. 방해하지 말고 물러서시오."
"방해라니! 감히 미천한 야장이 조정의 관리에게 대드는구나! 이 가마터의 모든 철광석과 숯은 나라의 재산이다. 네놈이 멋대로 허비하게 둘 수 없다!"
감역의 눈빛에는 탐욕과 적개심이 번뜩였다. 그들은 이이첨의 비호 아래 군기시에 납품되는 백탄과 동철의 수량을 조작하여 막대한 사익을 취해온 자들이었다. 이진이 새로운 가마를 짓는답시고 자재를 검수하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횡령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진은 감역의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품속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지난 며칠 동안 군기시의 장부와 창고의 실재고를 대조해 정리해 둔 법리적 무기였다.
"대명률(大明律) 형률 제삼백이십조, 조세 및 관물 횡령 조항을 아시오?"
이진의 건조한 목소리가 가마터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의 장리 수납 조항에 따르면, 관가에서 백성에게 빌려주는 곡식이나 관물의 이자는 연 오할을 넘지 못하며, 이를 어기고 사적으로 이익을 취하거나 관물을 빼돌린 자는 장(杖) 일백 대와 유(流) 삼천리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소."
감역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네, 네놈이 무슨 괴설을 지껄이는 것이냐!"
"내가 지껄이는 것이 괴설인지, 아니면 당신들이 지난달 평안도 보부상 길준에게 뇌물을 받고 군기시 장부에서 누락시킨 백탄 이백 가마의 행방이 괴설인지는 사헌부 대간들이 판단할 문제요. 지금 당장 이 가마터에서 꺼지지 않는다면, 이 장부의 사본을 사헌부에 직접 제출하겠소. 내 목이 날아가기 전에 당신들의 삼족이 먼저 대역죄로 엮여 압송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소?"
이진은 현대의 치밀한 기업 감사 기법을 조선의 율법에 적용하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명분과 법리의 칼날이다. 이이첨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을지라도, 명백한 관물 횡령의 증거가 사헌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감역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진의 차가운 눈빛지장에는 거짓이 없었다. 저 미치광이 기술자는 정말로 자신들과 함께 파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 고얀 놈... 감히 조정의 관원을 협박하다니! 두고 보자!"
감역들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황급히 가마터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비겁한 뒷모습을 보며 엎드려 있던 장인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제 흙을 섞어라."
이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었다. 장인들은 이제 이 외지인 사내가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무서운 지배자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진의 지시에 따라 가마터는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토와 고령토를 칠대 삼의 비율로 섞고, 거기에 잘게 부순 석회석 고루를 첨가하여 만든 벽돌이 가마터 한편에서 구워져 나왔다. 이진의 머릿속 시뮬레이터는 끊임없이 벽돌의 수축률과 열팽창 계수를 계산하며 불량품을 골라냈다.
"이 벽돌 표면에 붉은 소강재(燒鋼滓)를 덧바르십시오."
서태린이 이진의 지시에 따라 제련 과정에서 나온 철 찌꺼기와 산화철 가루를 물에 개어 벽돌 표면에 발랐다. 이것은 고온에서 일종의 유약 역할을 하여 벽돌 내부의 미세한 기공을 막아주고, 열기가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원천 차단하는 이진만의 독창적인 설계였다.
"말도 안 돼. 이런 해괴한 방법으로 지은 가마가 불길을 견딜 리가 없어."
수십 년간 야철을 해온 원로 장인들이 가마터 구석에서 수군거렸다. 그들의 경험칙으로는 가마 벽은 불길이 통할 수 있도록 숨을 쉬어야 했다. 기밀성을 높인답시고 벽돌을 촘촘히 쌓고 철 가루를 바르는 짓은 가마를 폭발시키는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가마에 첫 불이 지펴지고 서서히 온도가 오르기 시작하자, 장인들의 조롱은 경악으로 변했다.
보통의 흙 가마라면 내부 온도가 천 도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열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벽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마련이었다. 그 틈새로 불그스름한 가스가 새어 나오며 가마 전체가 주저앉는 것이 예사였다.
하지만 이진이 설계한 벽돌 가마는 달랐다.
벽돌 표면에 발라진 소강재가 열을 받아 유리질처럼 매끄럽게 녹아내리며 벽돌 사이의 틈새를 완벽하게 메웠다. 가마 내부의 열기는 밖으로 단 한 줌도 유출되지 않은 채, 오직 화구(火口)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만을 빨아들이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가마 외벽은 붉게 달아올랐으나 미세한 균열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가마가... 가마가 깨지지 않는다!"
"불길이 안에서 맴돌며 백열(白熱)로 변하고 있어!"
늙은 장인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마 앞으로 기어 나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평생을 바쳐도 도달하지 못했던 제천(製天)의 영역이, 이 젊은 사내의 기이한 공식 몇 개로 눈앞에 구현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이제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깊은 경외심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진은 가마의 관측창을 통해 내부의 백열광을 응시했다. 시뮬레이터의 온도계가 마침내 천이백 오십 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래그가 완전히 융해되어 황 성분을 머금고 분리되기 직전의 임계 온도였다.
"지금이다. 수분율을 낮춘 점토로 가마의 모든 송풍구를 봉인해라!"
이진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산소 공급을 제한하여 가마 내부를 강한 환원 분위기로 전환하고, 압력을 극대화하여 철 내부의 탄소와 불순물을 태워 없애는 마지막 단계였다.
장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축축한 점토로 가마의 틈새를 메우기 시작했다. 가마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상승하며, 묵직한 철제 가마 띠가 터질 듯 팽팽하게 팽창했다.
천삼백 도.
마침내 조선의 제철 역사상 단 한 번도 도달해 보지 못한 극한의 온도 영역에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너무나 강력한 열기에 이진의 머릿속 시뮬레이터 연산 루프가 터질 듯이 회전했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피가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바로 그 순간.
구우우웅-!
가마 내부 깊숙한 곳에서, 지금까지의 타오르는 불꽃 소리와는 전혀 다른 기괴하고 묵직한 이상 진동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마를 감싸고 있던 철제 띠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